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회의, 승리의 '고배'를 들다
  • 나권일 기자 ()
  • 승인 1999.09.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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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텃밭' 팡주 남구청장 보선에시 선승… "변화 요구 부응 못하면 총선도 힘들 것"

지난 9월9일 치러진 광주 남구청장 보궐 선거는 집권 여당인 새정치국민회의에 대한 호남 지역의 민심 이반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사건이었다.

  선거는 국민회의 정동년 후보(55)의 승리로 끝났다. 광주 남구지구당(위원장 임복진 의원)뿐만 아니라 국민회의 핵심 당직자들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남구청장 선거는 선거전이 진행되는동안국민회의 핵심 당직자들이 '패할 수도 있다'는 위기 의식까지 표출하리만큼 대혼전이었다. 정동년 후보는 여당이 텃밭이라고 자부하는 광주에서 여당의 공천을 받은 데다 여당 견제 세력인 시민단체가 지원했다는 프리미엄을 안고 출발했지만 선거 기간 내내 고전을 면치 못했다. 정후보는 '대통령이 부른 개혁 수혈 전국 1호'를 표방했으나 큰 반향을 얻지 못했다.

  정후보가 예상 외로 고전하자 16대 총선을 7개월여 앞둔 호남 민심의 동요를 그대로드러냈다고 본 국민회의 중앙당은 총력전을 필쳤다. 우선 9월4일 중앙당 핵심 당직자 11명이 대거 광주로 내려와 정후보 지원 유세를 펴며 바람몰이를 시도했다. 박광태 국민회의 광주시지부장을 비롯한 광주 지역 현역 의원들과 이만섭 총재권한대행 ·조세형 고문 이종찬 부총재 · 한화갑 사무총장 등 당의 간판을 비롯해 정동영· 추미애· 정한용 의원 등 여당의 스타급 정치인들이 정당 연설회에 대거 참석해, 국민회의 중앙당을 광주로 옮겨놓은 듯한 인상을 풍겼다. 이를 두고 '국회의원 선거보다 더하다' '국민회의가사활을 걸었다'는 말이 나돌았다. 그만큼 여당은 초조했다.

'낙하산공천' 시비로 선거전 내내 시끌
  이종찬 부총재는 지원 유세를 통해 "80년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으로 사형 선고를 받은 사람이 두 사람이다. 한사람은 지금 청와대에 계신 대통령이고, 다른 한 사람은 정동년씨다"라면서 정씨를 대통령과 결부해 호남 정서를 부추겼다. 다른의원들도 '압도적으로 정동년 후보를 지지해 정부의 개혁에 힘을 보태고 정치 개혁을 완수할 수 있게 해 달라'고 호소했다.

  그러나 남구 지역 유권자뿐만 아니라 광주 시민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국민회의 정당 연설회를 지켜보던 한 시민은 "구청 행정을 잘할 사람을 뽑는 구청장 선거에 왜 대통령까지 들먹이는지 모르겠다"라면서 투덜했다.  광주 남구청장 보궐 선거는 처음부터 여러 가지로 집권 여당에 불리했다. 지난해 6· 4지방 선거에서 여당 후보로 나서 당선된 박용권 남구청장이개인 비리 혐의로 구속되고, 남구의회 의원 9명이 선거법 위반으로 실형을 받아 남구의회 정원 18명 중 절반을 다시 선출해야 하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공천 과정에서도 말이 많았다. 김대중 대통령의 친인척인 김관선 광주시의원이 출마 의사를 내비쳤지만 이희호 여사가 만류해 중도에 포기했고, 여기에 지병문 전남대 교수, 명망가 그룹과 일부 시민단체의 추대를 받은 정동년씨가 무소속 출마 의지를 밝히자 국민회의는 고민에 빠겼다.

