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탕에서 맛본 음악의 오르가슴
  • 김작가(대중음악평론가) ()
  • 승인 2006.08.04 15:34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지난 7월28일부터 인천 송도의 ‘황야’에서 굉장한 일이 벌어졌다. 악천후 속에서 사람들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표정으로 울고 웃고 소리쳤다. 감격과 환희가 들끓었던 ‘펜타포트 록 페스티벌’의 2박3일을 생

 
혹시나 싶었다. 한 시간에 한 번씩 날씨 사이트를 클릭했다. 그러나 7월28일 아침까지도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1999년의 악몽이 떠올랐다. 그날도 이렇게 비가 내렸다. 한국 음악 애호가들의 평생 소원이던 국제 록 페스티벌이 열리는 날이었다. 20년 만에 폭우가 내려 이틀 예정이었던 공연이 하루를 마치고 취소되어버린 악몽의 날. 1999년 7월31일을 나는 기억한다.

 
하늘은 무심하게 장대비를 퍼부어댔다. 쏟아지는 비를 뚫고 모인 관객들은 비에 아랑곳하지 않은 채 무대 앞을 지켰고, 음악가들은 그에 호응해서 감전의 위험을 무릅쓰고 최선을 다해 공연을 펼쳤다. 첫날 공연에서 딥퍼플은 제지하는 안전 요원을 밀쳐내고 노장의 힘을 한껏 뿜어냈다. 이런 기세라면 다음 날의 ‘프로디지’ ‘레이지 어게인스트 더 머신’도 충분히 무대에 오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공연이 끝난 후 비는 더욱 거세졌다. 공연 장비는 젖을 대로 젖어 더 이상 작동하기 힘들었다. 이동 화장실에서 역류한 오수가 캠핑장에 모여 있던 텐트 속으로 스며들었다. 대피하는 사람들 사이로 공연이 취소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늪이 되어버린 땅속으로 사라진 신발을 찾지도 못한 채, 흙탕물을 뒤집어쓰고 맨발로 집에 와야 했다. 우울했다. 우드스톡을 동경했던 청년의 꿈이 빗물에 떠내려갔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다시는 이런 페스티벌을 만날 수 없을 것이라는 막연한 불안감이 들었기 때문이리라.

 
지난 5월1일, 이 악몽의 트라이포트 페스티벌이 ‘인천 펜타포트 페스티벌’로 부활한다고는 내용의 기자 회견이 열렸다. 회견 장소에서 트라이포트의 제작사이기도 했던 아이예스컴(1999년 당시 예스컴)의 윤창중 대표는 눈물을 흘렸다. “트라이포트 페스티벌이 비로 인해 취소되었을 때…”라고 말했을 때였다. 옆자리에 앉아 있던 제작사 옐로우나인의 김형일 팀장을 바라보며 윤대표는 말을 이었다. “직원들이 모두 울었다고 하더군요.”

7년 만에 새롭게 열리는 페스티벌이건만 하늘은 또 무심했다. 적어도 7월28일 아침까지는 그렇게 보였다. 경인고속도로를 달리는 내내, 빗줄기는 유리창을 강타했다. 그저 웃음만 나왔다. 허탈한 웃음이었다. 설령 태풍 ‘나비’가 나방까지 몰고 온다 해도 끄떡없을 대형 지붕이 설치된 무대를 호주에서 공수해온다니, 공연이 취소되기야 하겠냐만 어쨌든 비는 충분히 지긋지긋했던 것이다. 또 비와 싸워야 한단 말인가.

7월28일 : 록 페스티벌 첫째 날

오전 11시, 행사가 열리는 대우자동차판매부지는 황야 그 자체였다. 7년 전의 모습 그대로였다. 도처에 진창이요, 늪이었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맞으며 텐트를 꺼냈다. 근처의 모텔을 잡을 수도 있었지만 굳이 캠핑을 택한 건 페스티벌의 가장 열성 관객이 캠핑촌에 모여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벌써 텐트 밑으로는 빗물이 고여들었다.

