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이 ‘공안 정국’ 주도하니…
  • 류정민(미디어오늘 기자) ()
  • 승인 2006.11.03 15:4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조·중·동 등 보수 매체, ‘386 간첩단 사건’으로 규정…오보·억지 주장도
 
정치권이 2006년형 ‘간첩단(?) 사건’으로 어수선하다. 공안 당국은 1980년대 학생운동을 한 장민호씨(44)와 민주노동당 전 현직 간부 등 다섯 명을 국가보안법 위반(회합 및 통신 등) 혐의로 구속했다. 장씨 등이 ‘일심회’라는 조직을 만들어 이적 행위를 했다는 것이다.

일심회 사건은 과거의 공안 사건과는 다른 독특한 성격을 띠고 있다. 공안 당국이 사건 당사자의 이적 행위를 입증할 물증을 공개하고 행적과 검거 과정을 일괄 설명하는 방식이 아니었다. 경향신문은 11월2일 “‘이상한 간첩 수사’라는 1면 기사를 통해 ‘대공 수사는 철저히 비공개로, 극도의 보안 속에 진행되는 것이 관행이다. 그러나 이번 사건은 수사 초기부터 외부에 공개됐다. ‘선 공개, 후 수사’ 식이다”라고 지적했다.

이번 사건은 조선일보가 10월26일자 1면에 ‘386 운동권 출신 간첩 혐의 3명 조사’라는 기사를 내보면서 공론화되었다. 그러나 언론의 속보 경쟁이 이어지면서 ‘오보’가 속출했다. 공안 당국에 체포된 사람은 민노당 사무부총장이었으나, 헤럴드경제는 당 사무총장이 체포되었다는 기사를 내보냈다. 또 민노당 중앙위원 출신 이 아무개씨가 월북을 시도해 3년형을 선고받았다는 보도를 여러 언론이 내보냈으나 사실 무근인 것으로 드러났다.

‘간첩’이라는 단어가 갖는 상징적 의미를 감안할 때 언론 보도는 신중에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다. 북한 핵실험 이후 안보 불안이 가중되고 있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언론의 무분별한 속보 경쟁은 국민의 혼란과 불안을 키울 수 있기 때문이다. 박용진 민주노동당 대변인은 “수사가 아직 진행 중인데도 확정되지 않은 혐의 사실을 국정원이 유포하고, 언론이 증폭시키는 것에 대해서 심각한 우려와 유감을 표명한다”라고 말했다.
일심회 관계자의 이적 행위 여부는 공안 당국이 수사를해서 밝혀질 일이다. 그러나 언론 보도는 몇 발짝 앞서가 있다. 일부 언론은 사실상 ‘간첩단’으로 규정하며 ‘386 간첩단’이라는 용어까지 사용하고 있다. 조선일보는 지면 위에 ‘386 간첩’이라는 문패를 달고 관련 기사를 내보냈다.

문화일보는 10월27일 노정권 ‘친북 기조’와 ‘386 간첩단’이라는 사설을 실었고, 동아일보는 10월28일 ‘386 간첩단’ 일심회, 빙산의 일각 아닌가라는 사설을 내보냈다. 중앙일보는 10월31일 ‘국정원, 386 간첩 사건 흔들림 없이 파헤쳐라’라는 사설을 실었다.
그러나 검찰은 간첩단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데 신중을 기하고 있다. 이번 사건의 핵심 총책인 장씨 등에게 적용된 혐의는 국보법 8조(회합?·통신) 위반이다. 공안 당국은 간첩죄로 처벌하기 위해서는 국보법 4조(목적수행) 1항에 해당하는 범죄를 저질러야 한다는 견해이다.

반국가 단체 구성원 또는 지령을 받은 자가 형법 98조에 규정된 범죄(간첩죄)를 저지르거나 국가 기밀을 탐지 ·수집?·누설·?전달하거나 중개해야 4조 1항을 적용할 수 있다. 장씨는 국보법 4조 1항을 위반했을 가능성이 있지만 다른 이들은 불투명한 상황이다.
따라서 언론에서도 신중한 접근을 당부하는 목소리가 적지 않다. 경향신문은 10월30일 사설에서 ‘사건의 실체나 구체적인 혐의는 확인된 바가 거의 없는 실정이다’라며 ‘보수 언론들의 요란한 여론 몰이에도 불구하고 수사 당국이 ‘간첩단 사건’이라고 규정하지 않고 있는 까닭도 바로 이 때문이다‘라고 지적했다. 국민일보도 같은 날 사설에서 ‘섣불리 ‘간첩단 사건’으로 단정하거나 ‘조작’으로 몰아가서는 위험하다. 이는 수사 간섭으로, 진실을 가리려는 행위다’라고 비판했다.

