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항쟁 씨뿌린 윤한봉
  • 정희상 기자 ()
  • 승인 2006.05.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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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주 항쟁 13주기를 맞아 그동안‘전설적 인물’로 남아 있던 관련자(윤한봉ㆍ47)가 오랜 국외 망명 생활에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그는 80년 광주 항쟁 주모자로 지목돼 당국으로부터 쫓기는 몸이 되어 81년 미국으로 망명했는데, 김영삼 대통령은 지난 5월13일 발표한 광주문제 해결 담화 속에 윤한봉씨에 대한 수배 해제와 귀국 허용 조처를 포함시켰다.

 사실 일반 국민에게는 광주 항쟁 관련 인물로서의 윤한봉이라는 이름이 그다지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다.  항쟁 이후 정권을 잡은 진압 세력은 ‘정치 망명 1호’로 기록된 윤한봉씨가 국내에서 공개적으로 거론되는 것을 막아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윤한봉씨는 항쟁직후 신군부측에 의해 당시로서는 파격적 액수였던 현상금 5천만원이 걸린 광주 5ㆍ18의 ‘수괴’로 지목돼 왔고, 반면 이 지역 재야운동 세력에게는 ‘살아 있는 5월 정신’의 소유자로 일컬어졌다.  윤씨에 대한 이같은 양극단적 평가는 5ㆍ18광주 항쟁 당시 그가 차지했던 비중에서 나왔다.

 80년 5ㆍ18당시 광주ㆍ전남학생 운동권의 대부로 불린 윤한봉씨. 그는 47년 전남 강진군 칠량면의 한 유복한 농가에서 4남2녀중 3남으로 태어났다.  전남대 농대 3학년 때까지 그는 매년 전과목 A학점이 기재된 성적표가 말해주듯이 매우 학구적이었다.

 그러나 72년 박대통령이 선포한 유신헌법은 그의 인생에 중대한 갈림길이 된다.  암울했던 시대 상황을 타개해 보겠다고 민주화운동에 뛰어든 것이다.  학생 운동에 대한 그의 집요한 정열은 당시 전국적으로 이름을 얻게 만들었고, 74년 결성한 민청학련에서 그는 전남ㆍ전북 책임자를 맡았다.  그해 수사당국에 체포돼 1심에서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은 윤씨는 이듬해 2월15일 형집행정지로 풀려나게 되었지만 석방을 9일 앞두고 충격적인 일을 당한다.  윤씨가 구속된 후 한을 삭이지 못한 부친이 화병을 얻어 앓다가 2월6일 운명한 것이다.

 유신체제가 기승을 부릴수록 윤씨의 민주화 운동도 집요했고, 이로 인해 그는 77년과 79년 긴급조치 위반으로 두차례나 더 감옥을 드나들게 된다.  79년 10ㆍ26으로 유신체제가 붕괴하고 난 뒤 석방된 윤씨는 현대사회문제연구소를 설립하는가 하면 전국청년운동 조직이던 민주 청년협의회 전남 책임자를 맡아 신군부의 민주역행 음모에 대항할 준비를 해나갔다.

 윤한봉씨와 광주에서 함께 활동했던 후배 정용화씨(41ㆍ<광주매일> 정치부 차장)는 당시 윤씨가 광주ㆍ전남 민주화운동 진영에서 차지했던 위상을 이렇게 설명한다.

 “80년 봄에 그는 재야 어르신들과 청년운동ㆍ학생운동 진영의 견해 차이를 조정하고 통합해내는 데 탁월한 능력을 보였다.  결벽증이라고 느껴질 만큼 철저한 원칙주의자이면서도 바쁜 가운데 세 진영 관계자들의 애경사까지 다 기억해 쫓아다닐 정도로 풍부한 인간성을 가진 인물이라 자연히 개인적 후원세력도 방대했다.  운동 진영 내에서 담판의 명수로 단합의 연결고리 역을 도맡았기 때문에 지금도 광주에서는 80년 5ㆍ18항쟁 정신의 씨를 뿌린 인물로 평가하고 있다.”

 윤씨에게 덫이 쳐진 때는 80년 5월17일이 었다.  이 날 신군부 세력은 비상계엄 확대 조처와 함께 전국적으로 야당ㆍ재야 인사 검거에 착수했고, 이때 광주ㆍ전남 지역 검거 대상 1호로 윤한봉씨가 올랐던 것이다.