텐트 설치를 끝내고 나니 오후 1시, 메인 무대인 빅 톱 스테이지는 아직 열리지 않았지만 서브 스테이지인 엠넷 스테이지는 후끈 달아오르고 있었다. 디스코와 힙합, 록을 결합한 초절정 댄스 록 그룹 슈퍼키드가 무대에 올랐기 때문이다. 두명의 사회자를 앞세운 이들은 지난해부터 각종 대학 축제 및 이벤트에서 주가가 수직 상승한 팀이다. 모여 있는 관객은 5백~6백명쯤, 이들의 디스코 비트에 맞춰 벌써부터 춤판이 벌어졌다. 사회자 허책은 전성기의 엄용수를 능가하는 빠른 혀놀림으로 관객의 혼을 빼놓은 후 “여러분이 진정한 이 땅의 록 스타”라며 호응을 이끌어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했건만, 점심도 거르고 뒤이어 메인 무대로 향하는 사람들은 뭔가. 오후 2시부터 ‘예 예 예스’의 공연이 시작되기 때문이었다. 금강산이야 언제라도 갈 수 있지만 예 예 예스는 이번이 아니면 평생 못 볼지도 모를 일이다.

뉴욕에서 활동 중인 예 예 예 스는 여성 보컬 캐런 오가 이끄는 개러지 록 밴드. 스트록스, 화이트 스트라입스와 함께 2000년대 초반의 개러지 록 리바이벌을 주도하고 있다. 뉴욕 아트스쿨 출신답게 독특한 패션, 그리고 지글지글 끓는 기타 노이즈를 앞세운 스트레이트 로큰롤로 뉴욕의 밴드 중에서도 가장 ‘지적인 예술성’을 가졌다고 평가받는다. 비가 좀 잦아드는 듯하더니 신기하게도 그들이 무대에 오르자 다시 쏟아지기 시작했다. 우비를 입어도 소용이 없고 운동화는 이미 진흙으로 뒤범벅이 되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무대에 모인 사람들은 캐런 오를 눈앞에서 본다는 것만으로도 흥분할 대로 흥분해 있었다. 기타 노이즈가 작렬했다. 바야흐로 펜타포트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리는 듯한 노이즈였다. 쏟아지는 빗줄기보다, 스피커에서 뿜어져나오는 밴드의 연주보다, 더 큰 관객의 함성이 울렸다. 적은 인원이지만 기백만은 일기당천이었다. 공연 전 인터뷰에서 ‘첫 내한 공연을 앞둔 마음 자세가 어떤가’라는 질문에 “폭우가 쏟아져 단 일곱명만 오더라도 우리는 최고의 공연을 선사할 것이다”라고 답한 캐런 오였다. 페스티벌 첫날의 첫 공연, 비록 다음날의 일본 공연 때문에 지명도에 맞지 않는 시간대였지만 사흘 동안 펼쳐질 음악의 향연, 그 맛보기로서는 충분하고도 남았다.

비는 멈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장화를 준비하지 못한 사람들은 연방 푹푹 꺼지는 땅을 밟으며 좀비처럼 돌아다녔다. 기대만 있었을 뿐 경험은 없었던 페스티벌이기에 얼굴에는 피곤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인천 송도는 망자의 땅처럼 변해가고 있었다.

 
분위기를 바꾼 것은 스노우 패트롤이었다. 오후 6시쯤 이 아일랜드 출신의 5인조 밴드가 무대에 오르자 비가 잦아들었다. 주춤했다가도 막상 공연이 시작되면 쏟아 붓던 비도 게리 라이트바디의 보컬을 하늘 위에서 감상하는 듯했다. 그들의 대표곡인 ‘Run’을 약 2천명의 관객이 따라 부를 때 공연은 정점으로 치달았다. 하늘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멀리 붉은빛이 보였다. 화창한 날씨를 예고하는 노을이기를 바라며 마지막 곡인 ‘Eyes Open’을 관객이 합창했다.

