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독 흡수 통일’은 콜 총리의 선거 전략 산물
  • 프랑크푸르트 허광 통신원 ()
  • 승인 1999.11.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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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선 승리 위해 밀어붙여... 경제 지원 거부 · 대량 탈출 방조 ‘의혹’

50년 남게 분단되었던 독일이 통일된 날은 90년 10월 3일이다. ‘독일 민주공화국’(동독)은 그날부터 ‘독일 연방’(서독)의 주권 지역으로 흡수됨으로써 역사의 유물로 남았다. 동서독 정부는 그 날 유엔 사무총장에게 ‘오늘부터 독일이라는 단 하나의 주권 국가만이 유엔 회원국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통고하고 통일을 국제적으로 확인하는 절차를 끝냈다.

동서독이 통일이라는 격류에 휩쓸린 것은 이로부터 1년 전인 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날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날부터 서독 정부는 무서운 속돌 동독 흡수 전략을 밀어붙였고, 여기에 동독 시민은 순식간에 빨려 들어갔다. 동독의 사회주의 체제를 개혁해 서독과 공존할 새로운 주권 국가를 세운다는 시민 혁명 주역들의 꿈은 펼쳐 볼 기회도 없이 사라졌다.

통일 10주년에 남는 두 가지 의문
서독 정부가 밀어붙인 ‘속전속결’ 통일 전략은 어떻게 해서 1년 만에 성공했을까. 또 이렇게 ‘성공한’ 통일 전략이 남긴 것은 무엇인가. 이것은 통일 10년이 되는 오늘까지 남아 있는 의문이다.

서독 정부의 동독 흡수 통합 전략은 무엇보다 단기적인 정치적 계산에서 비롯되었다. 89년 가을 콜 정부의 현안은 90년 봄 총선 대비책이었다. 여론 지지도에서 제1 야당인 사민당이 콜 연정을 앞서기 시작하고 또 사민당이 동서독 통일에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이고 있을 때 콜 정부는 ‘동독 흡수 통일’이라는 구호를 내세워 한판 승부를 시도한 것이다(이 점에서 당시 니더작센 주 수반이었던 현 총리 슈뢰더가 90년의 동서독 통일조약에 조인을 거부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콜 정부는 이 같은 선거 전략을 기반으로 하여 동서독 주민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기 위해 두 가지 전술을 구사했다.

그 하나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동독의 권력이 교체된 후에도 동독이 요구하는 경제 지원을 거부한 것이다. 이것은 서독 정부가 80년대 중반부터 인권 상황 개선과 결부해 동독과 경제 원조 협상을 하고 있었다는 선례에 비추어 보면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다. 콜 정부는 동독 시민에게 점진적인 동독 체제 개혁이 아니라 서독식 사회 모델, 더 나아가 흡수 통합이 아니고서는 서독과 같은 생활수준을 누릴 수 없다는 신호를 보낸 것이다. 동독 개혁을 추진하려는 시민 혁명 주역을 완전히 고립시킨다는 효과도 노렸을 것이다. 독일 중앙 은행 총재의 반발까지 무시하고 동독 통화 개혁을 서두른 것도 이 같은 선거 전술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다.

콜 정부가 구사한 또 한 가지 전술은 89년 여름부터 드러났다. 당시 헝가리 등 동유럽 국가들의 서독 대사관을 통해서 서독으로 탈출하려는 동독 주민이 줄을 이었다. 콜 정부는 이 문제를 서독 쪽이 개입할 수 없는, 다시 말해 동서독 통일이 아니고는 해결할 수 없다는 태도로 일관했다.

그런데 당시 동독 주민의 ‘탈주’ 대열에는 몇 가지 의문이 있다. 첫째 ‘서독 정부 개입설’이다. 헝가리 정부가 동유럽에서 처음으로 국경을 개방하고 동독 주민의 대량 탈주를 방조한 배경에 서독 정부가 개입한 의혹이 있다는 것이다(실제로 지금까지 드러난, 서독 정부의 개입설을 입증하는 첫 사례는 89년 8월 24일 콜 총리와 겐셔 외무장관, 헝가리 정부 측이 당시 서독 수도 본에서 가진 3자 비밀 회담이다. 이 회담에서 헝가리 정부는 5억 마르크 차관을 받는 조건으로 동독과 맞닿은 국경을 개방하는 데 동의했다).

