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 : 서평] 구한말 · 일제강점기 이해에 값진 자료
  • 안병기(단국대교수 · 사학) ()
  • 승인 1989.12.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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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국대 동양학연구소 《장지연전서》… 10년에 걸친 자료수집, 총 예산 2억원

최근 단국대학교 부설 동양학연구소(소장 金東旭)에서 《張志淵全書》 전10책이 간행되어 관련 학계 및 언론계로부터 주목받고 있다. 개화기(구한말) · 일제강점기의 언론인이요 國學者로서 국권 수호 · 회복운동과 국학 연구에 몸바쳤던 韋庵 張志淵 선생의 전집이 완간됨으로써 선생의 평생 저술 대부분이 서거한 지 68년만에 햇빛을 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전서》의 발간과 대를 같이하여 지난 11월2일에는 ‘위암 장지연 선생 기념사업회’(이사장 朴權相)가 발족되고, 학계 · 언론계 등 각계 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장지연전서》 출판기념회도 개최되었다. 기념사업회에서는 언론창달과 국학진흥을 위한 여러가지 사업을 추진할 것도 계획하고 있어 《전서》 간행의 의의를 더욱 새롭게 해주고 있다.

 

언론 · 저술 · 교육 통해 구구운동

위암 장지연 선생은 1864년 12월28일(음력 11월30일) 경상북도 尙州牧 內東面 東郭理에서 仁同(玉山) 출신 張龍相선생과 문화柳氏사잉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리고 1921년 11월1일*음력 10월2일) 경상남도 馬山府 壽洞에서 58세를 일기로 타계하였다. 그리 길지 않은 선생의 생애는 대략 다음과 같은 세 시기로 나누어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제1기는 1897년(33세)까지로, 전통적인 유생 또는 유학지로서의 길을 걷던 시기이다. 선생은 이 시기에 族祖인 梧下 張錫鳳, 영남의 巨儒 舫山 許?에게 수학하였고 척사론자 면우 郭鍾錫, 剛齋 李承熙에게 가르침을 받기도 하였으며, 과거에도 자주 응시하였다. 한편 러시아공사관으로 파천한 국왕 고종의 환궁을 요청하는 만인소운동에도 참여하였고 을미사변 소식을 듣고 ‘의병격문’을 작성하기도 하였으며, 사례소 직원, 內部 주사 등의 관직을 맡기도 하였다.

제2기는 1898년(34세)부터 1910년(46세)까지로, <대한황성신문> <황성신문> 창간 참여(1898), 독립협회주관 ‘만민공동회’ 참여(총무위원, 1898)에서 보듯 유학자 혹은 한학자에서 스스로 개화사상가로 변신하여 활동한 시기이다. 그러나 선생의 개화사상은 일본으로부터 영향받은 ‘개화’가 아니라 청나라로부터 영향받은 ‘自强’, 즉 전통을 기켜나가는 가운데 부국강병에 힘써 외침을 막고 근대화도 이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학여 선생은 <시사총보> 주필(1899), <황성신문> 주필 · 사장(1899, 1901~1906)으로서 신문논설을 통하여, 또는 尹孝定 등과 대한 자강회를 조직하여(1906) 자강운동을 펴나갔다. 다산 丁若鏞의 《목민심서》 《흠흠심서》를 간행하고(1900) <我拜疆域考>를 증보한 《大韓疆域考》를 펴낸 것도(1903) 그러한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1905년(41세) 일제의 강요로 을사오조약이 체결되면서 선생의 자강운동은 언론 · 저술 · 교육을 통한 구국운동으로 전환되어 갔다. 논설 ‘시일야방성대곡’을 1905년 11월20일자 <황성신문>에 게재하고 지사 梅泉 黃炫의 절명시를 1910년 10월11일자 <경남일보>에 게재하여 언론을 통한 구국운동을 시작했고 이집트의 영국 식민지화과정을 다룬 《埃及근세사》의 편역(1905), 프랑스의 애국소녀 잔다르크의 활동을 그린 《이국부인젼》의 번안(1907), 중국정신을 강조한 梁啓超의 《중국혼》 번역(1907) 등 저술을 통하여 구국운동을 벌였고 휘문의숙 · 평양일신학교장을 역임(1906)하면서 학생들에게 구국을 가르치고 그러한 내용이 담긴 교과서를 펴냄으로써 교육ㅇ들 통한 구국운동에 정성을 쏟은 것이다.

