여권 중진들, 사정 물벼락에 ‘침수’
  • 이숙이 기자 (sookyiya@sisapress.com)
  • 승인 1998.08.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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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 리스트 정치인’ 안절부절…청와대 “본격 사정 시작도 안했다”엄포

정치권 사정이 여권 중진들의 판도를 변화시키고 있다. 당내에 탄탄한 세력을 구축하고 있던 의원이 사정 한파에 휘말려 하강 곡선을 그리는가 하면, 이를 틈타 새롭게 강자로 떠오르는 의원도 있다. ‘이제는 사정의 표적에서 벗어났다’고 안심하던 국민회의 의원들 사이에 과거의 악몽이 되살아나고 있다.

 김대중 대통령은 취임 이후 줄곧 ‘여·야 가리지 않고 치겠다’며 성역 없는 사정을 강조하고 있다. 수해 보도로 정치권 뉴스가 뜸했던 지난 8월9일에도 박지원 공보수석은 “과거 인물이든 현재 인물이든, 여권 인사든 야권 인사든 가리지 않고 비리 혐의에 대한 물증이 나타나면 가차없이 처벌할 방침이다”라고 말해 김대통령의 정치권 사정 의지가 얼마나 강력한지 다시 한번 확인해 주었다.

 이런 와중에 터져나온 이른바 ‘경성 리스트’는 설마하던 여권 인사들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고 있다. 검찰이 이례적으로 공개한 수사 진행 내용에 한나라당 의원 대신 국민회의와 자민련의 중진급 인사들이 대거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당사자들이 펄쩍펄쩍 뛰며 혐의 사실을 부인하고, 청와대도 나서서 이 리스트는 잘못된 것이라고 발표했지만, ‘경성 리스트’가 여권 인사들에게 미친 충격은 말할 수 없이 컸다. 여권도 정치권 사정의 예외가 아니라는 청와대의 경고가 한자락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관련 의원 “검찰 내부 반개혁 세력 음모”주장
 국민회의는 경성 리스트 파문을 일단 한나라당과 검찰내 반개혁 세력의 음모로 보고 있다. 검찰의 경성 사건 수사가 작년 12월 대선 이후에만 국한된 ‘반쪽 수사’인데다, 수사가 진행 중인 사건은 공개하지 않는다는 관례를 깨고 이례적으로, 그것도 휴가 중이던 박순용 서울지검장이 돌연 출근해 기자회견을 하고 다시 휴가지로 돌아갔다는 점이 여권이 내세우는 음모론의 근거다. 한마디로 검찰 내부의 구 여권 지지 세력이 한나라당에 경성 리스트를 흘리고, 한나라당은 이를 실명으로 공개했으며, 검찰이 다시 이 실명을 확인해 주었다는 것이다.

 검찰의 ‘음모’에 국민회의는 법적으로 대응할 태세다. 안동선 부총재는 지난 4일 경성그룹에서 대출 청탁을 받은 의혹이 제기된 정치인들의 명단을 실명으로 공개한 한나라당 김 철 대변인을 명예 훼손 혐의로 서울지검에 고발했다. 조홍규 의원 역시 같은 날 박순용 서울지검장을 명예 훼손 혐의로 대검에 고소했다. 조의원은 고소장에서 ‘박지검장이 당사자들에 대한 기초적인 사실 관계조차 확인하지 않고 제3자의 진술만을 공개해 정치인의 명예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검찰이 야당의 정치 공세를 뒷받침하는 저의가 무엇인지 의심스럽다’면서 검찰에 대한 강한 불신을 나타냈다. 여당 의원이 검찰 간부를 고발하기는 유례가 없다.

 검찰에 대한 여권의 눈길이 곱지 않은 이유는 또 있다. 지난 3일 국회의장 경선 직전 ‘검찰, 홍인길 의원 소환 방침’이 보도되자 국민회의 내부에서는 검찰이 당시 한나라당 민주계의 도움이 절실했던 여당을 곤경에 빠뜨리기 위해 일부러 홍의원 소환설을 흘렸다며 강한 의혹을 제기했다.

 이러한 여권의 불만은 국민회의 출신 박상천 장관에 대한 불만으로 이어지고 있다. 검찰 내부의 반대파도 가려내지 못하고 무엇하느냐는 것이다. 8월 말로 예정된 검찰 정기 인사에서 확실히 아군·적군을 골라내야 한다는 강경론도 나오고 있다. 국민회의 한 고위 인사는 “우리 당 의원이 법무부장관으로 가 있어도 소용없다. 오히려 잘못된 정책에 대해 공격도 못하고 벙어리 냉가슴만 앓고 있다”라고 답답한 속내를 털어놓았다.

 하지만 국민회의측 분석대로 경성 리스트 파문이 단순히 검찰내 반개혁 세력의 음모라고만 보기에는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 그동안 검찰 일부에서 정보 흘리기를 통해 정치에 개입한 사례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정권 초기에 검찰총장이나 장관 모르게 그런 일을 감행하는 것이 과연 가능하겠느냐는 것이다. 때문에 일각에서는 권력 상층부가 리스트 발표를 알고도 모른 척했으리라는 관측도 나온다. 어차피 정치 개혁을 밀어붙여야 할 청와대 처지에서는 ‘리스트 정치’를 통해 자연스레 부실 정치인을 솎아내려 했고, 이 과정에서 국민회의 인사도 포함된 것 아니냐는 것이다. 실제로 리스트 정치는 청와대가 차마 직접 칼을 대기 어려운 여권 인사들을 퇴출시키는 데 유용한 방법이다.

정대철 · 김상현 · 안동선 정치 생명 큰 타격
 이런 사정 한파 속에 새롭게 나타나고 있는 현상이 바로 국민회의 중진들의 부침이다. 우선 경성 리스트에 오른 김봉호·정대철·안동선·이용희 부총재는 이름이 거론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이미지에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특히 이들 중 유일하게 경성 측으로부터 돈을 받은 것으로 알려진 정대철 부총재는 “적법한 후원금이었다. 포토 라인에 서는 것은 끔찍하지만 차라리 검찰에 불려가 결백을 입증하는 것이 낫겠다”라며 초조감을 나타냈다.

 경성 리스트에 오르지는 않았지만 권노갑 부총재와 김상현 고문은 급류를 타고 있는 정치권 사정의 불똥이 행여 자신들에게까지 튀지 않을까 노심 초사하고 있다. 권부총재는 이미 유탄을 맞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초 국민회의에는 권부총재가 사면될 경우 당내 중진 그룹의 역학 구도에 큰 변화가 생길 것이라며 긴장감이 감돌았다. 하지만 정치권에 대한 여론이 나빠지면서 권부총재는 사면 후 당분간 외국에 나가는 쪽으로 방향을 선회했다. 그만큼 그의 정치 일선 복귀가 늦어지는 셈이다.

 김상현 고문은 정치인 사정 한파가 행여 그의 정치 생명을 건 재판에 악영향을 미치지나 않을까 가슴을 졸이고 있다. 한보그룹으로부터 5천만원을 받은 혐의로 불구속 기소된 그는 1심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고 현재 2심에 계류 중이다. 같은 한보 사건으로 수감된 권부총재가 풀려나야 자신의 재판에 유리하다고 보고 촉각을 곤두세우던 그는 권부총재 사면이 굳어지자 8월6일부터 10일까지 환경 세미나 참석차 중국에 다녀왔다.

 사정 한파에 몸을 움츠리고 있는 이들과 달리 조세형 총재권한대행과 한광옥·김원기·김영배 부총재 등은 한껏 날개를 펴고 활동 반경을 넓혀가고 있다.

 원내에 진입한 후 처음 치른 여·야 대결에서 여당 국회의장을 만들어낸 조대행은 이를 계기로 김대통령이 사실상의 ‘대표’ 대우를 해줌에 따라 급격히 힘을 얻어 가고 있다. 조대행은 박준규 의장으로부터도 선물을 받았다. 박의장이 쓰던 의원회관 222호를 물려받게 된 것. 한나라당 조 순 의원과 217호를 놓고 다투던 조대행은 JP 옆방에 입주하게 되자 얼굴이 밝아졌다.

조세형 · 한광옥 · 김원기 · 김영배 ‘떠오르는 별’
 한광옥·김원기 부총재는 각기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민화협)와 제2기 노사정위원장이라는 중책을 맡아 김대통령의 통일·노동 정책을 보좌하고 있다. 특히 한부총재는 민화협 활동을 통해 자신의 이미지를 통일 전문가로 끌어올린다는 목표를 세워 놓고 있다. 그동안 약점으로 지적된 ‘대중성 부족’을 이번 기회에 극복하겠다는 생각이다. 한부총재 측근들은 한부총재가 김대통령의 통일 정책에 획기적으로 기여할 경우 차기 당권 도전에 매우 유리할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최근 국민회의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뜨고 있는 중진은 단연 김영배 부총재다. 그는 조대행이 ‘대표’로 격상되면서 내놓은 8인 협의회 국민회의측 대표와 정치개혁특위 위원장 자리를 모두 승계했다. 게다가 국회 부의장으로 자리를 옮기는 김봉호 의원이 맡았던 지도위 의장과 머지 않아 발족할 당 개혁추진위 위원장도 김부총재가 맡게되리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명실 상부하게 조대행의 대행으로 떠오르고 있는 셈이다. 이런 김부총재의 떠오름은 단순히 국회의장을 양보한 데 대한 ‘DJ의 선물’로만 보기에는 과하다. 그래서 조대행에게 지나치게 힘이 쏠리는 것을 견제하려는 ‘권력 분산책’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청와대의 한 핵심 인사는 “정치인 사정은 아직 서곡도 울리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김대통령의 정국 운영 시나리오에 따르면, 본격적인 정치인 사정은 경제 안정 이후인 올 연말께라는 얘기다. 사정 한파가 다가올수록 국민회의 안에서는 희비가 엇갈리는 중진이 늘어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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