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처녀들, 세상을 뒤흔들다
  • 김세훈 (경향신문 기자) ()
  • 승인 2006.09.07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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뛰어난 체력·정신력·기술·스피드로 세계여자청소년축구대회 우승

 
“북한, 러시아에서 황금을 캐다.” “무명에서 챔피언으로.” “진흙탕의 기적이다.”…. 북한 여자 청소년대표팀이 지난 9월4일 세계 최강 중국을 무려 5-0으로 꺾고 20세 이하 세계여자청소년축구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을 때 국제축구연맹(FIFA) 홈페이지가 북한의 우승을 표현한 문구들이다.
북한은 그동안 여자 축구대회에서 나름으로 선전해왔지만 국제 경기 경험 부족으로 항상 ‘다크호스’에 그쳤을 뿐 ‘우승 후보’라는 평가를 듣지 못했다. 그랬기에 이번 우승은 전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대사건이었다. 결승전 MVP 김성희는 “북한은 축구에 관한 한 작은 나라가 아니다. 세상을 뒤흔드는 나라다”라며 감격했다.

FIFA가 주최한 국제 대회 우승은 남북한을 통틀어 이번이 처음이다. 이번 북한 여자청소년대표팀의 우승은 세계 무대에서 거둔 아시아 최고 성적이다. 지금까지 가장 좋은 성적은 일본이 1999년 나이지리아에서 열린 20세 이하 세계청소년대회에서 준우승한 것이다. 성인 대표팀 대회 중에는 2002년 한·일월드컵에서 우리나라가 이룬 4위가 최고였다. 여자대표팀 최고 성적은 중국이 1999년 미국 월드컵에서 거둔 준우승이었다.

명실상부한 아시아 최고 성적을 이루어낸 북녀들의 발걸음은 힘찼다. 세계 7위인 북한은 이번 대회에서 세계 2위 독일(2-0 승)을 비롯해 12위 프랑스(2-1 승), 3위 브라질(1-0 승), 5위 중국(5-0 승) 등을 잇따라 눌렀다. 결승까지 여섯 경기에서 18득점 1실점. 경의적인 기록이다.

1945년 설립된 북한축구협회는 옛 소련의 지원을 받아 1954년 아시아축구연맹(AFC), 1958년 FIFA에 각각 가입했다. 첫 국제 대회 출전은 1964년 3월 미얀마에서 열린 대회였다. 북한 축구가 세계를 충격에 빠뜨린 것은 그로부터 2년 후인 1966년 잉글랜드월드컵에서였다. 북한은 우승 후보 이탈리아를 1-0으로 누르고 8강까지 진출했고 8강전에서 에우제비오가 이끄는 포르투갈과 3-5로 선전했다.

그 후 북한 축구는 사회주의 경제가 침체기를 맞자 뒷걸음질쳤고 1993년 미국월드컵 아시아 지역 예선을 끝으로 국제 무대에 발길을 끊었다. 그 후 북한은 지난해 세계청소년(17세 이하) 선수권대회에서 8강까지 진출하며 다시 두각을 나타냈고 북한 여자대표팀은 2001·2003년 아시아선수권과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에서 거푸 정상에 올랐다. 지난 7월 호주에서 열린 여자 아시안컵에서는 일본을 꺾고 3위를 지켜내 내년 중국에서 열릴 여자월드컵 진출권까지 따냈다.

“여자라는 개념 벗고 남자처럼 뛰어라”

최근 가파른 상승세를 타고 있는 북한 축구의 구조를 살펴보면 사뭇 놀랍다. 남자 축구는 1~3급 대회까지 있는데 우선 팀 수가 무척 많다. 북한 최고 수준 선수들이 뛰는 1급 대회 출전 팀은 16개, 2급은 32개, 3급팀은 100개를 육박한다.

1급 대회 출전 팀은 명실상부한 북한 최고의 팀들. 군팀인 4·25를 비롯해 우리나라 경찰청과 비슷한 압록강 체육선수단, 평양시 체육선수단, 기관차 체육선수단, 상업 부분 관리단체의 일종인 인민봉사위원회 등이 대표적이다. 현역 북한 국가대표 선수들도 리한재(산프레체 히로시마)·안영학(부산 아이파크) 등 일부 조총련계 선수를 빼고는 대부분 1급 팀에 속해 있다. 이들이 받는 월급은 북한 돈으로 1백50~2백원 정도. 노동자의 평균 월급이 100원임을 감안하면 사회주의 체제에서는 비교적 좋은 대우를 받는 셈이다. 2급 팀은 유리공장·제강소 등 일반 회사 팀들이 주축을 이룬다.

