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지고 파느니 하나라도 제값에
  • 나주· 서명숙 기자 ()
  • 승인 2006.05.22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호남서 무밭 갈아엎어··· “수입개방에 중농마저··· ” 우려

호남 지역의 1백70여 농가가 무값 폭락을 낳은 개방농정에 대한 항의와 물량 조절을 위해 자신들의 무 저장밭 4백만평 가운데 절반을 폐기하겠다고 선언하고 행동에 들어간 것은 지난 11일.

온 국민의 마음을 철렁하게 만든 ‘무밭 갈아엎기 ’의 현장은 끔찍했다. 첫 갈아엎기가 시작된 지 사흘째인 13일 5시경. 나주시를 관통하는 13번 국도를 벗어나 사태가 처음 일어난 나주군 왕곡면 행전리로 들어가는 도로변에는 무밭이 끊임없이 펼쳐졌다. 트랙터 밑에 깔려 여러 토막으로 갈라진 무가 그때까지도 푸른 빛이 도는 싱싱한 하얀 속살을 드러낸 채 뒹굴고 있었다.

파동 나흘째에 접어든 14일 오전 11시. 갑자기 쏟아지는 비에도 아랑곳없이 11대의 트랙터가 나주군 봉황면 오름리의 한 무밭에 몰려들었다. 그 중 두 대의 트랙터가 밭 양쪽에서 달리기 시작했다. 트랙터가 한번 지나갈 때마다 겉으로 보기엔 두둑한 흙더미로 보이던 밭이랑 속에 저장됐던 무들이 투두둑 흙을 털며 일어났다. 그러나 곧이어 무는 트랙터 뒤켠 로타리에 치여 하얀 물보라를 일으키며 부서져 나갔다. 5천평 밭을 한 이랑씩 걸러서(절반만 폐기한다는 원칙에 따라) 갈아엎는 데에 걸린 시간은 채 20분도 안되었다. 20년 무농사꾼이라는 밭주인 羅琮君씨(59?나주군 봉황면 욱곡)는 작업이 다 끝난 뒤에도 갈려나간 무 때문에 마음이 언짢은 듯 담배 한 대를 다 태운 뒤에야 말문을 열었다.

“어쩌겄소. 농사꾼한테사 지은 농사가 자석겉은 것이제만…아, 폴아먹든 못허고 어쩔 것이요. 폴아봤자 운임은 고사허고 인부대도 안 나오요. 보기 싫은께…없애는 게 더 낫제. 그래사 쪼깨 남은 거라도 제값 안 받겄소.”

밭떼기로는 평당 3백~4백원, 25킬로그램들이 1부대당 1천3백원을 밑도는 가격으로는 인건비만 더 들어가니 차라리 갈아엎고 후작인 수박재배라도 기대해야겠다는 게 羅씨의 푸념이었다.

지난 김장철에 동치미무로 출하하려 했던 다발무가 워낙 채산이 안맞아 겨우내 밭에 저장했다가 파헤친 젊은 농사꾼 金倉燮씨(34?나주군 왕곡면 행전리)가 내미는 수지 계산서는 내다 팔수록 오히려 손해만 보는 무값 실태를 단적으로 보여주었다. “중개상인이 무시값을 1부대당 1천2백원으로 쳐줄 때 5톤 트럭 한 차에 46만원 받음. 무시 작업비는 인부대, 톱밥흙, 차비, 마대, 끈, 빵, 술, 담배 모두 해서 35만원(더 빼야 할 것). 중개상인 수수료 5만원, 하차비 4만5천원, 위탁상에게 산매비 6만원.” 결국 이 수지계산서에 따르면 부대당 1천 2백원에 5톤 트럭 한 대분의 무를 내다 팔 경우, 생산비는 고사하고 4만5천원의 손해를 보게 되는 셈이다.