메인 스테이지에서는 넥스트의 공연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서브 스테이지로 이동했다. 미국 싱어송라이터 제이슨 므라즈의 공연 때문이었다. 말이 싱어송라이터지, 빅 쇼의 전형을 보여주는 편성으로 그는 무대에 올랐다. 기타, 베이스, 드럼은 물론이고 키보드에 퍼커션, 색소폰까지 다양한 음색이 엠넷 스테이지의 천막을 울렸다. 그 중심에는 미소년에 가까운 제이슨 므라즈가 있었다. 그는 관객을 ‘가지고 노는’ 법을 알고 있었다. 어쿠스틱한 사운드임에도 시종일관 흥겨운 리듬감을 뽑아냈고 표정과 제스처로 여성 팬들의 비명을 유도했다. 아름다운 사랑 노래 ‘Bella Luna’를 부를 때였다. 제이슨 므라즈는 한쪽 팔소매를 걷어 올리더니 매직 팬을 꺼냈다. 그리고는 객석을 바라보며 팔뚝에 ‘I♡U’라고 썼다. 객석은 거의 실신 상태였다. 조용한 음악이라고 단조로운 무대를 보여서는 관객들에게 만족을 줄 수 없다는 걸,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제이슨 므라즈의 무대가 끝나기도 전에 인파는 메인 무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전에는 좀비처럼 걷더니, 이제는 42.194km 지점의 마라토너처럼 막판 스퍼트를 올렸다. 그렇다. 첫날의 헤드라이너(공연의 톱스타)인 스트록스의 공연이 시작되는 것이다. 이날 낮에 열린 기자 회견에서 스트록스는 시종일관 불친절한 태도를 보였다. 음반사 관계자에게는 “공연보다는 어서 빨리 자고 싶다. 막상 무대에 올라가면 또 모르겠지만…”이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그런 그들에게 어떤 기자는 “한국 관객들은 세계 최고다. 아마 당신들도 놀랄 것이다”라고 호언장담했다. 그 기자의 말은 옳았다. 쏟아지는 비를 뚫고 3천여 명의 관객이 무대 앞에 모여 있었다. 말이 3천명이지, 이날이 금요일이고 엄청난 강우량을 생각하면 놀라운 숫자다. 스트록스의 보컬인 줄리안 카사블랑카도 놀란 듯했다. 막상 공연이 시작되자 그는 정말 혼신의 힘을 다해 노래했다. 그는 공연도중 서태지와 아이들의 노래 ‘우리들만의 추억’을 한 소절가량 불러 객석을 어리둥절하게 했다. 알고 보니 대학 시절 룸메이트가 이 노래를 매일 듣다시피 했다고 한다. 한국 팬들로서는 뜻밖의 선물을 받은 셈이다.

 
공연이 절정에 달했을 때, 어서 잠이나 자고 싶다던 줄리안 카사블랑카는 돌연 무대 밑으로 내려왔다. 경호원들이 제지하지 않았다면 분명히 관객들과 뒤엉켜 함께 노래했을 것이다. 1999년 딥퍼플이 보여줬던 노익장은 2006년 스트록스의 패기로 되살아나고 있었다. 공연이 모두 끝나고 퇴장하기 전, 드러머 파브리지오 모레티가 잠시 멈춰 섰다. 또렷한 한국어로 “감사합니다”라고 말한 뒤 고개를 숙였다. 미지의 땅 한국, 악천후 속에서 보여줬던 관객의 에너지가 뉴욕의 도련님들을 땀에 젖게 했으리라.

7월29일 : 록 페스티벌 둘째 날

정상급 음악가들의 명연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둘째 날인 29일 밤, 비가 그친 자리에는 밤안개가 자욱이 드리웠다. 주말을 맞아 전국에서 몰려온 인파가 공연장을 가득 메웠다. 한국에서 처음 열리는 국제 록 페스티벌이 출항의 역경을 뚫고 순풍을 탄 것이다. 이날의 헤드라이너는 ‘블랙 아이드 피스’와 플라시보. ‘Where Is The Love’로 정상에 오른 힙합 그룹과 1990년대 브릿팝 아티스트 가운데 몇 안 되는 생존자다. 게다가 플라시보는 국내에서 유달리 많은 지지층을 갖고 있는 밴드다.