  고심 끝에 국민회의 중앙당은 대통령의 친인척을 배제하고 개혁적인 후보를 영입해 '호남 물갈이' 여론을 반영한다는 의미에서 정동년씨를 국민회의 후보로 내정했다. 여기에는 김대중 대통령을 직접 만나 '5 18 몫'으로 정후보 공천을 요구한 5 18 단체들의 강력한 지원 사격도 한몫 거들었다. 국민회의는 결국 남구 지구당이 정식으로 공천 신청을 받아 토론회까지 거쳐 추천한 다섯 후보를 공천에서 모두 배제하는 무리수까지 두어 가며 정후보를 공천했다. 정후보는 무소속 출마를 선언했다가 막판에 여당 공천을 거머쥐었다는 도덕성 시비에 휘말렀다. 광주 지역 시민단체들 사이에서는 '실리는 얻었으되 명분은 잃었다' 는 비판과 함께 내분 조짐까지 일어났다.

  이러한 '낙하산공천' 시비는 국민회의와 정후보를 선거 기간 내내 괴롭혔다. 현직 5 18 기념 재단 이사이고, 재야 출신인 데다 상대적으로 개혁적인 후보인데도 공천 과정은 기성 정치권의 행태를 고스란히 답습했기 때문이다. 한화잡 국민회의 사무총장은 광주에 내려와 이번이 5 18에 대한 마지막 정치적 배려라며 공천 과정에 무리가 있었음을 실토했다.

유권자 10%안 여당 후보에 투표
  사정이 이러니 유권자들의 선거 참여 열기가 낮을 수밖에 없었다. 한나라당은 공천을 포기했고, '낙하산공천 반대'를 내건 무소속 후보들이 출마를 선언했다. 유권자들의 냉소 속에 후보자 합동 연설회는 피킷을 든 선거 운동원들만이 지지 후보 이름을 외치며 빈 공간을 채웠다.

  공천이나 선거전 양상도 문제였지만, 선거 결과 역시 국민회의로서는 자랑할 것이 없었다. 투표율은 30.6%로 광주 남구 지역 역대 선거 가운데 가장 낮았다. 유권자 16만4천명 가운데 5만여 명만 투표에 참가한 것이다. 당선자인 정후보의 득표율은 35.2%로 나머지 64.8%는 무소속 후보 5명이 가져갔다 정후보가 얻은 1만7천4백여 표는 광주 남구 유권자의 10%수준.

  광주 남구청장에 당선된 정씨는 "민심의 질타가 얼마나 무섭고 중요한지 뼈저리게 느꼈다. 집권 여당인 국민회의 공천을 받고 나왔지만 이반된 민심을 되돌리기가 무척 힘겨웠다"라고선거 과정의 어려움을 토로했다(아래 인터뷰 기사 참조).

  광주 지역 시민단체 관계자는 "광주 남구청장 선거 결과는 정동년 후보의 저조한 득표율보다 유권자 대다수가 투표에 기권했다는 사실에 담긴 의미가 더 크다. 참신한 인물을 공천해 호남 사람들의 '변화' 요구에 부응하지 않는다면 내년 총선에서 비슷한 결과가 나올 수밖에 없을 것이다"라고 진단했다. 양형일 교수(조선대 · 행정학과)는 내년 총선에서 능력 있고 참신한 무소속 후보가 출마할 경우 여당 후보를 충분히 위협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호남 민심을 잴 수 있는 잣대로서 많은 관심을 끌었던 이번 보선은 무소속 후보들이 단일화에 성공했다면 결과가 달라질 수도 있었던, 국민회의로서는 참으로 힘겨운 선거였다. 국민회의 중앙당이 지방 선거에 당이 개입하지 않겠다는 당초 방침을 뒤집고 막판 총력전에 나섰던 상황을 감안하면, 내용으로는 국민회의가 패했다고도 볼 수 있다. 특히 투표을 30.6%와, 유권자의 10%만이 여당 후보에게 표를 던진 이번 결과는 국민회의에 대한 민심 이반과 함께 내년 총선의 투표 행태를 암시하는 광주 시민의 경고가 담겨 있다는 평가다.  

  신당 창당을 서두르고 있는 국민회의가 현정권의 가장 강력한 지지 기반인 호남 사람들의 경고를 얼마나 민감하게 받아들일지 모르지만, 어쨌든 '호남 물갈이' 는 지금 대세가 되어가고 있다.
광주· 羅權一 주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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