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법 복제 고발에 “매국노 같은 짓”
  • 문정우 기자 ()
  • 승인 2006.05.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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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오락기 수입업자들, 일본 기업 대신해 고발 세운상가 상인들 “시장 통째로 넘어가 10만 생계 위험”


 전자오락기 판매의 메카로 명성을 떨쳐온 세운상가(서울 종로구)에 찬바람이 분다.  한달에도 서너번씩 경찰 단속반이 들이닥쳐 업주들을 저작권법위반 혐의로 잡아가기 때문이다.  경찰이 단속 나온 날이면 업주들은 아예 장사할 생각을 못하고 문을 닫고 집으로 들어가거나 인근 술집에서 소주잔을 기울인다.

 업주들이 삼삼오오 모여 술을 마실 때면 으레 ‘매국노’들에 대한 분노가 터져나온다.  업주들이 매국노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다름아닌 전자오락기 수입상들이다.  그들이 바로 업주들을 궁지로 모는 장본인들이기도 하다.

 세운상가에 전자오락기 상점이 들어서기 시작한 것은 70년대 중반부터였다.  당시 이본에서 스페이스 인베이더란 전자오락기가 수입돼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그러자 서울 종로를 중심으로 전자오락실이 하나 둘 늘어났고 자연스럽게 오락기를 취급하는 상점들이 이 세운상가에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현재는 전국에 오락실이 2만여개에 달하며 세운상가에서 오락기를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점포도 3백여개를 헤아린다.

 그동안 세운상가의 오락기 전문점들은 주로 일본이 새 오락 프로그램을 들여와 그것을 복제해 오락실에 공급해 왔다.  얼마 전까지 당국의 제재가 느슨했기 때문에 그들은 별다른 어려움 없이 장사를 계속할 수 있었다.  그러다 최근 일본에서 오락 프로그램을 들여와 오락실을 상대로 직접 판매하는 수입상들이 늘어나면서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수입상들이 일본 오락기 판매 회사에 불법복제 사실을 제보해 일본 회사들이 세운상가의 업주들을 저작권법 위반 협의로 고발한 것이다.  저작권법 위반은 피해자가 직접 고발해야만 처벌이 가능한 친고죄이다.  피해자와 가해자의 국적이 다른 경우에는 피해자가 가해자 국자의 관련자나 변호사를 대리인으로 세워 고발할 수 있는데, 현재 일본회사의 대리인은 대부분 전자오락기 수입상들이다.

 “그들은 민족적인 자존심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가 있으면 우리와 해결하려고 해야지 어떻게 일본 회사들에게 밀고합니까.  그래서 득   게 뭐가 있습니까.  자기들은 돈을 좀 벌지 모르지만 우리나라 오락기 시장은 통째로 일본 기업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될 게 아닙니까.  어떻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

 세운상가에서 10년째 오락기 판매업을 하는 ㄱ씨(35)의 말이다. 그는 몇몇 수입업자들이 눈앞의 이익만 생각해 일본 기업쪽에 붙어버리는 바람에 전자오락기로 연명하는 10만명이 모두 괴로움을 겪는다고 말했다.

 

“함께 살 길 버리고 자기 이익만 챙긴다”

 수입상들이 일본 기업에 정보를 제공해 오락기 판매점들이 서리를 맞게 되자 전국의 오락실들은 일본에서 직수입한 원판만을 사지 않으면 안되는 형편이다. 복사본에 비해 원판은 두배 이상 비싸기 때문에 전자오락실 중 태반은 문을 닫아야 할지 모른다는 얘기가 벌써부터 나오고 있다. 오락기 판매점에 부품을 대던 중소기업들은 당장 내일이라도 문을 닫아야 될지 모르는 형편이기도 하다.

 “우리도 언제까지나 불법 복제를 하겠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우리가 화가 나는 것은 수입업자들이 사전에 우리와 진지하게 이 문제를 논의했으면 훨씬 충격을 줄일 수 있었는데 그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수입업자도 손해를 보지 않고 우리도 살 길이 있었는데 말입니다.”

