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민호와 동지들은 두 얼굴의 사나인가
  • 고제규 기자 (unjusa@sisapress.com)
  • 승인 2006.11.03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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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민호 사건’ 주역인 장민호씨는 과연 간첩인지, 장씨의 혐의를 입증할 증거는 충분한지, 공안 당국이 1년간 미행·감청한 결과는 무엇인지 추적했다.

 
지난 10월26일 오전 8시, 민주노동당 최기영 사무부총장은 집을 나섰다. 출근길에 어린이집에 맡기려고 세 살 된 아이를 안고 있었다. 그의 아내도 배웅하기 위해 함께 나섰다. 대문을 나서던 부인은 맞은편에 주차된 검은색 승용차를 발견했다.

부인은 “낯선 차가 있네”라고 말했다. 최씨가 “그러네”라는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차 문이 열렸다. 그리고 검은 양복을 입은 이들이 다가와 애를 안고 있는 최씨의 양팔을 붙잡았다. 동시에 집 양편의 골목에서 스무 명이 몰려와 그를 둘러쌌다. 국정원 직원이라며 신분을 밝힌 이들은 아이가 보는 앞에서 수갑을 채우려 했다. 최씨는 “체포 영장이 있느냐”라며 거칠게 항의했다. 국정원 직원들은 그를 승용차에 태우고 수갑을 채웠다. 아이를 넘겨받은 아내에게 국정원 직원은 압수 수색 영장을 보여주었다. 아홉 명이 두 시간 가까이 최씨의 집을 압수 수색했다.

국정원으로 이송된 최씨는 묵비권을 행사했다. 첫날부터 단식을 했다. 그는 법정에서 진실을 가리겠다며 버텼다. 그러나 체포 순간부터 시작된 여론 재판은 순식간에 끝났다. 그는 ‘고정 간첩에 포섭된 공범’으로 언론에 이름이 오르내렸다. 이정훈·손정목·이진강 씨도 마찬가지다.

이번 ‘장민호 사건’의 실체를 두고 논란이 확산되고 있다(<시사저널>은 예단을 막기 위해 장민호 사건이라 이름 붙였다. 이하 장민호 사건). 주범 격인 장씨의 실체에 따라 사건의 파장이 결정 날 것으로 보인다.

지난 10월24일 검거된 장민호씨는 미국 시민권자이다. 지난 1993년 1월27일 미국 시민권을 얻었고 1999년 12월20일 한국 국적을 포기했다. 그의 미국 이름은 마이클 장이다. 공안 당국에 따르면, 그는 용산고를 졸업하고 1981년 성균관대 국문학과에 입학했다. ‘은행나무 (까치) 둥지’를 뜻하는 행소문학회에 가입해 활동했다. 이듬해 4월 학내 시위에 참가했다가 경찰서에 연행되었다. 곧바로 훈방되었지만 부모로부터 미국 유학의 압력을 받았다.

그는 1982년 9월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캘리포니아 주립대에 입학했지만 미국의 그라나다 침공에 반대하는 반전운동을 하다가 검거되어 대학에서 제적을 당했다. 이때 5·18 마지막 수배자였던 윤한봉씨가 만든 재미 한국청년연합(한청)이 그의 석방을 도왔다. 이후 그는 한청의 미주 지역 학습부장을 맡기도 했다. 1986~1987년 그는 미주 중앙일보 샌프란시스코 지사 기자를 지냈다. 당시 미주 중앙일보 샌프란시스코 편집국장과 지사장은 열린우리당 김한길 의원이었다. 지난 1991년 김의원은 장민호씨의 주례를 섰다. 김한길 의원측은 “지난 인연 때문에 주례를 선 것일 뿐, 그동안 교류는 없었다”라고 말했다.