또 동독 주민 탈주 문제에 세계 여론이 주목하기 시작한 9월 초, 서독 정부는 관련 정보 공개를 중단했는데 이것도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이 같은 의혹을 제기한 쪽은 콜의 정치 노선을 대변하고 있던 보수 일간지 <FAZ>였다, 서독의 정치 엘리트 집단 내부에서도 콜 정부의 통일 전략에 반발이 있었음을 말해준다. 동독 주민의 탈주극이 벌어진 배경과 전모는 여전히 가려 있다. 그러나 콜 정부가 이 사태를 활용해 동독뿐만 아니라 서독 주민에게도 흡수 통일의 필요성을 설득할 수 있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그런데 콜의 전략에는 또 하나 고비가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연합국 4개국과의 ‘외교전’이다. 콜 정부가 독일 통일 문제를 놓고 연합국과 협상할 수밖에 없었던 근거는 ‘독일 조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독일 조약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서독을 점령하고 있던 서방측 연합국이 서독과 54년에 맺은 조약이다. 서독은 이 조약을 통해서 주권을 회복하는 대신 연합국에 두 가지 권리, 즉 독일이 통일될 때 그리고 통일된 독일이 맺어야 하는 ‘평화조약’ 무제에 개입할 권리를 인정했다. 다시 말해 서독은 연합국의 동의 없이는 통일 문제와 평화조약을 독자적으로 결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주권 국가인 된 서독이 왜 이 같은 권리를 연합국에 넘겨주었을까?

54년 미국은 서독의 재무장을 서두르고 있었다. 서독을 나토에 편입시켜 동유럽 진영에 대항하는 하부 동맹국으로 키운다는 것이다. 이 같은 전략에 따라 서독을 패전국 지위에서 벗어나게 할 필요가 있었다. 일반적으로 전쟁 당사국들은 평화 조약을 맺어 정상적인 외교 관계에 들어선다. 그런데 독일은 연합국과 평화조약을 맺기 전에 동서독으로 분단되었다. 연합국과 평화조약을 맺을 단일 주체가 사라진 것이다. 물론 동서독이 분단된 상태에서 각각 연합국과 평화조약을 맺을 수도 있겠지만, 통일을 국시로 내걸고 있는 서독은 동독을 국가로 인정하게 되는 이 같은 형식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런데 서독으로서는 평화조약을 통일 이후로 미루면 또 한 가지 이득이 있었다. 평화조약이 지연되는 한 당연히 이 조약에서 다루게 되는 전쟁 배상 문제도 회피할 수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서독 정부는 전후 배상을 요구받을 때마다 ‘통일이 되고 평화조약 협상이 시작 될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다는 입장을 내세웠다. ‘독일 조약’에서 평화조약이 독일 통일 후의 과제로 미루어진 배경에는 이 같은 사정이 담겨 있다.

콜 정부, 연합국 개입 막기 위해 치밀한 외교전
그런데 문제는 서독을 재무장한다는 미국의 계획에 프랑스와 영국이 반발한 것이다. 두 나라는 서독이 미국의 지원을 받아 재무장하면 또다시 유럽의 패권을 노리게 될 것을 우려했다. 그러자 미국은 타협안을 만들었다. 서독을 나토에 가입시켜 무장시키되 서독의 군비는 유럽 연합국이 통제한다는 것이다. 현재 유럽연합의 군사 기구로 떠오르고 있는 ‘서유럽동맹’(WEU)은 원래 이 타협안에 따라 출범한, 서독의 군비를 통제하는 기구였다. 서유럽동맹이 재무장하는 ‘현재’의 서독을 감시하는 기구였다면 독일 조약은 ‘미래’의 통일된 독일을 통제하는 또 하나의 안전 장치였다. 연합국은 이 조약을 통해서 독일과의 평화조약이 현안으로 떠오르는 시점, 즉 독일이 통일되는 시점부터 독일을 통제할 권리를 확보한 것이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후 사태의 심각성을 감지한 연합국측은 콜의 통일 전략에 서둘러 개입했다. 콜 정부가 이들과 벌인 외교전의 실체는 무엇일까?

