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개숙인 남자여 그대 이름은 '아버지'
  • 강명석 (대중문화 평론가) ()
  • 승인 2006.09.04 1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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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영화에 비친 ‘추락한 가부장의 초상’
 
“내가 너에게 호부호형을 허하노라.”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데 호부호형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아, 그래서 호부호형을 허한다니까.”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데 호부호형이 무슨 소용입니까?” “아니 이 녀석이!” 한때 텔레비전 개그 프로그램에서 유행했지만, 이제는 일부러라도 웃기 힘든 추억의 유머. 아버지는 아들 홍길동에게 자신을 아버지라 부르도록 허락했는데, 홍길동은 ‘호부호형’의 뜻을 몰라 계속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해달라고 우긴다.

그런데 이걸 반대로 뒤집으면 딱 요즘 텔레비전 드라마 풍경이 나온다. 아버지는 아내와 자식을 처와 자녀로 부를 수 있게 해달라고 하는데, 아내와 자식들은 그걸 인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아버지는 더 매달리고, 다른 가족들은 여전히 냉담하다. KBS <투명인간 최장수>, SBS <돌아와요 순애씨>, MBC <발칙한 여자들> 등에 나오는 아버지의 모습이 그렇다. 이들 작품에서 아버지는 버림받거나, 무시된다. 또는 철저한 복수의 대상이다. <투명인간 최장수>에서 최장수(유오성)는 아내 오소영(채시라)에게 이혼당하고, <돌아와요 순애씨>의 윤일석(윤다훈)은 아내 허순애(심혜진)에게 드라마 시작부터 끝까지 얻어맞으며, <발칙한 여자들>의 정석(정웅인)은 이혼한 송미주(유호정)의 복수극 때문에 모든 걸 잃을 처지다. 물론 이들이 결백한 건 아니다. 정석은 성공을 좇아 조강지처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결혼했고, 윤일석은 한초은(박진희)과 불륜을 저질렀으며, 최장수는 아내와 아이들의 생일이 언제인지조차 잊어버릴 정도로 가정에 소홀했다.

이런 텔레비전 속 아버지들의 이미지는 달라진 아버지와 남편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들은 과거처럼 힘 있는 가장이 아니다. 이제 그들은 한없이 약하고 볼품없는 존재일 뿐이다. 정석은 아내를 배신하고 떠난 대가로 좀더 안락한 생활을 얻었지만 시종일관 현재의 아내 눈치를 보며 살아야 하고, 윤일석은 아내로부터 이혼해달라는 요구를 받는다. 그나마 최장수는 자신을 비난하는 아내에게 짐짓 강한 척하지만, 아내에게 이혼당하고, 알츠하이머 병까지 걸리면서 마치 노숙자처럼 이곳저곳을 전전한다. 반면 아내들은 그런 남편 없이도 잘 살아간다. 송미주는 독하게 공부해서 치과 의사가 되고, 곧 대학에 진학할 아들까지 있으며, 10여 살 젊은 연하 남과 새로운 사랑을 시작한다. 허순애는 교통사고로 한초은과 영혼이 바뀌면서 재벌 2세와 미묘한 관계를 시작하고, 오소영의 옆에는 잘생기고 능력까지 좋은 멋진 남자가 그녀를 불러줄 날만을 기다린다.

이런 남편 혹은 아버지의 위기는 이들 드라마의 주 시청자층인 주부들이 드라마를 통해 원하는 판타지의 변화와 관계가 있다. 지난해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한 작품은 KBS <장밋빛 인생>이었다. 이 작품에서 맹순이(최진실)는 남편의 불륜과 폭력에도 불구하고, 남편에 대한 미련과 자식 걱정 때문에 어떻게든 남편을 붙잡으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올해 주부들에게 인기를 얻고 있는 드라마들은 아내가 먼저 남편을 배제하고, 새로운 사랑을 찾아 나선다. 희생이 미덕이던 과거의 어머니상은 점점 사라지고, 반대로 아버지들에게는 가정에 대한 책임감을 좀더 가질 것을 요구한다.