 그러나 윤씨는 그 날 밤 정국 급변 낌새를 알아채고 귀가를 포기한 채 문병란 조선대교수 집으로 피신했다.  문교수 역시 민주화운동 경력으로 인해 당국의 지목 대상자였기 때문에 윤씨는 이튿날 새벽 그곳을 빠져나와 서울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기차가 서대전역을 빠져나갈 무력 어떻게 정보를 입수했는지 경찰들이 윤한봉씨를 검거하기 위해 차내 수색 작업을 벌였다.  이를 알아챈 윤씨는 달리는 열차에서 뛰어내려 마침 도착해 있던 서울발 광주행 열차에 숨었다.

 

신군부, ‘내란음모 수괴’로 윤한봉 지목

 이때는 이미 광주에 투입된 공수부대의 잔학한 행위로 온 시내가 벌집을 쑤신듯 들끓던 때였다.  윤한봉씨는 항쟁의 도화선에 불이 붙은 5월19일부터 21일까지 시민들 틈에 섞여 치열한 저항 활동을 벌여나갔다.  그러나 이미 검거 대상 1호로 노출된 신분이었기 때문에 시내에서의 활동이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신군부가 광주 항쟁을 내란음모 사건으로 규정하면서 그 수괴로 윤한봉씨를 지목해 이미 조직도표까지 그려두었다는 정보도 들어왔다.  5월21일 윤씨는 당시 항쟁에 참가한 선후배들과 상의해 광주 외곽으로 빠져나가기로 했다.  1백여리 길을 걸어 강진군 작천면까지 빠져나온 윤씨는 이곳에서 며칠을 은신해 지내다가 항쟁이 진압되고 난 26일 순천을 거쳐 화물차 편으로 서울로 피신했다.

 광주 항쟁 진압 직후 신군부는 5ㆍ18관련자들을 조직도표로 그려 수사에 착수했다.  이른바‘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으로서 김대중씨의 지시를 받은 현장 총책으로 윤한봉씨를 얽어놓았던 것이다.  그러나 윤씨가 검거되지 않은 상황에서 시나리오는 바뀌어야만 했다.  윤한봉씨의 친형으로 당시 광주 대동고교 교사였던 윤광장씨(50ㆍ전교조 관련 해직교사)는 신군부에 끌려가 조사받았던 내용을 이렇게 전한다.

 “신군부는 동생을 광주 항쟁 수괴로 적어놓은 사건 도표를 보여주며 고문을 하더니 내가 동생 거취를 모른다고 하자 그 다음에는 홍남순 변호사로 바꿔 넣었다.  그러나 홍변호사를 쉬괴로 집어넣으면 세상 사람들이 비웃을 것 같아서였는지 그 다음날 당시 전남대 복학생 정동년씨를 최종 수괴로 만들었다.”

 한편 광주 항쟁 직후 서울로 피신한 윤한봉씨는 지루한 도피 생활에 들어갔다.  신군부는 윤씨에게 현상금 5천만원을 걸고 주변 사람들을 상시 감시했다.  당시 윤한봉씨는 당국의 검거망을 피해 소설가 윤정모씨 집 등 새롭게 인간관계를 맺은 인사들 집으로 11차례나 거처를 옮기며 지냈다.  바깥세상과의 연락은 한국신학대 학생이던 김은경씨(38·목사)가 맡았다. 

 그러나 81년 들어서면서 집권 초기인 5공화국 정권이 광주 5·18 문제를 다시 정치적으로 악용하려 한다는 소문이 꼬리를 물었다.  이미 김대중씨와 정동년씨를 수피로 정하고 책임을 물었지만 국민 내부에 불신이 퍼져나가자 수배중인 광주 청년학생운동의 대부 윤한봉씨를 체포해 종교계 및 제야 인사를 포함한 새로운 내란음모 각본을 구상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같은 긴박한 상황 속에서 윤씨는 광주 민주화 운동권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자결과 해외 망명이라는 두가지 대안을 놓고 고민하게 된다.  최후의 선택은 해외 망명으로 결정되었다.  5·18 관련 수배자들의 밀항을 차단하기 위해 전국의 공항과 항만을 특별 관리하던 당시 상황에서 윤한봉씨의 밀항을 극적으로 성사시킨 사람은 윤씨의 후배이자 광주지역 청년 운동가 정용화씨이다. 정씨는 81년 4월29일 마산항에서 윤한봉씨를 삼미해운 소속 ‘레퍼드호’에 무사히 태우기까지의 과정을 이렇게 설명한다. 

