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담] 中間層, 부패 막는 ‘소금’돼야
  • 편집국 ()
  • 승인 1989.11.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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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학자 張達中교수(서강대·본지 객원편집위원)와 소설가 朴泰洵씨가 지난 11월8일 우리사회의 ‘존경받는’ 화이트칼러 집단이 부패하게 된 사회·경제·정치적인 원인과 그 치유책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박태순 : ‘腐敗學’이라 할까, 부패론이라 할까, 그런 학문적 분야를 세워 사회과학 이론화 작업이 이루어져온 바 있나요?

 장달중 : 정치학·사회학·경제학 등에서 다루고는 있습니다만, 부패학·부패론으로 독자적 분야의 체계를 세운 바는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는 이 문제가 크게 대두되어온 만큼 어쩌면 그런 이론개발이 앞으로는 필요하겠다는 생각마저도 드는군요.

 박 : 자연과학이 설명하는 부패라는 것은 물질 순환의 중요한 현상의 하나라하여 그것이 필요한 것임을 강조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사회적 부패는 이와 다른 내용인 듯싶군요. 부패 행위를 저지른 자가 부패되어 사회적 환원을 일으킨다면 문제될 게 없는데, 그것이 거꾸로 작용되어 부패분자는 활갯짓을 치고 사회만 썩어버리는 듯하다는 점입니다. ‘부패의 사회학’은 어떠한 사회(병리)현상을 말하는 것인가요?

 장 : 사회적 부패는 “사회의 규범에 반해서 개인의 이득을 취하는 행위태”를 가리키는 것이라 하겠는데 그 접근에는 문화적 시각과 사회구조적 시각이 있습니다. 가령 서구 학자들은 일본사회에 부정부패가 제도화돼 있다고 보는 데, 그 이유를 동양 전통문화가 “선물이 오가는 사회”를 이루어왔다는 데에서 찾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의 권력형 부패는 하도 엄청나게 이루어져왔던 만치, 가령 ‘5공비리’가 어느 정도 청산될지 나 자신도 지켜보는 입장입니다마는 이에 못지않게 ‘사회구조적 부패’ 문제가 심각합니다. 생산력의 확대는 이루어졌으나 분배는 극단적으로 왜곡된 데에서 나타나는 중요한 사회병리현상의 표현이 바로 부패라 보는 것이지요.

 

독재·독점이 떠남긴 부패구조

 박 : 조선 명종시대에 남명 曺植은 “이 나라가 아전·서리 때문에 망하리라” 하고 예언했습니다. 탐관오리의 가렴주구가 조선 망국의 가장 중요한 이유였다고 보면 그의 예언대로입니다. 물론 봉건사회의 수취구조하에서 일어나던 부패는 오늘의 그것과 다른 유형이겠지요. 하지만 8·15 이후 여섯개의 공화국을 거쳐왔다고 하는 이 분단사회야말로 어느 면에서는 “부패로 유지돼왔다” 하고 느끼는 사람이 대다수일 정도로 그것은 제도화되어 구조적으로 순환돼온 것이 아니냐 싶습니다. 사회구조적 부패문제는 지금 어떤 단계까지 와있는 건가요?

 장 : 사실 대단히 심각한 문제입니다. 먼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부정부패 추방 캠페인’ 따위의 정신개혁운동 차원에서 이것에 대응하는 단계는 훨씬 지났다 하는 점이며, 따라서 부패는 사회정의감이나 양심에 의해서 판단될 수 있는 사회악의 차원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아울러 흔히 언론이 다루는 방식, 즉 엄청난 부정부패 사건이 터졌을 적에 일단 대서특필해서 사례별 현상이나 나열하다가 용두사미로 끝내고 마는 그런 처방으로서는 부패구조해결에 전혀 도움이 안된다는 점입니다. 나 자신 이를 대단히 심각한 문제로 느끼는데, “부패인가, 폭력인가” 하는 양대 기로에 우리가 서있는 것이 아니냐 반문하고 싶을 지경입니다.

 박 : 부패냐, 폭력이냐 하면…부패구조 속에 함몰되어 함께 썩어버리느냐, 아니면 아예 손 털고 체제전복 쪽으로 돌아서느냐…그런 방식외에 제3의 길이 없다고 판단될 지경에 이르렀다는 건가요? 사회인으로서 그런 괴로운 관찰을 해보게 된다는 건가요, 아니면 우리 사회 자체가 그같은 괴로운 선택을 해야 할 막바지 단계에 다다랐다는 건가요?