블랙 아이드 피스가 먼저 등장했다. 이들의 공연은 100% 순도의 엔터테인먼트였다. 단순히 노래만 부르고 들어가는 게 아니라 각 멤버별로 일종의 개인기 시간을 갖고 자연스럽게 히트곡으로 넘어가고 다시 다른 멤버가 등장하고…. 도무지 지루할 틈을 주지 않았다. 특히 여성 보컬 퍼기의 가공할 만한 ‘텀블링하면서 노래 부르기’에는 입이 딱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록 페스티벌에 힙합 그룹이 웬 말이냐’고 불만을 가졌던 사람들도 무릎을 꿇었다. 화려한 쇼 때문이 아니었다. 탄탄한 음악적 역량이 한국 주류 가요계의 현실과 너무나 대조되었기 때문이었다. 비주얼과 가십만 넘쳐나는 한국 가요계여, 부디 어설프게 빌보드 히트곡을 표절하기 전에 그들의 음악을 보고 배우시라.

 
블랙 아이드 피스가 퇴장하고 밤 10시쯤 되었을까. 플라시보가 등장했다. 단언컨대, 페스티벌 기간에서 정점은 플라시보였다. 한 번도 톱의 자리에 선 적이 없는 밴드, 그러나 한 번도 트렌드에 밀려 사라진 적이 없는 밴드. 나는 그들을 ‘록계의 김종필’이라 놀리곤 했다. 허나, 90분 동안 펼쳐진 이들의 공연을 본 후 다시는 그 말을 쓰지 않으리라고 다짐했다. 앨범에서 들려주던 바로 그 중성적인 비음을 완벽히 재현하던 브라이언 몰코의 카리스마, 패션지 화보에서 튀어나온 듯한 훤칠한 외모를 가진 베이시스트 스테판 올스달. 이 둘이 무대 전면에서 뿜어내는 건 앨범의 격렬한 몽환이 아닌, 완벽한 몰입이었다. 최근작인 <Meds>를 중심으로 ‘Every You, Every Me’ ‘Because I want you’같은 히트곡들을 쉬지 않고 연주했다. 관객은 노래를 따라 불렀고 소리를 질렀고 손을 흔들었다. 한 시대의 음악이 12년간의 베일을 벗고 바로, 우리 앞에 있는 것이다. 그것도 세월을 실감할 수 없는, 그때 그 목소리로. 앨범에서는 느낄 수 없는 거대한 황홀이 밤안개만큼이나 공연장을 가득 매웠다.

브라이언 몰코는 ‘Alcoholic Kind of Mood, Lose My Clothes, Lose My Lube’를 노래하기 시작했다. 그때쯤이었다. 객석의 어디에선가 폭죽이 터졌다. 어느 팬이 바로 그 순간을 위해서 준비했던 불꽃이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몰코의 시선도 축제의 불꽃을 향했다. 그리고는 다시 객석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아주 작은 미소였다. 단언컨대, 나는 그동안 브라이언 몰코가 무대에서 웃는 걸 어느 자료에서도 본 적이 없다. 스티븐 시걸을 능가하는 무표정의 그가 웃었다. 한국의 음악 애호가들이, 록의 신이 저주를 내린 그를 웃게 한 것이다. 그 미소에 무대 앞 여러 팬들은 눈물을 흘렸다. 당연했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감동이 환희를 넘어 심장으로부터 북받쳤으리라. 플라시보는 그런 감동에 충분히 화답했다. 앙코르를 안 받기로 유명한 그들은 첫 한국 공연에서 두 번이나 앙코르를 받았다. 마지막 곡인 ‘Twenty Years’를 끝으로 스테반 올스달은 무대 앞에 죽은 듯 쓰러졌다. 페스티벌의 둘째 날이 끝났다.