그 기본 구도는 독일 조약에 규정된 연합국의 권리를 더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통일의 형식과 내용을 둘러싸고 동서독과 연합국이 1년 가까이 협상(2+4 협상)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면 이 같은 판단은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후 콜 정부가 처음으로 밝힌 통일 방안인 동독 흡수 방안은 어느 연합국과도 협의를 거치지 않았다. 콜 정부는 ‘통일의 기본 골격은 우리가 결정하며, 연합국은 이를 통고받으면 그만’이라는 의도를 공개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이 같은 의도는 연합국과의 협상을 ‘2+4’라고 표현한 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독일 조약에 따른다면 연합국과의 통일 문제 협상은 평화조약 체결을 통해서 마무리되어야 했고 따라서 ‘평화조약 협상’으로 불러야 마땅했다. 실제로 프랑스와 러시아가 협상 초기에 이 같은 의견을 내놓았으나 콜 정부는 거부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45년이 지난 마당에 평화조약은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 콜 정부가 겉으로 내세운 이유지만 실제 이유는 다른 데 있다. 이 협상을 평화조약 협상으로 했다면 당연히 그동안 미루어 온 전후 배상 문제가 거론되고 독일이 2차 세계대전 당시 점령했던 수십 개 나라가 협상 참여를 요구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흡수 통합 일정은 뒷전으로 물러나고 ‘2+4 협상’은 서독의 전쟁 범죄를 추궁하는 국제무대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독일이 패전 45년 만에 완전한 주권국으로 변신하는 마당에 이 같은 사태를 막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연합국들, 눈치 보다가 콜 전략에 손 들어
‘2+4 협상’ 진행 중에 동서독 통합의 골격이 되는 통일 조약이 완성되었다는 사실은 이 협상이 콜 정부의 국내 일정에 구색을 맞춘, 일종의 형식적인 행사였음을 말해준다. 더욱이 90년 10월 3일, 동서독이 통일을 이룬 이 날에 ‘2+4 조약’은 연합국 각국 의회의 조인 절차를 기다라고 있었다. 다시 말해 동서독 통일에 연합국의 최종 판단은 불필요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연합국들은 콜 정부의 독주에 왜 그토록 무력했던 것일까?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4일 후에 부시의 자문에 응한 키신저는 이렇게 말했다. “독일 통일은 막을 수 없다. 만약 우리가 통일을 방해하고 있다고 그들(독일)이 감지한다면 우리는 그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여기서 키신저가 지적한 ‘대가’란 독일이 소련과 손잡고 나토에서 탈퇴해 통일을 추진하는 사태인데, 그렇게 되면 미국은 유럽에서 설 자리를 잃게 된다는 경고였다. 그 후 2주일이 지나 콜 정부의 동독 흡수 통일안이 나오자 미국 국무부는 ‘독일 경계론’ ‘연합국 단결론’을 강조했다. 2+4 협상의 기초가 된 조항은 바로 국무부 방안으로, 독일이 ‘점진적’으로 또 ‘연합국의 권리’를 존중하면서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는 내용이다. 그런 미국은 소련이 콜 정부 방안을 받아들이고 독일과 밀착하려는 기세가 보이자 다시 키신저 노선으로 돌아섰다.

콜 정부의 통일 노선에 맹렬하게 반발한 나라는 영국이다. 대처 영국 총리는 독일이 유럽의 세력 균형을 깨뜨리고 이제 고르바초프가 막 시작한 동유럽 개혁을 망치게 된다고 경고하고 미테랑에게 미국 · 독일에 대항하는 영 · 불 동맹을 맺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후 잇단 비밀 회담에서 대처는 미테랑의 지원을 얻는 데 실패했다. 고르바초프가 콜 정부의 노선으로 돌아선 90년 2월 이후에는 영국 또한 2+4 협상에 참여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프랑스 역시 미국의 콜 정부지지 노선을 잔뜩 경계했지만 독일 통일에 제동을 걸지는 못했다. 독일의 협조 없이는 유럽 통합이 불가능하다는 판단에서다. 프랑스가 영 · 불 동맹 제안에 응하지 못한 것도 유럽 통합의 핵심인 독 · 불 관계에 쉽게 손댈 수 없었기 때문이다. 대신 프랑스는 유럽 통합을 더욱 확고하게 밀고 나가 통일된 독일을 통제할 틀을 만든다는 희망에 매달렸다. 반면 고르바초프는 동독을 포기하고도 소련이 유지될 수 있다고 착각했다. 소련 내부 붕괴라는 위기에 빠진 그는 처음부터 콜 정부의 통일 정책을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렇게 보면 콜 정부는 미국에는 소련과 나토, 프랑스에는 유럽연합이라는 카드를 사용해서 연합국의 반(反) 독일 전선을 초반부터 무너뜨린 셈이다. 실제로 콜 정부는 2+4 협상에서 통일된 독일이 나토와 유럽연합에서 이탈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과연 이 두 기구는 독일을 통제하는 틀이 되고 있는가? 통일 이후 독일이 추진 해 온 외교는 나토와 유럽연합을 동유럽으로 확대해 미국과 프랑스의 통제를 누그러뜨리고 독일의 행동 반경을 넓히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독일 전 외무장관 겐셔의 참모진은 ‘2+4 협상만큼 독일이 주변국의 이해와 조화를 맞춘 사례는 찾기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 사실은 그 반대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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