권위 잃은 채 ‘무한 사랑’ 요구받아

정석은 송미주에게는 권위적이고 폭압적인 모습을 보여주지만 현재의 아내와 딸에게는 지극히 자상하고, 최장수는 늦게나마 자식과 아내의 사랑을 얻으려 노력한다. 그러지 않으면 돌아오는 건 아내와 자식의 냉대뿐이다.
심지어 KBS <소문난 칠공주>의 나양팔(박인환)은 한때 화가 나면 결혼한 큰딸까지 불러 기합을 줬던 권위적인 가장이지만, 결국 그는 이혼한 큰딸, 한 남자를 두고 삼각 관계를 벌이는 ‘쌍둥이’(최근 쌍둥이가 아닌 것으로 밝혀졌지만) 두 딸, 그리고 여고생의 몸으로 대학생 과외 선생의 아이를 덜컥 임신한 막내딸 등의 인생에 전혀 관여하지 못한 채 심장병으로 쓰러진다.

 
그래서 아내 혹은 어머니의 판타지는 그대로 남편 또는 아버지의 악몽이 된다. 과거의 힘은 온데간데없고, 아내와 자식은 언제 나를 떠날지 모른다. MBC <누나>의 윤승주(송윤아)의 아버지(조경환)처럼 돈 많고, 자식들에게 자상하기까지 하다면 모를까.

자식과 아내가 정신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아버지를 벗어나고 있는 지금, 그들은 ‘가장’이라는 이름만 가졌을 뿐 돌아갈 집이 없다. 자식과 아내를 모두 해외로 보내놓고 기러기 아빠 생활을 하는 것이 그들 아닌가. 그 점에서 영화 <괴물>은 좀더 솔직하게 이 시대의 아버지 모습을 보여준다. 여의도 한강 둔치에서 매점을 운영하는 강두(송강호)와 그의 아버지 희봉(변희봉)은 각각 자신의 자식들에게 무능력한 아버지이다. 조금 머리가 모자란 강두는 오히려 딸 현서(고아성)가 돌봐줘야 할 판이고, 희봉은 어떻게든 괴물에 맞서 자식을 보호하려고 하지만 아는 것도, 가진 것도 없는 그는 무력하기만 하다. 그들은 과거처럼 집에서 떵떵거리는 가장도, 사회적인 힘도 가질 수 없는 요즘 아버지의 자화상이다.

그러나 관객들은 오히려 그들의 눈물겨운 부정(父情)에 박수를 보낸다. 이 부정이야말로 지금의 아버지들이 가진 유일한 힘이다. 최장수가 다시 가정에 돌아올 수 있는 것도, 정석이 아내에게는 용서받지 못하지만 그래도 시청자들에게 미움을 덜 받을 수 있는 것 역시 뒤늦게나마 끊임없이 자신의 자식들에게 부정을 쏟으려 하기 때문이다.
물론 아내를 배신해 아내 혼자 아들을 키우게 한 뒤 이제야 아들을 찾는 정석의 죄는 그냥 넘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또 가정 일에 무관심해 오소영에게 가사와 직장 일까지 부담시킨 뒤 자신은 병에 걸린 다음에야 가족에게 속죄, 실질적으로는 결국 오소영이 새로운 인생을 설계하는 대신 끝까지 자신의 병 수발을 들어야 하는 상황으로 만드는 최장수의 모습은 남편이 무슨 잘못을 하든 사과하면 이를 받아들이라는 것 같아 불편하다.

그러나 이런 드라마와 영화 속 아버지의 모습은 이제 아버지라는 단어의 정의 자체가 달라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과거의 아버지는 바깥에서 가족 때문에 숨을 헐떡여도 강한 모습을 유지하는 ‘철인’이어야 했다. 그 대가로 그들은 가정에서 군림할 수 있는 ‘가부장’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가족은 그들이 말 그대로 자식을 사랑하는 ‘아버지’의 역할에만 충실하기를 원한다. 오소영이 이혼을 결심한 것도 최장수가 아버지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못했기 때문이다. 사회와 가정에서의 권력을 점차 빼앗겨가는 그들이 아버지가 아버지임을 증명하는 방법은 <투명인간 최장수>의 유오성처럼 굳은 표정 뒤에 감춰진 그들의 눈물겨운 사랑을 보여주는 것뿐이다. ‘남자답게’ 사는 대신 자식을 사랑하는 아버지답게, 따뜻한 남편답게 살기를 요구받는 이 시대의 아버지들. 그건 그들의 어깨에 올려진 짐을 내려놓는 축복일까, 또 하나의 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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