북한 축구대표팀 감독까지 역임한 뒤 1990년대 중반 귀순한 윤명찬씨는 “체육 꿈나무를 길러내는 체육학원들이 대부분 3급 대회 팀에 속해 있다. 학생들은 체육학원 입학과 함께 6급 선수로 대우를 받으며 매월 약 50원의 돈을 받는다”라고 전했다.

많은 팀 수보다 더욱 놀라운 점은 우리나라 프로축구에서도 시행하지 못하고 있는 승강제가 적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북한의 각급 대회 팀은 매년 팀당 40경기 정도를 치러 하급 대회 최상위 2개 팀이 상급 대회로 올라가고 상급 대회 최하위 2개 팀은 하급 리그로 떨어진다. 승강제는 전체적인 리그 수준 업그레이드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제도로 현재 유럽 대부분 국가들이 모두 시행하고 있다.

 
여자축구팀 수는 10~12개 정도로 남자에 비하면 많이 부족하다. 하지만 북한 정권은 남자 축구보다 여자 축구에 더 많은 신경을 쓰고 있다. 윤명찬씨는 “북한은 여자 축구가 남자 축구보다 세계를 정복할 가능성이 더욱 높다고 판단하고 여자 축구를 집중 육성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윤씨는 이어 “북한 정권은 여자대표팀에게 남성화를 강하게 주문하고 있다. 코칭스태프는 선수들에게 ‘여자라는 개념을 벗어던지고 남자처럼 뛰라’면서 스파르타식 훈련을 시키고 있다”라고 회고했다.

북한 축구의 스타일을 살펴보면 남녀 모두 사실 세련됨과는 거리가 멀다. 북한 지도자들이 세계축구의 흐름을 따르기보다는 자신들이 계속해온 전통적인 지도 방식을 고집하는 데다 대표팀의 국제 대회 경험이 부족해 세계 축구 흐름에 둔감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북한 축구는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진 점이 없다. 강한 체력을 바탕으로 하는 많이 뛰는 축구, 불굴의 정신력을 앞세운 거친 플레이, 악착같은 대인방어 등이 특징이다. 다만 최근 10년 가까이 국제 무대에 얼굴을 내밀면서 기술적으로 다소 향상되었다는 평가다.

지난 4월 아시아여자청소년(20세 이하) 선수권 조별 리그에서 북한에 1-2로 패했던 한국 여자 청소년대표팀 백종철 감독은 북한 축구에 대해 “체력과 투지뿐 아니라 기술과 스피드도 뛰어났다. 창의력이 조금 떨어진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분위기를 타면 굉장한 변수로 작용할 팀이라는 인상을 받았다”라고 호평했다. 한국 여자축구대표팀 안종관 감독도 “북한 선수들은 스피드와 투쟁심이 좋고 압박이 상당히 뛰어나다. 고유의 훈련 방법이 가미되면서 정신적으로도 강하게 무장되어 있는 것 같다”라고 평가했다.

최근 들어 북한 축구는 적극적으로 새로운 돌파구를 찾고 있는 모양새다. 세계 축구판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려면 국제 대회 경험을 많이 쌓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인식 전환에서 비롯된 조처들이다. 북한은 중국 등 일부 국가에 한정되었던 예전과는 달리 가능한한 다양한 국가와 많은 A매치를 치르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다.

최근에는 최명호(18)·이관명(21) 등 어린 선수를 러시아 리그에 진출시켜 경험을 쌓게 했다. 대한축구협회에 따르면 북한축구협회가 최근 AFC에 북한 인사들을 파견하면서 행정력 강화까지 신경을 쓰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윤명찬씨는 “지금까지는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인한 국제 대회 경험 부족과 열악한 훈련 여건이 북한 축구의 취약점이었다. 북한이 우물 안 개구리 같았지만 앞으로 많은 A매치와 풍부한 해외 경험을 쌓는다면 지금보다 훨씬 좋은 경기력을 보여줄 것이다”라고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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