잘나가는 ‘IT 고수’가 왜 북한에 갔을까

1989년 캘리포니아 코스트 대학을 졸업한 그는 곧바로 미군에 입대했다. 주한 미군에 자원해 대전과 용산 미군기지에서 물류병으로 근무하다 1993년 4월 미군을 제대했다. 이듬해 통상산업부 산하 한국정보기술연구원 국제협력 과장으로 근무했고, LG-EDS 마케팅 과장(1995~1998년), 미국 실리콘밸리에 있는 정보통신부 산하 해외 소프트웨어지원센터 부장(1998~1999년)을 역임했다. 장씨는 1999년 삼보컴퓨터 계열사인 나래이동통신(나래앤컴퍼니)으로부터 출자를 받아 3D 게임사인 나래디지탈엔터테인먼트를 설립해 대표이사를 맡았고, 스카이갬티브이(케이디씨미디어로 명칭 변경), 미디어윌테크놀로지 대표를 역임했다.

 
드러난 얼굴만 보면 그는 잘나가는 IT 업계의 386이었다. 그는 미국 최대 애니메이션 업체 FI 사와 손잡고 자본금 3백만 달러의 NFI 사를 설립하기도 했으며, 삼성에버랜드· MBC프로덕션과 손을 잡고 애니메이션 <꾸러기 더키> 제작을 추진했다. 수도권 비지상파 DMB 사업에도 뛰어들어 ‘DMB 플러스’ 컨소시엄을 만들어 단장을 맡기도 했다. 그를 알고 있는, IT 관련 박사학위 논문을 쓴 한 지인은 “한마디로 IT 고수다. 내가 배울 정도로 관련 지식이 풍부했고, 특히 새로운 기술 정보에 빨랐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드러나지 않은 또 다른 얼굴이 있었다. 공안 당국에 따르면 그는 적어도 두 차례 이상 북한을 드나들었다. 1987년 그는 친북 재미교포 김 아무개씨로부터 <조선 전사>등 북한 원전을 건네받아 학습했다. 임수경씨 방북 등 통일운동이 한창 고조되던 1989년 그는 김씨로부터 방북 제의를 받았다. 당시 대한민국 국적을 가지고 있어, 방북용 북한 여권을 따로 만들었고, 그는 미국->스위스->체코->모스크바를 거쳐 평양에 도착했다. 공안당국은 이때 그가 모스 부호 송·수신 방법 등 무선통신 교육을 받았고, 1만 달러를 받은 것으로 보고 있다.

공안 당국에 따르면, 미국 국적을 얻은 직후인 1993년 9월에도 그는 홍콩을 거쳐 방북했다. 그는 첫 방북 때보다 구체적인 무선통신 교육을 받았다. 단파 라디오를 통한 암호 수신과 책자를 이용한 해독법이다. 매월 10일과 25일 새벽 1시에 단파 라디오를 이용해 암호를 수신하고 이를 숫자로 바꾼 뒤 톨스토이의 고전 <부활>을 이용해 쪽수와 행렬의 특정 글자로 암호를 해독하는 식이다. 이때 그는 최근까지도 유지된 보고 라인인 유기순 북한 대외연락부 부부장과 처음으로 만났고, 4천 달러도 받은 것으로 공안 당국은 파악하고 있다. 공안 당국은 그가 조선노동당에 가입한 것도 이맘때인 것으로 보고 있다. 체류 마지막 날 그는 조선노동당 가입서를 냈고, 한국에 돌아와 단파 라디오를 통해 입당을 확인했다는 것이다.

