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일외교에도 ‘개혁’ 필요
  • 도쿄ㆍ채명석 편집위원 ()
  • 승인 2006.05.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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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분보다 실익 외교로 전환해야ㆍㆍㆍ 경제현안 타결이 관건



 지난 2월 중순, 도쿄의 모토 아자부에 자리잡고 있는 주일 한국대사관 앞은 오랜만의 불청객을 맞아 갑자기 부산해졌다. 센다이 타카로 불리는 대사관 앞 언덕에 일본 우익 가두선전차가 올들어 처음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도 이전과는 달리 딱 한 대.

 이른바 ‘행동하는 우익’으로 분류되는 이들의 모습을 지켜보던 대사관의 한 관계자는 “작년 1년 내내 이들의 고성방가에 시달린 것을 생각하면 금석지감이 든다”고 말했다. 그러나 정신대 마찰 이후 드러난 일본의 嫌韓감정이 봄눈 녹듯 사라지고 있다고 짐작한다면 큰 오산이다. 또 작년에 ‘최악의 상황’으로 표현되던 한일관계가 어떤 전기를 맞이하고 있다고 해석하는 것도 너무 낙관적이다.

 도쿄에 거주하는 한국의 한 중견 언론인은 최근의 한ㆍ일관계를 ‘개점휴업 상태’라고 표현한다. 작년 1월 정신대 문제가 제기된 이후 한ㆍ일 양국 정부는 ‘보상과 사죄’ 공방을 핑계로 다른 현안에 대한 처리까지 함께 방치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의 대일외교가 개점휴업 상태인 것은 6공의 대일정책 부재가 빚은 결과라는 지적이 높다. 작년에 두 차례나 정상회담이 열렸는데도 정신대 문제를 비롯해 무역불균형, 기술이전 문제에 아무런 진전이 없었다. 기술이전을 촉진하기 위해 6공의 대일외교팀이 일본측에 제시했던 산업기술협력재단 설립지원금을 예로 들면, 작년 6월 한국측 요청액 1억5천만달러의 10분의 1도 안되는 금액을 일본측이 선심용으로 제공함으로써 체면치례를 했을 뿐이다.

 문제는 개점휴업 상태가 새로운 문민정권에서도 당분간 계속될 낌새를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김영삼 대통령은 당선후 첫 내외기자 회견에서 ‘대미ㆍ대일 관계 중시’를 표방했다. 일본 정부와 매스컴은 새 정권의 대일정책이 “총론에서는 미래지향이나 각론에 들어가면 결국 과거지향이 될 것”이라고 내다보고 “한ㆍ일관계의 급격한 원상회복은 당분간 어렵다”는 판단을 내리고 있다.

 일본의 한 우익 논객은 새 정권의 대일정책이 과거지향적 사고에서 크게 벗어날 수 없는 이유로 취임 5일전 김영삼 대통령이 <요미우리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행한 발언을 지적했다. 김영삼 대통령은 이 인터뷰에서 “정신대 문제는 배상 차원에서 해결할 일이 아니다. 역사적 진실을 규명하고 조상이 잘못 했다고 말한다면 한국민의 감정도 변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 논객은 “이런 발언이 일본인들에게는 ‘한국은 새 정권이 탄생할 때마다 사죄를 요구해온다’라는 모습으로 투여되고 있다”고 지적하고, 새 정권 출범 이후 다시 과거사에 대한 사죄 문제가 재연될 경우 한ㆍ일관계는 작년의 ‘최악의 상황’에서 더 후퇴할 가능성도 없지 않다고 내다보았다.

 

과거사ㆍ현안 분리정책 필요

 일본 언론들은 김영삼 대통령이 일본중시 정책을 표방하는 이유 중의 하나로 한국의 경제난을 들고 있다. 새 정권의 최대 과제인 경제 부양을 위해서는 일본과의 경제협력이 불가결하기 때문에, 6공 시절 북방정책의 뒷전에 밀렸던 대일관계를 회복하려 서두르고 있다고 본다.

 이에 대해 일본 외무성의 한 관계자는 “한국에 32년 만에 문민정권이 들어선 것은 대단히 환영할 만한 일이나 그렇다고 무역불균형 시정과, 기술이전 문제에 대해 과도한 기대를 하는 것은 금물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문제들은 과거사나 정치적 동기보다는 경제원칙에 따라 해결할 문제이기 때문이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서 한국에 문민정권이 탄생했다고 해서 경제현안에 대한 일본측의 종래 입장이 크게 바뀌지는 않을 것이라는 얘기이다.

 그러고 보면 새 정권의 이른바 ‘일본중시정책’은 닻을 올리기 전부터 암초지대에 서있다고 봐야 할 것 같다. 일본과의 관계 회복을 서두르면 서두를수록 과거사와 무역불균형 문제가 상호 증폭 작용을 일으켜 한ㆍ일관계에 새로운 마찰부터 빚을 가능성이 커진다.

 이 때문에 대일정책을 과감하게 바꿔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주일 한국대사관의 한 관계자는 “역대 군사정권의 경우 정통성 시비를 잠재우기 위해 반일감정을 정치에 이용해 왔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니 정권의 정통성 문제에 아무런 험이 없는 문민정권이 과거 군사정권의 대일정책을 그대로 답습할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그는 작년 1월 정신대 문제가 제기된 이후 다른 긴급 현안들을 타결하는 데 큰 지장을 받아온 점을 상기시키면서, 과거사 문제와 다른 현안을 분리시킨 ‘2분법 대일 접근’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다시 말하면 과거사 문제는 계속 거론해 나가되 일본과의 현안은 현실적으로 대처해 가는 분리정책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일본의 한반도 전문가인 게이오대학 오코노기 마사오 교수는 현재의 한ㆍ일관계가 ‘질적 전환기’에 있다고 본다. 즉 냉전체제가 종식되기 이전의 한ㆍ일관계는 반공을 공통분모로 한 특수한 관계였다. 예를 들면 공화당정권 때의 한ㆍ일유착, 전두환 정권에 대한 40억달러 경협 제공 같은 것은 모두 특수관계 때문에 가능했다. 그러나 냉전체제가 끝나고 한반도의 적화 위험성이 줄어듦에 따라 한국에 대한 일본의 정치적 프리미엄은 크게 소멸했다. 한국의 급격한 임금상승으로 경제적 프리미엄도 상대적으로 낮아졌다.