 
7월30일 : 록 페스티벌 셋째 날

드디어 해가 떴다. 하늘도 무심하시지, 이틀만 일찍 이 태양을 보여줬더라면…. 폭우로 인해 휴양지와는 거리가 먼 참혹한 환경이 되어 있었건만, 형형색색의 도구로 자신을 치장한 젊은이들이 가득한 페스티벌의 현장은 이미 축제였다. 화창한 햇살에서 사람들은 축제를 즐기고 있었다. 페스티벌 사흘째, 이제 공연을 보아야 한다는 강박보다는 이 축제 자체를 즐기는 분위기가 완연했다. 아직은 질퍽질퍽한 땅 이곳저곳에 돗자리가 펼쳐졌고 편안히 앉아서, 혹은 누워서 공연을 즐기는 이들도 보였다. 모두 웃고 있었다. 우드스톡 페스티벌 기록 사진에 남아 있는 젊은이들의 표정이 그랬던 것처럼. ‘More Than Words’로 잘 알려진 익스트림의 기타리스트, 누노 베텐커트가 이끄는 드라마갓스를 시작으로 메인 스테이지는 결승점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자우림이 국내 팀 중 마지막을 장식했고, 그 뒤로는 두 밴드가 관객을 기다리고 있었다. 쿨라 셰이커와 프란즈 퍼디넌드다. 브릿팝의 전성 시대인 1990년대 중반, 인도 음악을 결합한 록으로 화제가 됐던 쿨라 셰이커는 해체 후, 재결성을 하고 나서 첫 세계 투어 도중 펜타포트에 들렀다. ‘Hey Dude’를 라이브로 들을 수 있다니. 한때의 꽃미남 크리스피언 밀스의 얼굴은 세월의 흔적을 지울 수 없었지만 감회는 새로웠다. 비록 프란즈 퍼디낸드에게 집중하기 위해 객석 뒤편의 종이 상자 위에 누워 있지만. 같은 시간, 서브 스테이지에서는 참가 라인업 중 가장 ‘빡센’ 사운드를 자랑하는 밴드 ‘스토리 오브 더 이어’가 관객에게 몸을 부딪치는 ‘슬램’을 유도하며 헤비 사운드 애호가들과 함께 엉키고 있었지만 갈 수 없었다. 프란즈 퍼디낸드를 보려면 체력을 아껴야 했기 때문이다.

 
스토리 오브 더 이어를 포기하고, 쿨라 셰이커를 누워서 보는 불경을 감내하고 나니 프란즈 퍼디낸드의 무대가 세팅되고 있었다. 무대 뒤로 그들의 2집 <You Could Have It So Much Better>의 앨범 커버가 인쇄된 현수막이 올라갔다. 이미 객석은 환호의 도가니였다. 관중은 2006년 현재 가장 ‘댄서블한’ 록을 들려주는 밴드와 함께 춤출 준비가 되어 있었다. 지루한 사운드 세팅이 끝나고 그들이 등장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잠시도 쉴 틈을 주지 않는 사운드가 뿜어져나왔다. 보컬 알렉스 카프라노스가 소리쳤다. 그들이 부르는 “Are You Feeling Tonight?" ‘Do You Want To’에서 객석 전체가 술렁였다. 알렉스는 쉬지 않고 관객을 도발했다. “Burn This City!” 그리고 ‘Take Me Out’이 연주됐다. 송도 전체가 들썩거리는 듯했다. 누가 록을 진지한 음악이라고 했던가. 척 베리가 ‘Rock around the Clock’을 연주했을 때도 1950년대의 젊은이들은 록에 맞춰 댄스 파티를 벌였다. 록은 본래 즐거운 음악이라는 것을, 프란즈 퍼디낸드는 아주 톡톡히 우리에게 알려줬다. 보조 연주자들이 나와 세명이 한 대의 드럼을 연주했던 ‘This Fire’로 그 교훈은 함성에 뒤섞인 댄스 파티로 승화되었다.

프란즈 퍼디낸드가 앙코르를 마치고 퇴장했지만 페스티벌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삼삼오오 송도를 찾은 청춘들은 모든 공연이 끝난 빅 톱 스테이지를 배경으로 기념 사진을 찍었다. 공연이 끝났으니 퇴장해달라는 진행 요원의 말 따위는 소용이 없었다. 그들이 찍은 사진은 미니홈피와 블로그를 타고 인터넷에서 전파될 것이다. 사람들은 서로 어울려 있는 화창한 표정을 보며 대체 여기서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끼고 왔는지 절로 궁금해질 것이다. 펜타포트는 내년에도 열릴 예정이다. 비록 적자였지만 한국에서 록 페스티벌이 가능하다는 것을 확인했다고 한다. 한국의 어느 축제에서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이 이렇게 다양한 패션으로 이렇게 한결같이 아름다운 표정을 지을 수 있단 말인가. 음악의 힘이다. 음악을 함께 좋아한다는, 공유의 힘이다. 2006년 7월 28일부터 30일까지, 송도의 악천후와 진흙탕 속에서 과연 어떤 문화의 오르가슴이 있었는지 궁금한 이들이여, 2007년 여름을 기다릴지어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