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식사 모습 원없이 보았다”
  • 문정우 기자 ()
  • 승인 1992.04.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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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대 총선 방송보도 ‘여당 편들기’뚜렷 편파·축소·왜곡…방송위 ‘팔짱’만

 “나는 포드 대통령이 비행기에서 내리다 머리를 찧는 것을 보았다… 나는 카터가 소프트볼하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내가 텔레비전을 시청하느라 소비했던 그 많은 긴장된 시간 동안 후보들이 선거 이슈에 대해 말하는 것을 전혀 듣지 못했다. 그것은 뉴스가 아니었다”

 미국의 한 정치평론가가 76년 ABC 등 미국의 쟁쟁한 텔레비전의 대통령선거 보도를 보고 개탄한 말이다. 그러면 우리나라의 시청자들은 지난 14대 총선기간 동안 텔레비전을 통해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꼈을까.

 우선 대통령이 식사하는 모습은 아마도 원없이 봤을 것이다. 이번 14대 총선기간에는 5공시절이 무색할 정도로 텔레비전 저녁뉴스시간대에 노태우 대통령의 동정기사가 범람했다.

 MBC의 경우 3월1일부터 19일동안 저녁 9시 뉴스데스크에서만 하루 평균 1.5건,모두 합쳐 28건의 대통령 동정기사를 내보냈다. 그런데 그중에서 10건이 대통령이 사회 각 계층의 사람들과 오찬을 들거나 다과회를 갖고 별로 중요하지 않은 얘기를 나누는 모습이었다. 대통령 동정기사는 기자들 손을 거치지 않고 정치부장이 편집부장에게 전달하는 방식으로 ‘관리’돼 편집부 기자들의 강한 반발을 샀던 것으로 알려졌다.

 KBS도 MBC에 거의 뒤지지 않는데 지난 19일 9시뉴스에서만 대통령 동정기사를 3개 아이템으로 나눠 방송했다. 텔레비전 9시뉴스에서는 보통 20개 안팎의 아이템밖에는 소화할 수 없다.

 시청자들은 여권에서는 가장 카메라 ‘연기’가 뛰어 다니는 노대통령의 입을 통해 6공의 치적에 대해서는 자상하게 설명을 들을 수 있었던 반면 여당에게 불리는 정보는 제대로 얻을 수 없었다. 이번 선거에서 여당에게 악재로 작용했다는 안기부 요원의 흑색선전물 살포나 이지문 중위의 군 기무사 부재자투표관여 폭로사건 등에 대한 보도를 보자. 유권자들이 만약 텔레비전만 봤다면 두 사건은 여당에게 결코 악재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KBS는 안기부사건 전날밤 취재기자가 민주당측의 제보를 받고 기사를 작성해 송고했으나 ‘사실확인’을 이유로 보도를 미루다가 sbs와 MBC는 카메라 기자 1명과 취재기자 1명이 현장에 출동해 안기부 요원들의 육성을 녹취하고 안기부 신분증·도청기 등을 카메라에 담았기 때문에 아침 6시뉴스에서는 짤막하지만 그림이 좋은 보도를 했다. 그러나 아침 7시뉴스에서는 그림이 빠지고 9시45분 뉴스에서는 아이템 자체가 실종됐다. MBC는 안기부기사의 실종에 항의해 기자들이 비상총회를 여는 등 강경대응할 움직임을 보이자 9시 뉴스데스크에서는 정상적으로 보도했다. 그러나 양 텔레비전은 모두 저녁뉴스에서는 주로 검찰발표를 인용, 간단하게 사실보도만을 하는 데 그쳤다. 물론 안기부 사건에 대한 자체 취재 기사나 짤막한 논평조차 없었다.