 세운상가 오락기 판매상 ㅇ씨(38)의 말이다. 그들이 얘기하는 모두 같이 사는 길이란, 전자오락기 판매상과 수입상들이 신사협정을 맺어 복제품의 양을 점점 줄여나가는 것을 말한다. 만약 그렇게까지 할 수 없다면 당장 복제품 판매는 중단하더라도 예전에 만들었던 것만큼은 법적으로 문제 삼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상인들은, 만약 일본 기업들과 직접 협상했더라도 그 정도 수준으로 타협됐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수입상들이 일본 기업에 고자질하는 바람에” 자기들이 하루아침에 생계를 위협받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불만을 터뜨린다. 또 오락실을 운영하는 영세업자들은 그동안 투자한 돈을 몽땅 날리게 생겼다는 것이다.

 세운상가의 오락기 판매상들은 수입상들이 개입하는 바람에 그동안 애써 축적한 기술이 모두 쓸모없게 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한다. 세운상가 상인들은 지난 10여년 동안 일본 제품을 복제하는 과정에서 하드웨어 제작 기술만큼은 일본과 대등한 수준에 이르렀다고 자부한다.

 70년대 중반만 해도 일본에서 들여온 인쇄 회로기판(PCB)에 그대로 부품을 옮겨 심지도 못하는 수준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는 70년대 당시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한 프로그램 부품도 자체 제작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다고 한다.

 문제는 소프트웨어 개발인데, 세운상가 상인들은 이 분야에서도 괄목할 성과를 거두고 있다. 아직 일본에 비하면 걸음마 단계라고 할 수 있으나 그들은 첫걸음은 일단 떼어 놓았다고 본다. 세운상가 상인들이 소프트웨어 개발에서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기까지에는 많은 시행착오가 있었다. ㅂ씨의 경우는 복제품 판매로 모은 돈을 몽땅 소프트웨어 개발에 투자했다가 3년 만에 손을 들기도 했다. 그는 박사 출신 소프트웨어 연구전문가 10여명을 고용해 6개월에 한 개꼴로 오락 프로그램을 자체 개발해 세상에 내놓았으나 한 개의 상품도 히트하지 못해 빈털터리가 됐다. 현란한 색채와 폭력적인 내용으로 일관된 일본 오락기에 길들여진 청소년들의 입맛에는 그가 개발한 프로그램이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실패는 전혀 무의미한 것이 아니었다. 세운상가 상인들에게 “우리도 얼마든지 프로그램을 개발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준 것이다. 그이 실패를 밑거름으로 삼아 그 뒤 몇몇 사람이 힘을 모아 자체 프로그램을 개발하기 시작했고 그들이 만든 프로그램은 서서히 오락기 시장에서 먹혀들고 있다.

 

수출 한국 앞지른 대만, ‘복제’에 관대

 오락기 소프트웨어 개발에 진력하는 세운상가의 상인 ㄱ씨는 “수입상들을 원망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프로그램 무단복제는 엄연한 불법이고 도의적으로도 어긋나기 때문이다. 다만 시기가 좋지 않아 안타깝다. 현재 우리나라 오락기 소프트웨어 개발이 꽃을 피우려는 단계인데 채 꽃망울도 터뜨리기 전에 시들어버리게 생겼다”라고 말한다.

 그가 이같이 우려하는 까닭은 세운상가에서 기술을 익힌 전문가들이 하나둘 대만으로 빠져나가기 때문이다. 덕분에 3년 전만 해도 우리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기술 이 떨어지던 대만이 이제는 우리 기술을 따라잡아 오락기 수출에서 한국을 앞지르는 형편이다. 국내 여건 때문에 기술을 유출했다가 뒤통수를 맞고 있는 셈이다. 대만의 경우는 업자 간의 알력도 없고 정부에서도 국익에 반하지 않는 한 복제품 생산에 관대하기 때문에 얼마 있지 않아 자체 소프트웨어를 개발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

 현재 국제적으로 오락기의 잠재 수요는 무한하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세상에 전자오락을 싫어하는 민족은 없기 때문이다. 현재 세운상가에서는 유행이 지난 오락 프로그램을 복제품 수입에 대한 규제조항이 없는 동남아시아ㆍ중동ㆍ러시아 등지로 수출하는데, 일본 제품에 비해 손색이 없기 때문에 인기가 높다고 한다. 또 유럽이나 미국의 수입상들도 한국의 기술 수준이 높다는 소문을 듣고 제발로 세운상가를 찾아온다고 한다.

 세운상가의 상인들은 이번 기회에 축적한 기술을 바탕으로 자체 오락기 소프트웨어를 개발해 당당하게 일본 제품과 국제시장에서 겨룰 수 있도록 정부나 대기업이 적극 지원해 주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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