선생의 국학 연구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한국의 세시풍속을 정리한 《조선세시기》(1916~1917), 한국시를 집대성한 《대동시선》(1917), 한국유학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조선유교연원》(1917), 서민 중심의 전기집인 《일사유사》(1918) 등은 모두 이 시기에 나온 저술들이다.

그동안 동양학연구소에서는 국학연구를 위한 몇가지 기초작업을 추진해왔다. 그 하나는 한국 한자어를 조사 · 수집 · 정리하고 이를 바탕으로 하여 총 17권에 달하는 《漢韓大辭典》을 간행하는 일이다.

다른 하나는 국학관계 기본자료를 조사 · 발굴하여 이를 동양학 총서로 간행하는 일이다. 1971년에 제1집 《훈동자회》의 간행으로 시작된 이 사업에는 한국 근 · 현대의 국학자나 민족운동가들의 우저작을 전집으로 간행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으며, 그 첫 시도로 1975년에 임시정부 대통령을 역임한 민족주의 사학자 白? 朴殷植 선생의 저작을 집성한 《박은식전서》 전3책을 동양학총서 제4집으로 간행한 바 있다.

《박은신전서》에 이어서, 1975년말 제2의 전서로 위암 선생의 유저작물 간행을 결정하고 자료수집 및 간행책임을 필자에게 위촉하였다. 그로부터 10여년에 걸쳐 10여명의 연구원이 동원되고 약 2억원의 예산을 투입한 끝에 이제 《장지연전서》 전10책의 상재를 보게 된 것이다.

 

유족들. 일제의 눈 피해 유고 간직

이 《전서》가 나오기까지에는 이처럼 단국대학 당국의 적극적인 지원이 있었다. 그러나 장지연 선생의 유저작물을 대부분 망라하는 이만한 분량의 《전서》가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선생의 유족들이 일제의 감시의 눈을 피하면서, 또 6 · 25와 같은 참담한 전란을 겪으면서도 중요 저술들을 고이 간직해왓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가상하기도 하려니와 이만저만 다행한 일이 아닐수 없다.

이 《전서》에는 후손(증손 張載洙) 등이 소장하고 있는 유저작물은 물론 선생이 남긴 記名이 된 그 밖의 글들을 당시의 신문 잡지들을 낱낱이 조사 · 발굴하여 수록하였다. 또 그 속에 실린 글의 내용도 다양해 항일구국 등의 논설에서 국학관계 저술, 농학관계 저술, 문학관계 저술, 詩를 비롯한 문학작품 등에 이르고 있으며, 이를 통하여 선생이 가진 학문의 폭과 깊이를 실감하게 해준다. “위암은 조선후기 실학의 마지막 학자”라는 어느 연구자의 평은 적절한 지적이 아닌가 한다.

《장지연전서》의 발간은 한 개인의 위업을 기리는 일에 그치지 않는다. 선생의 젖술은 개화기에서 일제강점기에 이르는 격동의 세월을 보다 생동적으로 이해하라 수 있게 해줄 것이다. 이 시기에 대한 연구에서 커다란 애로점의 하나가 활동 주체가 남긴 자료가 태부족하다는 점이라는 것을 감안할 때 이 《전서》가 갖는 자료로서의 비중 또한 적지 않다고 할 것이다. 그리고 이 전집을 통하여 우리의 선인들이 이 시기를 어떻게 헤쳐왔는지를 깨닫는 것은 현재의 시점에서도 많은 교훈을 던져줄 것이다.

위암 장지연 선생은 신문논설이나 저술을 통하여 자강운동, 구국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국학 연구에 정진한 언론인이요 국학자였다. 이러한 선생의 활동과 평생의 업적에 대한 기초적 자료가 발간되었다는 것은 관련 각 분야의 학술 진흥을 위해서는 물론, 민족문화와 민족유산의 계승이라는 측면에서 우리 모두가 함께 기뻐해야 할 일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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