공안 당국은 그가 중국 베이징 인근 북한 공작원의 비밀 아지트인 ‘동욱화원 3089’를 자주 드나들며, 유기순 부부장 등 북한측 인사를 계속 만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러면서 접선 방식도 바꾸었다. 주로 단파 라디오를 이용한 수신과, 홍콩에 있는 사서함을 이용한 문서 보고 방식에서 e메일을 통한 송·수신으로 바꾼 것이다. 공안 당국은 그의 집과 사무실에서 인터넷 보고용 CD와 e메일 통신 연락법이 담긴 USB를 압수했다. 또 외국에 계정을 둔 sOOO-OOOO.net, fOOOOOOO.com, aOOOOOOOO.edu 등 장씨가 대북 송·수신용으로 사용한 세 개 e메일의 내용을 다수 확보했다. 이 e메일을 통해 월·화요일에는 대북 보고, 금·토요일에는 대북 수신이 이루어졌다. 이렇게 주고받은 e메일에 손정목·이정훈·최기영·이진강 씨 등과 관련한 내용이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장민호씨는 사건 초기 알려진 것과 달리 사람 만나기를 즐겨 하지 않았다. 사업 관계로 인연을 맺은 한 지인은 “언론에서 너른발이라고 하는데 그렇지 않다. 그래서 사업 관계 외에 만난 사람들이 주로 동문 관계인 용산고와 성균관대 출신들이다”라고 말했다. 실제로 장민호 사건에 연루된 손정목·이진강 씨를 만난 것도 용산고 동문 모임에서다.

1996년 장씨는 용산고 모임에서 1년 후배인 손정목씨를 만났다. 손씨는 연세대 82학번으로 총학생회 학술부장을 역임했다. 노동운동을 하다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된 적이 있다. 1990년 운동을 정리하고, 컴퓨터 판매업체ㅇ사를 차려 운영하기도 했다.

 
공안 당국은 1997년 경복궁 근처에서 장민호씨와 손씨가 만나 ‘일심회’라는 조직을 결성해, 장민호가 조직을 총괄하고 손정목은 남한 정세를 파악하기로 한 것으로 보고 있다. 손씨를 공안 당국은 일심회의 ‘넘버 2’로 보고 있는 셈이다.

두 사람은 사업도 함께 했다. 1999년 손씨는 장씨가 설립한 나래디지탈엔터테인먼트에 이사로 등재되었고, 서류상이지만 지금도 이 회사 대표이사로 되어 있다. 2004년부터 손씨는 ㅇ학원 목동 분원을 운영하고 있다.

이진강씨, 1988년 운동권 떠나

장씨가 일심회원으로 접촉한 두 번째 인물은 용산고 동문인 이진강씨다. 이씨는 고려대 83학번이다. 대학 때 노무현 대통령의 최측근인 ㅇ씨와 애국학생회의를 만들어 활동했다. 이 사건으로 구속되어 1988년 출소한 뒤 운동을 정리하고 건강식품 사업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사업이 실패하면서 노대통령의 측근인 ㅇ씨뿐 아니라 운동을 함께 했던 이들과도 멀어졌다고 지인들은 말한다. 공안 당국은 일심회에서 이진강씨의 역할을 시민단체 조직책으로 보고 있다. 그래서 환경단체 간부인 ㄱ씨 이름이 장민호 사건 초기부터 공안 당국 주변에서 흘러나왔다. 이씨와 같은 학교 동기인 김 아무개씨는 “진강이는 일찌감치 운동을 정리한 친구다. 거론되는 시민단체 간부는 학교 다닐 때부터 친한 사이일 뿐이다. 아마 진강이가 유일하게 아는 시민단체 간부일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씨 역시 손정목씨처럼 장민호씨와 사업으로 묶였다. 장씨가 사장으로 있던 회사의 본부장을 역임했다.

지난 2001년 6월 장민호씨는 용산고 동문인 한 정치인로부터 소개받은 이정훈씨를 일심회 조직원으로 삼았다. 이씨는 고려대 82학번으로 삼민 투위원장을 역임했다. 영국 유학을 다녀온 뒤 2001년부터 ㅅ영어학원을 운영하고 있다. 공안 당국은 이씨가 민주노동당 쪽으로 조직 확대를 꾀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씨는 민노당 중앙위원과 서울시당 대의원을 역임했다.