 한ㆍ일관계의 이같은 질적 변화를 무시한 채 한국측이 과거의 특수 관계에 매달려 대일외교에 임하기 때문에 “한ㆍ일관계가 ‘개업휴업 상태’에 놓여 있는 것이다”라고 오코노기 교수는 진단한다. 그의 이런 진단은 일본측 입장을 대변하는 논리라고 볼 수 있지만, 이전의 지한ㆍ친한파 인사들이 작년에 부채질한 이른바 ‘혐한현상’이 이런 배경에서 나온 점을 간파한 말이기도 하다.

 오코노기 교수가 지적했듯이 한ㆍ일관계가 변화해 가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한국의 문민정권은 이런 ‘질적 전환기’와 맞물려 출범한 셈이다. 그렇다면 새 정권의 대일외교팀이 새로운 자세로 대일 접근을 모색하지 않는 한 김영삼 대통령의 ‘일본중시정책’이 눈에 보이는 성과를 올리기는 벅찰 듯하다.

 일본은 걸프전쟁 이후 신칸센보다 더 빠른 속도로 ‘戰後로부터의 완전 脫却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야간 보통열차보다 더 느린 속도로 일본의 변화를 뒤쫓아 가고 있다는 비유도 나오고 있다.

 일본이 현재 추진하고 있는 ‘완전 탈각정책’은 현행 헌법을 개정하는 일과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이 되는 것으로 나뉜다.

 일본에 헌법개정 움직임이 드러난 것은 1955년 자유당과 민주당이 합당해 자민당을 결성한 때부터이다. 그 해 7월 ‘자주헌법 기성의원동맹’이 발족했고, 12월에는 자민당의 ‘헌법 조사회’가 출범했다.

 이 시기의 헌법개정 움직임은 자민당이 중심이었다. 그러나 유엔 평화유지활동(PKO)협력법이 성립됨을 계기로 가열되고 있는 요즈음의 헌법개정 움직임은 그때와는 양상이 다르다. 여당인 자민당뿐 아니라 야당과 노조, 언론까지 가세해 거대한 개헌파 집단을 형성해 가고 있다.

 

늦어도 금세기 말까지 헌법 개정

 작년 12월9일 <요미우리신문>이 설치한 ‘헌법문제 조사회’가 제시한 개헌 시간표는 헌법제정 50주년이 되는 96년까지 헌법개정에 대한 논의를 완료하고, 늦어도 금세기 말까지는 헌법을 개정해야 한다고 밝히고 있다. 또 이 보고서는 헌법개정에 필요한 국민의 승인절차제도를 갖추기 위해 ‘국민투표법’을 서둘러 제정하자는 구체적 절차까지 제언하고 있다.

 이 조사회보다 발걸음을 더 재촉하는 쪽이 자민당이다. 작년 12월25일 미쓰즈카파의 미쓰즈카 히로시 회장은 “헌법 제9조를 포함한 문제들을 7년 정도 시간을 갖고 검토하자”고 발언해 자민당의 개헌논쟁에 불을 질렀다. 그는 이어 올 1월 중의원 본회의에서도 헌법개정 문제를 정식으로 거론했다.

 자민당의 개헌세력은 이러한 엄호사격을 받으며 지난 2월5일 ‘헌법 조사회’를 가동하고 이번 국회가 폐회하는 오는 6월까지 중간보고서를 마련할 예정이다. 그후 야당에 ‘여야당 협의기구’를 제의하여 개헌문제를 정치권의 현안으로 부각시킨다는 시간표를 짜고 있다.

 한편 안보리 상임이사국에 진출하고자 하는 의욕도 일본의 헌법개정 움직임을 가속화시키는 큰 요인이다. 일본이 상임이사국에 피선될 경우 자위대를 유엔 평화집행부대(PEU) 파병하기 위해서는 집단적 자위권 사용을 금지하고 있는 현행 헌법 9조를 개정하 것이 불가피해지기 때문이다.

 일본의 하타노 다카오 주유엔대사가 지난 2월 <요미우리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일본의 상임이사국 진출 목표는 유엔 창립 50주년을  맞는 오는 95년. 그러나 그는 “안보리를 개혁하는 데 대한 각국 의견이 오는 6월가지 제출되어 9월 총회에 보고되면 그 시기가 의외로 앞당겨질 수도 있다”고 밝혔다.

 일본의 이런 급속한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대일정책에 관한 새 정부의 발상 전환이 시급하다. 그러나 취재 과정에서 만난 한ㆍ일 양측 관계자 모두는 ‘신사고 대일정책’이 필요하다는 점에는 적극 찬성하지만 정작 자신의 신분을 드러내며 방법을 밝히기를 꺼렸다. 마치 누군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아주기를 기대하는 듯한 태도였다.

 지금까지의 대일관계는 국민감정과 명분에 의해 좌우되어 왔다. 그러나 외교적 실익과 이성에 바탕을 둔 대일외교 또한 중요하다는 점을 지나쳐서는 안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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