조선일보의 김승규 국정원장 단독 인터뷰도 논란의 대상이다. 조선일보는 10월30일 3면에 ‘후임 국정원장에 코드 인사는 절대 안 된다’라는 제목으로 김승규 국정원장을 단독으로 인터뷰한 기사를 실었다. 조선일보 기자가 김원장과 교회에서 만나 나눈 얘기를 인터뷰 형식으로 썼다고 하지만, 국가정보를 책임지는 국정원장의 인터뷰라는 점에서 파장이 적지 않았다.

 
국정원은 파문이 확산되자 공식 해명 자료를 발표했다. 김원장은 “일부 언론에서 이를(사의 배경) 달리 추측하거나 확대 해석하고 있어 안타깝다”라고 해명했다. 그러나 정보기관장의 행동으로서 부적절했다는 걱정의 목소리도 적지 않았다. 한겨레는 10월31일 ‘김승규 국정원장의 어처구니없는 처신’이라는 사설에서 ‘정보기관의 수장은 스스로 엄중한 경호망을 거두지 않는 한 기자가 원한다고 접근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라며 ‘현직 원장이 ‘언론 플레이’로 비칠 행위를 하는 것은 설령 정권 말기 현상이라고 해도 이해하기 어렵다’라고 지적했다.

“보수 언론, 내년 대선 위해 공안 정국 조성”

김원장을 대하는 보수 언론의 태도도 1백80° 달라졌다. 북한 핵실험 이후에는 경질 대상이라고 거론했으나, 이번 사건이 불거지면서는 국정원장 역할을 훌륭히 수행한 인물로 부각시켰다. 동아일보는 10월31일 사설에서 ‘애국심으로 뭉쳐 자유민주주의를 지켜내야 한다. 우리는 국정원을 믿고 싶다’라고 주장했다.
일부 언론은 김원장의 교체와 일심회 사건 수사를 연계 짓기도 했다. 수사에 적극성을 보이는 김원장을 교체할 경우 수사에 차질을 줄 수 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진짜 속내는 보수 언론의 입맛에 맞는 국정원장이 지명되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는 분석도 적지 않다. 청와대는 11월1일 김만복 국정원 제1차장을 후임 국정원장으로 내정했다. 조선일보는 10월31일 ‘후임 국정원장 간첩 사건 확실히 매듭지을 인물로’라는 사설을 실었다.

일심회 파문이 쟁점으로 부각된 배경도 관심거리이다. 중앙일보는 10월31일 ‘김승규 국정원장이 결단’이라는 기사에서 “주변에선 북한의 핵실험(10월9일) 이후 전개되고 있는 상황을 우려, 경각심을 불어넣기 위해서였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라고 분석했다.
국정원 내부 강·온파 간의 알력 다툼에 의혹의 시선을 보내는 이들도 있다. 국민의정부 이후 외면받고 있는 ‘공안 라인’의 조직 보호 본능과 보수 언론의 이해 요구가 맞아떨어져 이번 사건이 불거졌다는 것이다.

보수 언론들은 국민의 안보 불안 심리를 파고들며 ‘신 공안 정국’을 주도하고 있다. 조선일보는 11월2일 ‘청와대 386은 안전한가’라는 사설에서 ‘권력의 중심부, 즉 청와대는 간첩의 촉수로부터 안전하느냐는 것이다. 이번 간첩 수사의 종착역은 결국 이 부분이 될 수밖에 없다’라고 주장했다. 보수 언론들이 청와대와 386 정치인, 재야 시민단체를 향해 공격의 수위를 높이는 것은 내년 대통령 선거를 겨냥한 행보라는 분석도 있다. 즉 국민의 안보 불안을 고조시켜 보수층을 결집시키고 현 집권 세력의 재기 노력(?)에도 찬물을 끼얹기 위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2006년 11월 대한민국의 시계는 1970~1980년대로 되돌아간 느낌이다. 한겨레는 11월2일 ‘쉿, 그들이 움직인다’는 제목의 곽병찬 칼럼을 통해 “아무리 시대에 뒤떨어져도 언론계 정치권엔 안보 장사꾼이 득실대고, 세간엔 맹목적인 공포와 증오가 만연해 있다. 게다가 이들의 양심은 ‘아니면 말고’로 다져졌으니, 두려울 게 없다. 조심해야 한다”라고 지적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