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이 기관총 난사 계획된 것임을 밝혀라”
  • 워싱턴. 변창섭 편집위원 ()
  • 승인 1999.11.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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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들, 미국 국방부 관리에게 요구... 보고서 나와야 보상책 결정될 듯

한국전이 끝난 지 46년, 그리고 지난 9월 30일 AP 통신의 첫 보도가 나간 지 40일 만에 이른바 ‘노근리 미군 학살 사건’의 피해 당사자들이 미국을 찾아, 이 사건에 대한 미국 여론을 다시금 환기했다. 미국 기독교교회협의회 초청으로 미국에 온 이들은 11월 10일 오하이오 주 클리블랜드에 이어, 12일에는 수도 워싱턴을 찾아 이번 사건을 관심 있게 보도해 온 국내외 기자들에게 ‘노근리 만행’의 진실을 눈물로 호소했다.

처음 AP 통신의 상세한 보도를 1면에 실었던 <뉴욕 타임스>와 <워싱턴 포스트>는 11월 11일자에서도 미국을 찾은 노근리 피해자 5명의 동정을 주요 기사로 상세히 소개했다. 노근리 피해자들은 12일 오후에는 워싱턴을 찾아 내셔널 프레스 센터 기자회견장에서 49년 전의 미군 만행을 생생히 증언했다.

연단에 선 금초자씨(61)는 기자들에게 직접 아랫배의 총상 흔적을 보이며 눈시울을 붉혔고, 양해숙씨(61)는 “미군이 철길 위에 피난민을 몰아세운 뒤 전투기로 폭격하는 바람에 왼쪽 눈을 잃었다. 지난 50년 동안 한을 지니고 살며 미군을 보면 외면했다”라고 고개를 떨구었다.

또 일곱 살 때 부모형제를 따라 피난길에 나섰다가 총상을 입었다는 정구학씨(56)는 총탄에 얼굴이 뭉개진 당시 상황을 설명하기도 했다.

이들은 이 날 1시간 30분에 걸친 기자회견에 앞서 미국 국방부를 방문해, 노근리 사건에 대한 진상 규명과 보상을 촉구했다.

정씨를 비롯한 피해자 5명은 국방부 찰스 크레이긴 인사 및 전투 태세 담당 차관, 육군부 패트릭 헨리 인력 및 예비군 담당 차관보, 마이클 애커먼 육군 감창관 등 고위 인사를 1시간 동안 면담했다. 이 자리에 참석한 인사들에 따르면, 크레이긴 차관은 “한국전쟁 때 밠ㅇ한 한 · 미 두 나라 민간인 희생자에 대한 의무 차원에서도 미국 정부는 노근리 사건에 대한 지상을 신속하게 규명하도록 노력하겠다”라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대해 정은용(76) 노근리 사건 대책위원장은 미국 관리들에게 철로 위의 피난민을 향해 기관총을 쏜 것은 계획된 사건이라고 주장하고, 따라서 그런 쪽으로 진상 규명이 되어야 한다는 뜻을 강하게 전달했다.

연방 의회는 여전히 침묵
크레이긴 차관보의 말대로 현재 미국 정부는 클린턴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철저하고도 신속한 조사’에 들어간 상태다. 이와 관련해 11월 2일 윌리엄 코언 국방장관은 로버트 리스카시 전 주한미군 사령관과, 외부 전문가 6명을 민간 자문위원으로 임명했다.

이 민간자문위원단은 루이스 칼데라 육군 감찰관이 이끄는 실무조사단과, 루디 딜리언 국방부 인사 담당 차관이 이끄는 조정 그룹과 호흡을 맞추며 노근리 사건에 대한 조언 임무를 맡게 된다.

케네스 베이컨 국방부 대변인은 이와 관련해 “이번 민간 자문위원단은 노근리 사건에 대한 ‘감독과 조언’ 업무를 맡게 되는데, 자문위원들이 한국에도 가게 될 것으로 생각한다”라고 밝혔다. 그에 따르면, 이미 애커먼 감찰관이 이끄는 실무 조사단이 지난 10월 29일 노근리 현장을 방문한 뒤 귀국했다. 그리고 딜리언 차관이 주도하는 조정 그룹은 다른 정부기관과의 업무를 조정해, 노근리 사건과 관련한 미국 정부의 ‘모든 자원’을 이용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적어도 미국 정부는 공개적으로는 노근리 사건에 대해 신속한 진상 규명에 힘쓰는 모습이다. 그러나 진상 규명 뒤 어떻게 처리하겠다는 부분에 관해서는 아직까지 별다른 언급이 없다. 다만, 진상 조사가 완료되면 이에 관한 보고서를 칼데라 육군 장관이 코언 장관에게 제출하고, 그에 따라 미국 정부 차원의 사죄 표시 수준과 보상책이 거론될 전망이다. 특히 관심거리가 되고 있는 노근리 사건 가해자(생존자)에 대한 ‘면책 특권’ 여부에 대해서도 미국 정부는 아직 언급을 피하고 있다.

한 가지 주목할 사실은 68년 3월 베트남전 당시 미군의 끔찍한 학살 사건과 관련해 대대적인 진상 조사를 요구했던 연방 의회가 노근리 사건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키고 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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