 장 : 지금이야말로 우리 사회가 더 이상 부패에 의존해서는 안되는 것처럼 폭력(혁명)에 의한 변화를 바라도록 내버려두기만 해서도 안되겠다는 것입니다. 한 사회가 부패에 의존하느냐, 폭력에 의존하느냐 하는 막판 상황에 몰리기 이전에 부패의 구조적 문제점을 밝혀 이 썩은 사회를 치료해나가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의 부패 문제, 그것의 구체적 실상은 대체로 이렇습니다. 먼저 독재문화와 그 부패의 청산이라는 부담을 오늘의 우리가 안고 있는 중이지요. 절대권력은 절대 부패한다는 명제를 우리는 쓰디쓰게 체험해온 겁니다. 정치적 권력구조가 국민에 의해 이루어지게 된 것도 아니고 또한 국민의 의사를 반영해 보려고 하기는커녕, 사회세력들의 요구를 억누르고 무시하기만 하면서 오직 권위주의로 군림하게 될 때, 그런 체제는 구조적 물리력의 장악으로서밖에는 지탱될 수가 없습니다. 구조적 물리력이란 일부에서 말하는 소위 ‘국가독점’의 독재이니까 부패구조 속에 함몰돼버릴 수밖에 없는 것이었지요.

 두번째로 생산력의 비대화 문제입니다. ‘개발독재’가 됐든 어찌됐든 우리 경제규모는 엄청나게 부풀었으며 절대빈곤은 사라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상대적 빈곤감, 나아가 상대적 박탈감의 격차가 더 벌어졌어요. 생산력 확대로 발생된 ‘잉여’가 은밀하게 제도화된 부패구조를 통해 더욱 왜곡되게 배분된다는 점입니다. 부패한 관료집단만이 아니라 구조적으로 강해진 경제집이 부패를 확대재생산시키는 사회현상이 내재적으로 보편화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화이트칼러의 직업관련 범죄 심각

 셋째로 국가권력과 사회세력 사이의 연결고리, 그러한 것을 매개해야 하는 중간집단이 여전히 제 역할을 찾지 못하는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회 압력단체 구실을 해야 할 중간세력이 도리어 정치권력에 의해 조정, 동원되는 일이 아주 쉽게 일어난다는 겁니다. 더욱이, 그렇게 때문에 언론인·대학교수·문인·법조인·종교인들마저 민중적 이익을 대변 못한 채 집단이기주의 또는 특수공통체의 기득권 수호에 따라 정치권력에 귀속되어버리는 게 아니냐 하는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권력형 부패의 다음 차례로 사회형 부패의 문제가 대두되는 것이지요.

 박 : 지금 장교수께서는 부패 문제가 중간집단의 역할과 민중의 이익이라는 것과 관련된다는 내용의 말씀을 하셨는데, 우리의 사회구성체와 관련시켜 특히 “존경받는, 혹은 존경받아야 할 집단”에 만연된 부패의 실태와 그 사례들을 흔히 접할 수 있습니다. 저도 ‘士’자 항렬의 하나인 文士이기는 합니다마는, 우리말로는 ‘쟁이’또는 ‘질’이라 하지요. 말쟁이, 글쟁이, 환쟁이, 예수쟁이, 세금쟁이, 거짓말쟁이, 트집쟁이, 실없쟁이, 겁쟁이 등등에다가 훈장질, 의사질, 형사질, 강도질, 도둑질 등 말입니다.

 그런데 요즘 우리 사회가 ‘배사공’ 판치는 세상이라 하더군요. 무슨 뱃사공타령이냐 하니까 배임뇌물수수·사기횡령·공갈협박의 화이트 칼러 범죄가 주종을 이루는 사회로 변했다는 겁니다. 우리 사회의 가치규범적 지렛대가 돼야할 이 집단에서마저 직업과 관련된 사회병리와 부패가 만연되고 있다면 그 원인은 무엇인지?

 

‘민중문화’로부터 건강성 되찾을 수도

 장 : 훈장질의 ‘질’과 글쟁의 ‘쟁이’가 끼리끼리 만나 이야기가 잘 될지 모르겠지만, ‘질’과 ‘쟁이’들의 세계에 부패가 있다면 그것 또한 도덕적 잣대보다는 구조적 순환관계로써 살펴야 하겠지요. 저는 이 문제를 첫째로 사회현실과 사회규범간의 격차에서 찾고 싶은데 다시 말해, ‘실제로 누구나 하는 짓’이라는 사회관행과 ‘해서는 안되는 것’이라는 제도와 법규 사이에 균열현상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업적주의와 귀속주의 사이의 혼재 현상을 들고 싶습니다. “하면 된다”식의 능률주의와 출세주의(업적주의)를 말로는 내세우고 있으나 실제로는 혈연·지연·학연 따위 (귀속주의)에 얹히어 사회행위들이 이루어지고 있으니 둘 사이의 공백을 부패성 ‘정실’이 메우는 것입니다. 이 문제는 곧 사회구조적 해체를 통한 어느 정도의 평준화가 진행되어야 할 필요를 느끼게 하는 데 그것이 바로 참여민주주의와 민주적 사회제도의 과제로 남아 있습니다.

 다음으로 정치적 권위주의문화가 아닌 국민의 문화, 대중의 사회가 열려야 한다는 점입니다. 엘리트 집단이 권위주의 권력에 대항, 민중적 이익을 대변하는 ‘건강한 매개고리’가 되지 못한 채 앞에서 말했듯 집단이기주의와 특수공동체의 기득권 수호에 기울었다는 점에서 마땅히 비판돼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士’자 돌림 집단들 속에서 새로운 사회운동이 일어나고 있지 않습니까. 이러한 자발적인 집단운동들이 일련의 민중운동과 함께 부패사회를 극복하려는 지렛대 역할을 하리라 기대해 봅니다.

 박 : 가령 전교조운동이라든가 민교협, 또는 학술단체운동과 더불어 법조계의 ‘민변’이라든가, 의료계에서 이는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등 권위주의 권력과 여러 사회세계 사이의 차단된 통로를 매개하게 될 이런 ‘중간 벨트’집단의 역할과 기여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민중의 이익은 누구에 의해 대변되는 게 아니라 결국 그들 자신의 힘으로 획득되는 것이며 부패의 문제와 관련시켜 볼 때 이 점은 더욱 분명하지 않나 합니다. 부패해볼 수 있는 기회조차 박탈당하고 있다는 점이 없는 것은 아니겠으나 부패하지 않은 민중의 문화로부터 우리 사회의 가능성이 열리지 않을까요?

 장 : 정치학을 통해 살피면 사회발전은 신분사회-시민사회-대중사회의 단계를 거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경우에는 이것이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져온 것으로 보이는데, 바로 ‘민중’의 단계는 내 나름으로는 시민사회-대중사회로의 전환기에 놓여 있는 것이라 보고 있습니다마는, 어쩌면 그보다 더 진전된 단계라 주장하는 이들의 견해에 대해서 수긍할 수도 있겠지요. 민중이 가치지향성을 지니는 데 반해 대중은 몰가치성의 방향성 상실로 분말화되어버린 상태이거든요.

 그렇다면 우리 시대 민중의 가치지향이 어떻게 되는냐하는 문제가 나오는 데 결국 사회평등이겠지요. 그런데 평등의 내용이 달라진 겁니다. 전에는 자유를 요구하고 지금은 분배를 주장합니다. 자유란 요컨대 기회의 평등인 것이고, 분배는 결과의 평등, 즉 생산력의 잉여에 대한 정당한 참여와 생산관계의 개선입니다. 민중의 이러한 요구는 당연함에도 과거 정권은 오직 억압으로 응수해왔지만, 이제부터는 그래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지배권력의 양보와 수용이 최선책입니다. 부패란 것이 일종의 ‘독재비용’이었다면, 이제는 ‘사회비용’으로 그것을 전환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부패의 회오리바람 잠재워야

 박 : 교도소 안에 가장 많이 쓰여 있는 말이 “無錢有罪 有錢無罪”라는 것이라고 합니다. “빽 없으면 깩이고, 돈 없으면 돌아버린다”는 것은 감옥소만 아니라 관청·은행·학교·벼원…어디를 막론하고 기층민중들을 절망케 하고 있으면, 따라서 이들의 사회적 박탈감은 이 사회 전체를 부정부패의 응결체인 것으로 파악할 수 밖에 점이 있습니다. 저 위에서 벌어지는 부패의 결과로 일어나는 피해가 이 아래쪽으로 암울하게 전가되는 것으로 파악하는 것은 지나친 것일까요?

 장 : 사회적 비용을 익명화시켜서 대중에게 부담시키는 사회체제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야 함은 물론입니다마는, 그것은 부패의 문제이기보다는 경제적 불평등이라는 차원에서 파악돼야 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나라의 부패는 계급 라인을 따라서 이루어지는 것만은 아닙니다. 또한 정치적 갈등과 경제적 불평등이 서로 照應되고 있는 것만도 아닙니다. 이 문제는 더 연구해보기로 하고, 지금 우리 사회는 산업적 역동성에 거세게 흔들리고 있습니다. 더욱이 거기에 부패가 일종의 회오리바람을 가라앉혀야겠는데, 예컨대 불로소득이라든가 財테크의 沒도덕성 문제, 물질적·정신적 飢餓현상이라 할 과소비 풍조 등이 다 그러합니다, 이 모든 것이 부패 그 자체는 아니지만 사회적 부패의 動囚을 이루어 부패사회를 가져오게 하지 않나 합니다.

 박 : “맑은 물에서는 물고기가 살지 못한다, 너무 맑은 체하지 말라”식으로 부패의 필요악을 시인하는 따위의 속담이야말로 버려야겠군요. “더러운 물에서야말로 물고기가 살지 못한다, 더 더러워지면 죽는다”이니까요. 부패의 사회갈등에 대해 이나마 문제제기를 해볼 수 있었다는 것에 의미를 부여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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