민노당 최기영 사무부총장은 장씨와 직접 연결되지 않았다. 공안 당국은 손정목씨가 최씨를 관리한 것으로 보고 있다. 최씨는 한국외대 85학번으로 전대협 사무국장을 지냈다. 공안 당국은 1년 전부터 장민호 사건을 추적한 것으로 보인다. 지난 1월부터 집중적으로 캐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전화를 감청했고, 주요 활동 모습을 사진으로 찍었다.

지난 1월29일 오후 1시10분발 비행기로 장민호씨가 중국으로 출국하자 국정원은 뒤를 밟았다. 1월29일 저녁 장씨가 베이징 장성호텔에서 김OO씨(OO무역 북경지사장), 또 다른 김OO씨를 만나는 장면과, 이들과 함께 동욱화원 3089로 이동하는 모습을 사진 찍었다. 공안 당국은 장씨가 만난 일행을 기업가로 위장한 북한의 ‘블랙’ 요원으로 파악하고 있다.

국정원은 지난 3월2일 오전 10시40분 비행기로 중국으로 출국한 이정훈씨 역시 미행했다. 장성호텔에서 장민호씨가 만난 동일인인 김OO 사장과 그가 만나는 장면을 사진으로 찍었고, 또한 이들이 함께 타고 동욱화원 3089까지 이동한 차량의 번호(京OOOOOO)와 차량 소유주까지 파악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6월24일에는 손정목씨가 동욱화원에 다녀온 것을 공안 당국이 파악했다. 오후 1시 40분 비행기로 출발한 손씨를 국정원이 국내에서부터 뒤를 밟아 사진 찍었다. 베이징 장성호텔에서 김OO, 김OO 등과 만나 동욱화원 3089로 이동한 장면을 포착했다. 공안 당국은 이때 동욱화원까지 타고 간 차량(京OOOOOO)의 소유자 역시 기업가로 위장한 북한의 블랙 요원인 강OO로 파악하고 있다.

공안당국은 또한 지난 1월부터 장민호·이정훈 씨 등을 상대로 집중적으로 전화를 감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감청으로 이들의 활동을 파악하고 있었기에, 중국행을 모두 미행할 수 있었다.

“장씨 외에는 간첩 혐의 두기 어려울 듯”

공안 당국은 이진강씨와 최기영씨도 베이징의 동욱화원을 방문한 것으로 의심하고 있지만, 이와 관련한 직접 증거(사진)를 확보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최기영씨를 면회한 한 지인은 “(사진) 자료를 제시하지 않고 주로 이름만 대며 심문을 한다”라고 말했다.

11월3일 현재 장민호 사건에 연루된 이들은 모두 묵비권을 행사하고 있다. 장민호씨만 지난 10월24일 검거되자 다음날까지 진술에 응했다. 이후 장씨도 묵비권을 행사하고 있다. 경찰서와 국정원을 오가며 출퇴근 조사를 받고 있는 이정훈·손정목 씨 등은 면회를 온 지인들에게 “사업차 중국에 간 것은 맞다. 그러나 수많은 사람을 만났는데, 북한 공작원인지 누군지 어떻게 알겠느냐”라고 말했다.

하지만 공안 당국은 주범 격인 장민호씨의 압수물과 사진 자료 때문에 자신감을 나타내고 있다. 조사도 장씨에게만 집중하고 있다. 공안 당국은 장씨가 e메일을 통해 주고받은 대북 보고·수신 문건, USB에 남아 있는 보고문 등 40여 건을 확보해 집중적으로 해독했다.

공안 당국 주변에서 흘러나오는 해독문 내용은 이렇다. ‘이정훈과 손정목에게 조국이 민족 통일상을 수여했다(2005년 말)’ ‘이부장(이정훈) 무사 입남, 방문 과정에 대해 이부장과 총화(2006년 3월11일)’ ‘손사장(손정목) 무사 입남(2006년 7월17일)’ ‘민회사(민주노동당)에 대한 영도 체계 완성’ ