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이 되어 ‘하산’하는 프랑스의 별
  • 파리 · 류재화 통신원 ()
  • 승인 2006.05.08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지네딘 지단, ‘독일월드컵 후 은퇴’ 선언…언론들, ‘탄식’ 퍼레이드

 
지네딘 지단은 더 이상 중원의 사령관이 아니다. 그는 '신'이다. 지단이 이번 독일 월드컵을 마지막으로 완전히 유니폼을 벗겠다고 밝힌 지난 4월26일, 프랑스 언론들은 인간인 그를 신이라 칭했다. ‘신의 황혼이 도래했다' '신이 지상(사실은 잔디밭)을 떠난다'. 신문 논설들은 신 없는 지상 세계의 쓸쓸함과 비애감을 시적인 운치로 읊었다.

그런데 신이 된 남자 지단은 신이 되기 전에는 '예수'였다. 지난해 지단이 프랑스 축구 국가 대표팀에서 은퇴하고 난 후, 지단 없는 프랑스팀은 월드컵 예선전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본선에도 진출할 수 없을지 모른다는 위기감과 굴욕감이 팽배했고, 정치·경제 상황도 무기력에 빠져 있었다.
 
무덥고 짜증나던 지난해 8월3일, 지단은 자신의 웹 사이트에 국가 대표팀에 복귀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이 낭보는 급속도로 퍼져 나갔다. 지단이 광고 모델로 뛰는 프랑스텔레콤의 이동전화 서비스 '오랑주'(오렌지)는 가입 고객자들에게 일제히 문자 메시지를 날렸다. '그가 돌아온다!'당신이 너무나도 그립습니다!'
 
이때 지단의 나이는 33살이었다. 죽음으로써 세상을 구한 예수와 같은 나이였다. 언론들은 나이의 연관성에 착안해, 감격에 겨워하며 '예수의 부활'을 알렸다. 그런데 지단이 구세주 예수로 등극한 2005년은 프랑스 공화국이 '라이시테 법'(정치와 종교의 분리법)을 제정한 지 100주년 되는 해이기도 했다. 이 속화된 세상에서 웬 신성 타령일까.

지단에게는 이런 평가가 따라다닌다. 신출귀몰하는 비범한 능력, 흠모감을 불러일으킬 만한 카리스마, 겸손함과 초연함, 숫기 없음, 말주변이 없거나 아니면 정확히 필요한 말만 하는 과묵함, 불우한 병자들과 가난한 이웃을 돕는 선한 사람. 지단은 신체 발육이 부진한 장애 아동을 돕는 '엘라'(ELA)의 대표 일꾼이며, 뛰어난 축구 선수 이전에 인간성 좋기로 소문난 호인이다.

한·일 월드컵 때는 ‘예수’로 불려

국가적 영웅인데도 미디어에 거의 모습을 비치지 않는 것도 호감을 사는 요인이다. 사람들 앞에 나서서 이래라 저래라 말하는 것이 싫어서 은퇴 후에도 축구 감독은 죽어도 못하겠다는 지단이다. 말 많은 프랑스인들은 이 말수 적은 영웅을 그래서 좋아한다. 아베 피에르와 함께 지네딘 지단은 프랑스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인물 1,2위에 몇 해째 선정되었다. 톰 크루즈, 브래드 피트, 리차드 기어, 조지 클루니 등의 쾌남아들에 이어, 지단은 프랑스인이 뽑은 세계 최고의 미남에서도 6위를 차지했다.

그런데 '지단은 신이다'라는 등식은 은유법이라기보다 환유법이다. 은유법은 유사성을 담보해야 한다. 환유법은 ‘유사성 없는 유사성'이다. 사물 속성 간의 '인접성', '전염성'이 더욱 강조된다. 이 전염성 덕분에 상상력은 날개를 단다. 스포츠는 정치가 되고 정치는 스포츠가 된다. 온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잘 인도할 모세와 같은 지도자가 필요한 시대이기 때문일까.

최근 프랑스에서 자주 나오는 한 텔레비전 광고물에서 지단은 빈 버스를 홀로 타고 시가지 이곳저곳을 돈다. 이어 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어서 타라’고 웃으며 손짓을 한다. 지단을 본 사람들은 다들 하던 일을 내팽개치고 버스에 올라탄다. 이윽고 빈 버스는 가득차고 그들은 어딘가를 향해간다.

민영 방송 카날 플뤼스의 정치 풍자 인형극 <기뇰>은 지단을 본받으라는 듯, 은퇴할 때가 되었는데 아직까지도 정계를 맴돌고 있는 늙은 정치 인사들을 지명한다. 또 <기뇰>은 지난 여름 지단이 돌아온다는 소식에 전국민이 발딱 '일어서는' 온갖 장면을 연출하기도 했다. 책상에 엎어져 낮잠 자던 사무직 노동자도 벌떡 일어나고, 엘리제궁에서 참모들과 체스를 두던 시라크 대통령도 벌떡 일어났다. 장관들과 국회 의원들도 양복 대신 파란색 유니폼을 입고 공관을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병원의 의사들도 흰 가운 대신 파란색 유니폼을 입고 병자들을 돌보았다. 경제계는 주식 시장에 나타난 '지단 효과'를 분석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도대체 무엇이 지단의 마음을 돌려놓았을까. 단순히 그의 불타는 애국심 때문일까. 어떤 '강력한' 입김이 작용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혹도 불거졌다. 의혹의 진상지는 다름 아닌 지단의 입이었다. 그는 한 스포츠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나한테 약간 신비한 일이 일어났다. 그런 느낌을 잘 설명할 수 없다. 당신은 아마 절대 만나지 못할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었다"라고 다소 알쏭달쏭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그 누군가가 '대통령' 아니면 월드컵 후원사 사장들 가운데 한 사람일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돌아온 지단이 반갑기는 하지만 그가 권력 실세들에 휘둘린 데 대한 실망감도 표출되었다. 과묵한 지단은 이런 억측에 화가 나 드디어 입을 열었다. “그 누군가는 바로 내 형님이다."

해프닝은 이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지난해 9월 7일 아일랜드와 치룬 월드컵 예선전에서 지단은 절대 안하던 '짓'을 하고 말았다. 프랑스 국가 '마르세예즈'가 울리자 가슴에 손을 얹은 것이다. 알제리계 프랑스인으로서, 지단이 군인들의 진군가로 쓰였던 마르세예즈를 거부해온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일이었다. 그런 그가 국기에 대한 경례를 안해서가 아니라, ‘했다’고 해서 오히려 프랑스 전역이 들끓었다. 사연인즉, 한 라디오 프로그램의 진행자이자 성대 모사가가 시라크 대통령의 목소리를 흉내내 지단한테 전화를 걸었고, ‘이번만큼은 한 번만 국민의 사기 진작을 위해 그렇게 해달라’고 애걸했다는 것이다. 순진한 지단은 감쪽같이 속았고, 레몽 도메네크 감독 및 다른 선수들과 충분히 상의한 끝에 그렇게 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프랑스인' 지단은 프랑스 블루팀의 주장만은 아니다. 그는 '백인-흑인-갈색의 아랍인'들이 융화된 프랑스 이민자 문화의 상징이기도 하다. 이민자 논쟁이 불거질 때마다 수세에 몰린 좌파들은 극우파들의 입을 닫게 하기 위해 "그러면 지단은 프랑스인이냐 알제리인이냐?" 하고 따졌다. 지난 대선 2차 투표 때 장-마리 르팽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제법 크게 냈던 지단이다. 그런데 요즘은 자기 본분인 축구 얘기만 하겠다고 말한다. 그는 "언젠가 내가 알제리로 되돌아가면, 그건 순전히 내 개인적인 이유이지 다른 정치적인 이유는 아닐 것이다"라고 말했다.

실제 경기 장면 담은 헌정 영화 곧 개봉

지네딘 지단이 은퇴 발표를 서두른 이유는 무엇보다 비장한 각오로 이번 월드컵 경기에만 몰두하기 위해서다. <지단, 21세기의 초상화>라는 영화가 이번 칸 영화제 비경쟁 부문에 올랐지만, 월드컵을 코앞에 둔 그가 턱시도를 빼입고 붉은 카펫을 밟으러 갈 것 같지는 않다. 

이 영화는 영화 감독이라기보다 비디오 아티스트라 불리는 것이 더 정확할 필립 파레노와 더글라스 고든이 공동 연출했다. 지단의 열광적인 팬인 두 사람은 어린 시절부터 지단을 카메라에 담기를 꿈꾸어 왔다. 그렇다고 어떤 팬의 시선으로 만들어진 전기 영화는 아니다. 축구 영화도 아니다. 예술가들 눈에 비친 또 다른 예술가에 대한 시대적 초상화이다. 축구장이라는 무대에서 벌어지는 한 인간의 모든 감정의 소용돌이를 잡아낸 한 편의 드라마다. 실제 시간과 영화 시간, 축구장과 극장이라는 유사하면서도 상이한 시공간적 만남을 문제제기하는 실험적인 예술 영화이다.

지난해 그는 스페인 마드리드의 산티아고 베르나보 경기장에서 치러진 레알 마드리드 팀 대 비아레알 팀과의 실제 경기를 그대로 촬영해 영화로 재현했다. 총 17대의 카메라가 동원되었으며, 이 가운데 두 대의 초고화질 카메라는 미국 군사용 특수 정찰 카메라로 미국에서부터 공수해왔다. 다른 용도로는 사용하지 못하도록 군사 요원 한 명이 영화 현장에 달라붙어 감시했을 정도다. 줌 및 클로즈업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이 특수 카메라는 지단의 발뒤꿈치, 목 뒷덜미의 땀방울, 심장의 박동 소리까지 모두 다 잡아냈다.
 
영화 <세븐>의 촬영 감독, <킹콩>의 음향 감독,  <아멜리 뿔랭>의 편집 감독 등 제작진도 화려하다. 프랑스가 덴마크와 친선전을 벌이는 오는 5월31일, 영화 <지단, 21세기의 초상화>는 프랑스 전국에서 개봉된다. 실제의 그를 만나러 갈까. 영화 속의 그를 만나러 갈까. 외국에 있는 팬들은 우선 극장부터 찾는 것이 좋겠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