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재 정권 하수인 노릇
  • 정희상 전문기자 (hschung@sisapress.com)
  • 승인 2006.06.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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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단의 부끄러우 과거/중정 공작 따라 움직이고 민주 세력은 ‘제명’

 
오늘의 민단 사태를 거슬러 올라가면 과거 역대 한국 독재정부가 뿌린 악업이 자리잡고 있다. 일제 패망 이후 재일 교포 사회에서는 자주적인 동포 조직 결성 움직임이 일어나면서 먼저 북한을 지지하는 조총련이 결성되었다. 뒤이어 조총련에 대항해 대한민국을 지지하는 민단이 결성되었는데 대표는 권일씨였다.

문제는 권일 단장이 일제의 만주 침략 당시 만주국에서 친일 검사를 역임한 인물이라는 점이었다. 결국 한국에서 1960년 4.19 민주 혁명이 일어나자 민단 내에서도 친일 인사를 배격하고 조직을 민주화 하자는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다. 당시 곽동희씨(현 한통련 의장)가 주축이 된 민단 민주화 운동세력은 5.16 쿠테타로 박정희 군사정권이 들어서면서 권일 단장 세력에게 제명당하기에 이른다. 이후 권일 단장은 한국 공화당 의원을 지내기도 했다.

1965년 한일수교 이후 민단은 주일대사관에 파견된 중앙정보부 공사의 공작에 따라 움직였다. 민단 민주화를 주장하는 세력은 도쿄도 지방본부를 포함해 각지의 지부 조직을 장악해 군사독재 지지 세력과 첨예한 대립을 벌였다. 4.19 혁명 이후 시작된 민단 내부의 민주대 반민주 대립 구도가 깨진 것은 1970년대 초 박정권의 유신체제가 들어서면서부터였다. 중정의 공작은 1971년 민단 중앙대회에서 김재권 중정 공사가 일으킨 이른바 ‘녹음테이프사건’에서 절정을 이뤘다.

당시 민단 민주화를 공약으로 중앙단장 선거에 유석준 후보가 출마하자 김공사는 “유후보가 반국가 발언을 한 녹음테이프를 갖고 있다”라고 기자회견을 열었다. 훗날 이 사건은 중정이 민단 민주화 세력을 영구 배제하고 유신 지지 세력으로 채우기 위해 녹음 테이프를 허위로 날조한 것으로 드러났다. 그러나 당시 민단 도쿄 본부장이던 김재준 단장을 포함해 중정의 음모를 고발하고 민단과 본국의 민주화를 위해 투쟁하던 세력은 대부분 중정에 의해 조총련과 내통한 사상범(이른바 한민통 사건)으로 몰려 제명처분당했다. 공작이 끝날 무렵인 1972년 10월유신이 발표되자 마침 일본에 와있던 신민당 김대중 후보가 반유신투쟁을 선언하며 일본에 망명했고, 민단에서 제명된 민주화운동 세력은 김대중 구출위원회를 결성해 지원투쟁을 벌였다.

이후 역대 독재정권은 DJ와 한민통, 그리고 한통련으로 이어지는 민단 개혁 세력을 조총련과 내통했다는 혐의를 씌워 반국가적 사상범으로 몰았다. 하병옥 단장은 이같은 민단의 부끄러운 과거 상처를 대화합으로 치유하겠다는 기치를 내걸고 당선되었지만 공약을 실천해보지도 못한 채 취임 3개월만에 최대의 위기를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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