 “81년 설날 윤선배가 비밀리에 나를 불러 서울에서 만났다.  이때 나는 ‘형님, 지금 잡히면 수십명이 다시 연행되고 수사가 재개됩니다.  국외로 나가는 방법밖에 없습니다”라고 건의했다.  윤선배는 자기도 그 방법밖에 없다고 본다면서 그동안 비밀리에 만난 경향 각지의 운동권 지도자들도 망명을 권하더라고 했다.  나는 이때부터 밀항 타진 작업을 도맡았다.  해운업계에 수소문해보니 일본 밀항에는 5백만원이 필요하지만 매우 위험하다고 했다.  그러던 중 4월26일 레퍼드호가 입항 날짜를 기다린다는 정보를 얻었다.  마침 그 배에는 윤선배와 함께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됐던 당시 거창YMCA 총무 정찬용씨의 친동생 정찬대씨가 향해사로 근무하고 있었다.  4월 28일 마산으로 달려가 정찬대씨와 최동현씨를 술집에서 만났다.  최동현씨는 윤선배의 동지였던 한 청년 운동가와 동향인으로 윤선배를 돕고 싶다고 해서 같이 만난 것이다.“

 정용화씨는 두 선원을 만나 4월29일 마산항을 출발하는 배에 윤한봉씨를 태우기로 합의를 본 후 그 날 서울로 올라가 윤한봉씨에게 밀항 준비를 서두르게 했다.  윤씨의 외부 연락책 김은경씨를 먼저 마산으로 내려 보낸 정씨는 곧장 광주로 향했다.  밀항 도중 윤한봉씨가 다른 선원들에게 발각될 경우 입막음조로 건네줄 돈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정용화씨는 광주 재야 인사들을 수소문해 삽시간에 3백여만원을 모은 뒤 곧바로 마산에서 윤씨 일행과 합류했다.  마산에서 이들은 윤한봉씨의 밀항이 성공하기까지 안부를 확일 할 암호(봉선화·철쭉꽃)를 정한 뒤 29일 밤 11시30분에 윤시를 무사히 배에 태우는데 성공했다.

 35일 간의 긴 항해에 오른 배는 윤씨를 태우고 호주 시드니항을 거쳐 미국 시애틀로 향했다.  윤씨는 이 기간 선박내 의무실에 딸린 변소에서 물을 걸어 잠근 채 라면8개와 꿀 한 병으로 연명했다.

 

“5월 정신은 통일로 이어져야 승화된다”

 81년 6월3일 윤씨를 태운 배는 마침내 미국에 도착했고, 그는 바로 시애틀에 있는 교포사회 민주화 운동가 김동건씨 집으로 향했다.  김씨가 윤한봉씨를 보호하게 된 데는, 광주에서 윤한봉씨를 세례 집전한 강신석 목사(광주 무전교회)와 조아라 장로의 사전 협조 요청이 있었기 때문이다. 

 밀항 사실이 오송희 사건을 수사하던 당국에 적발된 이후 5공과 6공 정부는 그의 입국을 원천 봉쇄했다.  그가 귀국할 경우 진상 규명 차원에서 5·18 광주 항쟁이 또 다시 국내 정치에 소용돌이를 일으킬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윤씨는 미국에서 정치 망명자의 신분을 얻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고, 미국내 법조계·인권운동 단체·의원들도 그의 망명을 적극 도왔다.  그러나 레이건 정부가 전두환 정부와의 외교 관계를 고려해 계속 심사를 보류했기 때문에 윤씨는 밀항 후 6년이 지난 87년에야 공식적으로 망명을 허용 받았다.  한국인으로서 ‘정치 망명 1호’가 된 셈이었다.

 오송희 사건으로 국내에 그의 밀항 사실이 알려진 뒤 윤한봉씨는 비로소 본명으로 재미교포 사회의 민주화 운동에 뛰어들었다.  밀항 초기에 윤씨는 재미교포 사회에서 ‘수상한 사람’ 취급을 받아 무척 어려웠다고 한다.  교포사회의 토착 민주화 운동 세력은 윤씨를 ‘전두환이 보낸 첩자’라고 오해했고, 주미 한국 공관 주변의 정보기관에서는 ‘북한 간첩’이라는 소문을 흘리고 다녔다.

 그러나 윤씨는 특유의 활동 방식과 정열을 통해 교포사회에 헌신함으로써 이 같은 오해를 풀고 멀지않아 활동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  82년 로스앤젤레스에 민족 학교를 설립한 그는 국내의 민주화와 조국 통일, 제3세계 피압박 민족의 연대를 강조하며 급속히 세를 확장해 나갔다.  그는 교포들을 찾아다니며 활동 자금을 모으면 그 액수가 아무리 적더라도 “선생님이 주신 돈은 이런 활동에 썼습니다”라고 결산 보고서를 보낼 만큼 꼼꼼하고 성실한 활동 방식을 보여 신임을 얻어갔다.

