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파 <괴물>과 우파 정치의 동거
  • 방민호(문학 평론가 · 서울대 국문과 교수) ()
  • 승인 2006.08.16 1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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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아비타시옹’이라는 말이 있다. 프랑스에서 좌파 대통령에 우파 내각이 들어서거나 그 반대의 경우를 가리켜 ‘좌우 동거 정부’라는 뜻으로 이 말을 사용한다. 프랑스에서는 미테랑 대통령 때 두 번, 시라크 대통령 때 한 번, 이렇게 모두 세 번의 코아비타시옹이 성립했다. 

최근 필자는 영화 <괴물>을 보면서 한국판 코아비타시옹을 실감했다. 한국판 코아비타시옹이라니? 노무현 대통령 아래에 우파 내각이 들어서리라는 뜻인가? 지금 한국의 정치 상황을 보면 그런 일이 벌어지지 말라는 법도 없지만 그런 뜻은 아니다. 나는 이 말을 좌파 예술과 우파 정치가 동거하는 최근 한국의 독특한 정치?문화적 상황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하고자 한다.  

1천만 관객 돌파를 눈앞에 두고 있다는 <괴물>이다. 나는 이 영화를 두 번이나 보았으니 앞으로 있을 기록 경신에 톡톡히 일조한 셈이다. 숱한 뉴스와 분석과 평가가 뒤따르고 있지만 사실 <괴물>이 우리에게 준 가장 큰 선물은 한강에도 괴물이 살고 있을지 모른다는 전설을 만들어주었다는 점이다. 이로 인해 우리는 커다란 현대판 전설 하나를 간직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이 괴물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 한 대학원생과 이야기를 하다 보니 그에게 괴물은 미국을 상징하는 것처럼 받아들여진 모양이었다. 미군 기지에서 한강으로 흘러들어간 독극물이 괴물을 만들어냈다는 설정 때문이었다. 그러나 괴물은 사실 그런 단순한 상징물이 아니다. 그 의미를 제대로 포착하기 위해서는 이 영화의 줄거리 중에서도 특히 소중한 존재를 잃어버린 박강두 일가족이 괴물과 최후의 일전을 벌이는 마지막 장면을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

이 최후의 일전에서 괴물을 거꾸러뜨리는 자는 하루벌이 매점 행상꾼(송강호)과 도태된 전직 학생 운동권(박해일)과 정상에 올라서지 못한 운동선수(배두나)와 거리에서 먹고 자는 노숙자 등이다. 이렇게 보잘것없는 이들이 기름과 불과 활과 창이라는 지극히 원시적인 무기로 서울이라는 메갈로폴리스(Megalopolis)가 만들어낸 현대판 괴물을 물리친다.

현실 물리치고 싶어하는 욕구가 <괴물>에 열광케 해

다시 말해 이 영화는 버림받은 자들, 빼앗긴 자들이 자신들로부터 소중한 것을 앗아간 현대 자본주의라는 이름의 괴물과 맞서 싸우는 이야기다. 이 괴물은 미국이 개발한 최첨단 생화학 무기로도 퇴치하지 못했다는 설정이 보여주듯 단순히 미국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식의 해석은 노무현 정부 시대에 이르러 기묘하게 확산된 반미주의에 저당 잡힌 시각을 보여줄 뿐이다. 괴물은 21세기 최첨단 자본주의를 누리고 있는 현대 한국 사회의 그로테스크한 메커니즘 자체이다. 봉준호 감독은 이 버림받은 자들, 빼앗긴 자들의 연대성을 가족이라는 개념으로 치환해서 보여주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석해보면 <괴물>의 메시지가 지극히 좌파적임을 깨닫게 된다. 칸 영화제에서 <괴물>이 기립 박수를 받았다면 아마도 그쪽 사람들이 이 영화가 창출한 현대판 저항의 신화의 의미를 정확히 포착했기 때문일 것이다. 단자화된 현대판 다중이 상호 연대성을 회복해서 자신들을 억압하는 기제들에 저항 네크워크를 구축해야 한다는 안토니오 네그리의 자율주의 노선을 상기해보라.

요컨대 최근 한국인들은 이런 영화를 1천만명씩이나 보고 있다는 말이다. 또 그와 같은 연장선상에서 <친절한 금자씨> 같은 박찬욱 감독의 복수 시리즈가 각광을 받았던 것이다.  말하자면 지금 한국인들의 예술적 취향은 좌파가 선도하고 있다. 


반면에 지금 정치 상황은 어떤가. 노무현 정부를 창출해낸 개혁 에너지는 거의 완전히 고갈되다시피 했다. 게다가 지금 노무현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일들은 본질상 지극히 신자유주의적이다. 여기에 연일 정부와 대립 중인 제1야당과 언론들은 사실상 정부와 권력을 분점하다시피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예술은 좌파가, 정치는 우파가 장악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 한국의 문화?정치적 상황이다. 이러한 한국판 코아비타시옹은 오늘의 한국인들이 현실을 실제로 바꾸는 대신에 현실을 바꾸는 꿈을 꾸고 있고, 또 현실을 바꿀 수 있는 힘은 갖고 있지 못한 반면에 가상에서라도 그러한 현실을 물리치고 싶어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예술과 정치의 좌우 동거, 한국에서 이것은 긍정적인 방향으로는 좀처럼 움직여 나가지 않는 현실에 대한 하나의 부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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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호부터 <문화비평> 필진이 방민호·공숙영 씨로 바뀝니다. 방민호씨는 서울대 교수(국문학)로 문학 비평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비평집으로 <행인의 독법>(2005), <문명의 감각>(2003) 등이 있습니다. 공숙영씨는 변호사이자 문화기획집단 퍼슨웹 대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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