 

당국에선 “값올리려는 속셈 ” 비난

전남 영암?나주?광산?무안?영광군 등 5개군과 전북의 고창군 등 3개군을 휩쓴 이번 무파동의 원인은 단순하게 보면 과잉생산으로 인한 가격폭락 때문이다. 전국의 무재배면적이 99년보다 6% 줄었음에도 작황이 좋아 12%나 생산량이 늘어났고 반면에 김장수요는 78%나 줄어든 바람에 공급과잉 현상이 나타나 자연 무가격은 김장철부터 현재까지 ‘바닥세’를 못 면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무밭 갈아엎기 ’를 주도한 호남채소재배영농회(회장 金泰根)측은 생산과잉의 원인은 “당국의 무분별한 수입개방정책과 농정부재 ”라고 주장한다. 즉 88년부터의 수입개방 정책으로 땅콩과 아몬드가 수입되는 바람에 전북 고창 일대의 땅콩 재배농가들이 마땅한 대체작물을 찾지 못해 무농사로 대거 전환한 데다, 지난해 7∼8월 나주 지역을 휩쓴 대홍수 때 당국이 무 배추를 대신 심도록 권장한 것이 오늘의 폭락사태를 낳았다는 것이다. 영농회측은 그 근거로 전남지역에서만 유달리 무 재배면적이 22%, 생산량이 38%나 늘어난 점을 들고 있다.

영농회의 金泰根회장은 이번 무밭 갈아엎기는 “당국의 농수산물 수입개방과 농정 부재에 항의를 표시하는 한편 남은 무를 반으로 줄여 정당한 가격을 받기 위한 것 ”이라고 주장했다. 농정부재의 책임을 당국이 지지 않는 현실 속에서 농민들이 그냥 휘둘리기만 할 게 아니라 직접 나서 물량 조절을 해서라도 제값을 받으려는 ‘자구책 ’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사태에 대한 당국의 해석은 농민들의 주장과 엄청난 시각차를 드러내고 있다. 농수산부의 徐圭龍 채소과장은 “무는 수입개방과 직접 연계시킬 수 없다 ”고 전제하고 “정부의 재배면적 조정을 따르지 않고 무작정 무 재배면적을 늘린 뒤 과잉생산과 값 폭락에 따른 책임을 정부에만 돌려서는 안된다 ”는 입장을 밝혔다. 전라남도의 한 관계자는 이 운동을 주도한 농민들이 대개 5천평 이상 10만평까지 소유한 중농, 기업농임을 들어 “몇몇 기업농이 가격을 조작하기 위해 농간을 부리고 있다 ”는 주장을 펴기도 했다.

그러나 많은 농업전문가들과 재야 농민단체들은 이번 무파동이야말로 정부가 그토록 육성을 외쳐온 중농, 기업농조차도 농정 부재 속에서 피폐해 갈 수밖에 없으며 수입농축산물의 여파가 거의 모든 농축산물에 직?간접적으로 미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진단하고 있다.

농업경제학자 장상환교수(진주 경상대)는 “88년부터 시작된 외국 농축산물 수입으로 인해 모든 농작물들이 연쇄적으로 피해를 보는 ‘도미노현상 ’이 벌여지고 있다 ”고 지적한다. 즉 양담배 포도 냉동감자 땅콩의 수입으로 해당 농가만 몸살을 앓게 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담배 땅콩 농가들이 마땅한 대체작물을 찾는 과정에서 이미 시장의 수급균형을 이루고 있던 고추 무 재배에 뛰어들게 되어 고추?무파동을 낳고, 뿐만 아니라 바나나 파인애플의 수입으로 비슷한 시장을 가진 사과 배 귤 농가가 몸살을 앓게 된다는 것이 장교수의 지적이다.

 

“배도 로타리 쳤으먼 쓰겄소 ”

사실상 이번의 무파동은 15~35%선까지 가격이 폭락하고 있는 사과 배 귤, 그리고 외국산 냉동감자의 수입으로 강원도 평창지역에서 썩고 있는 3천7백여톤의 감자까지 감안하면 ‘빙산의 일각 ’에 불과하다. 앞으로 연쇄적인 파동을 막으려면 외국 농축산물 수입에 탄력성 있게 대처할 수 있는 대체작물을 적극 개발하고 농수산물 전체의 수급균형을 파악하는 농민 민간단체의 설립이 시급하다는 지적도 있다.

외국농축산물 수입개방을 하면서 ‘제 봇도랑 ’도 제대로 다지지 않은 당국은 이제라도 대책을 서둘러야 한다. 무파동의 진원지인 나주군을 빠져나오는 국도변에서 만난 한 배농사꾼의 말은 우리 농촌이 얼마나 ‘흔들리고 ’ 있는지를 읽게해준다.

“무시만 로타리칠 것이 아니요. 배도 한상자에 5천원도 안간다요. 할 수만 있으면 배도 똑 로타리쳐야 헐 판이요.”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