국방부 해명 1분, 폭로내용 25초 방영 
 이지문 중위의 보도에 대해서는 국내 제일의 발행부수를 자랑한다는 <조선일보>가 제2사회면 1단기사로 처리하는 등 <한겨례신문>을 제외한 거의 모든 신문이 축소보도했고 방송도 예외가 아니었다. 선거보도감시연대회의의 제23차 보고서에 따르면 KBS는 9시 뉴스에서 <“공개투표” 상식밖>이란 인용부호위치가 알쏭달쏭한 제목하에 폭로내용(16초) 국방부 발표(30초) 각 당 논평(8초) 등을 기자 리포트로 처리했다. MBC는 뉴스데스크에서 제목을 <투표부정 부인>으로 달고 국방부 전면부인(1분) 폭로내용(25초) 각 당 논평(25초) 등을 역시 기자 리포트로 보도했다. sbs는 8시뉴스 말미쯤(11번째 꼭지)에 국방부 발표(40초) 폭로 내용(13초) 각 단체 진상규명 촉구 소식을 전했다. 또 ‘군부재자투표 증언에 대한 국방부 입장’을 꽉찬 화면으로 보여주기까지 했다. 결국 세 방송은 심하게 말하면 사건을 보도한 것이 아니라 국방부의 해명을 대변한 셈이다.

 참고로 KBS9시 뉴스 앵커 박대석씨의 이 사건 보도 시작말을 소개하면 “국방부는 육군 중위 이지문씨의 일부 부재자투표의 부정이 있었다는 주장과 관련해서 상식밖의 일이라고 일축하고 그러나 현지 부대의 확인조차가 끝나는 대로 그 결과를 곧 공개하겠다고 밝혔습니다”였다.

안기부와 기무사 보도는 언론계 내부에서도 큰 반발을 불렀다. 언론노련 한국기자협회 한국방송프로듀서연합회는 23일 공동성명을 발표 “우리는 집권여당과 자신의 운명을 동일시하거나 또는 집권세력의 간접적인 압력에 의해 보도내용을 축소 왜곡하는 일부 언론 경영진과 중간간부들의 보신행위를 강력히 규탄하면서 이들에게 남는 것은 오직 민주시민들의 무서운 심판뿐임을 경고한다”고 밝힌 바 있다.

 방송사들은 또 대학생의 불법선거운동 동원에 대해서도 관련 정당이 야당이냐 여당이냐에 따라 판이한 보도를 했다. 17일 국민당이 대학생들을 불법동원했다는 뉴스를 크게 부각시켰던 KBS는 그 다음날인 18일 국민당이 동원한 대학생 조직이 민자당과 끈을 맺고 있는 한맥회에서 떨어져나간 조직이라는 사실이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해서는 간략하게 앵커의 멘트만으로 보도했다.

 MBC는 17일 뉴스데스크에서 국민당의 대학생 불법선거동원을 기자의 리포트로 처리한 뒤 곧이어 ‘일본언론의 국민당 비판시각’을 곁들이는 ‘짜임새 있는’ 보도를 했으나 18일에는 민자당의 해명 위주로 간략히 보도했을 뿐이다.

“방송보도가 정치불신 조장”
 지난 13대 총선이나 대선 때처럼 기술적으로 영상을 조작하고 있다는 지적도 있었다. 특히 막판에 바람을 일으킨 국민당 정주영 대표는 눈에 띄게 홀대를 받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는 지적도 있었다(사진 참조).

 지난 13대 총선에 이어 이번 선거에서도 방송보도를 모니터하고 분석한 선감연의 전효명씨(여성민우회)는 노골적인 여당편들기나 영상조작보다도 더욱 개탄스러운 일은 방송보도가 정치불신을 조장하는 방향으로 일관한 것이라고 지적한다. 전씨는 “이번 선거 보도에서는 으레 선거 때면 등장하곤 하던 ‘안보상품’이 사라진 대신 후보와 유권자의 사이를 악화시키는 보도가 많았다. 이는 민주주의를 근본적으로 위협하는 위험스런 경향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면 방송의 공정성을 감시하는 유일한 법정단체인 방송위원회는 이번 선거기간 동안 무슨 일을 했을까. 방송위원회는 시민단체들이 방송보도를 열심히 모니터하고 수십차례에 걸쳐 보고서를 내놓는 동안 그야말로 그저 바라만 보고 있었다. 선거기간 초기에 극히 원론적인 선거방송기준을 내놓았을 뿐 한건의 심의보고서조차 발표하지 않았다. 그러나 방송위원회는 MBC 대하드라마 <땅>을 심의할 때는 16절지 10면 분량의 ‘대하 보고서’를 낼 만큼 열의를 보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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