 그의 민족주의적 성향과 활동 방식은 결벽증에 가까웠다.  거주하는 집 앞에 텃밭을 일궈 배추를 가꾸는가 하면 침대는 서양식 문화라 해 온돌을 고집했고, 영어를 쓰는 것도 거부했다.  그 때문에 그를 만나자고 하는 미국인은 지금도 통역관을 데려와야 한다.  공식적인 망명자 신분으로 시민권 획득이 허용되었지만 그는 대한민국 국적을 포기하지 않고 지금까지 살아왔다. 

 그의 이 같은 활동 방식은 미국내 교포 청년들에게 큰 반향을 불러일으켜 민족 학교의 이념에 동조하는 청년 조직이 급속히 확산되었다.  이에 따라 윤씨는 83년 13개 지역·청년 조직을 한데 엮어 ‘재미한인청년연합’(이하 한청련)을 결성했다.  그는 조국의 민주화 운동과 평화 운동 그리고 통일 운동이라는 세가지 목표를 설정하고 한청련을 결성했다.  해마다 5월이 되면 그가 세운 민족 학교 교실에 5월 영령들의 위패를 모시고 통곡하던 윤한봉씨는 “5월 정신은 분단된 조국의 통일로 이어져야 승화될 수 있다”는 신념으로 특히 통일 운동에 적극적인 관심을 기울였다.

 한국 분단과 광주 유혈 진압에 미국도 책임을 져야 한다며 백악관과 유엔본부 앞에서 끊임없이 시위를 벌여나간 그의 활동은 미국 정부에도 ‘골치 아픈 존재’가 되기에 충분했다. 

 윤씨는 6공화국 들이 안전 귀국 희망을 표시했으나 정부는 그의 미국내 활동을 문제 삼아 귀국 불허 조처를 고수해왔다.  특히 노태우 정부는 89년 이른바 ‘공안 정국’당시 한청련에 반한·친북 단체라는 혐의를 두고 윤한봉씨가 북한을 방문했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그러나 윤씨는 이에 대해 “미국 정부로부터 87년에야 여행증명서를 발급받았는데 거기에는 쿠바 북한 베트남은 갈 수 없다고 기재돼 있다.  만일 내가 북한을 방문하면 그 즉시 망명이 취소되고 추방당한다”며 당국의 발표가 날조된 것이라고 맞섰다.  윤씨는 한청련 친북 단체라는 시각에 대해서도 “89년 평양에서 열린 세계청년학생축전 때도 한청련이 초청을 받았으나 남북 양쪽 정부에 대해 주체적으로 활동하기 위해 축전 참가를 거부했을 정도이다”라고 말했다.  어쨌든 망명 이후 정부가 윤한봉씨에게 씌운 여러 굴레는 그가 귀국해 진상을 밝히면 시비가 가려질 것으로 보인다.

 

귀국 뒤 맡아야 할 두가지 역할

 윤씨의 안전 귀국 문제가 본격적으로 거론된 것은 지난 88년 11월 강신석 목사를 위원장으로 한 귀국대책위가  결성되고부터였다.  대책위는 윤씨의 안전한 귀국 없이는 5·18의 마무리가 미흡할 수밖에 없으리라는 인식 아래 강목사, 김승훈 신부, 문병란 시인, 이부영 민주당 최고위원, 김근태·정동년 씨 들이 주측이 돼 활발한 활동을 벌여왔다.  지난해에는 ‘윤한봉 선생의 자유로운 귀국을 위한 10만인 서명 운동’을 벌여 이부영 민주당 최고위원 의 의원 16명의 소개로 국회에 청원서를 제출하기도 했다.

 결국 새 정부는 지난 5월13일 논란이 되고있는 윤한봉씨 귀국 문제 매듭을 풀어냄으로써 광주의 상처를 치유하는 데 한발짝 다가간 셈이다. 

 윤씨는 귀국에 필요한 수속 및 재미 활동을 정리하는 데 두달을 보낸 후 바로 귀국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광주 현지의 5월 관련 단체 인사들은 윤한봉씨의 귀국에 대해 두가지 점에서 관심을 보인다.  우선 5·18 항쟁의 의미를 적극적으로 재조명하는 데 윤한봉씨의 증언과 역할이 큰 비중을 차지하리라는 기대가 그 하나이다.  이는 70년대 민청학련 출신들과 80년대 민중운동 세대가 결합했던 항쟁 지도부의 당시 통일된 지도력이 윤한봉씨를 빼놓고는 설명될 수 없다는 판단에서 나온다.

 또 한가지는 윤씨에게 지금까지 씌워진 ‘신화적 존재’라는 틀을 귀국과 함께 벗겨냄으로써 현재 표류하는 국내 재야 운동 진영의 통합과 방향 모색에 그가 어떤 구실을 해야 하지 않겠느냐 하는 기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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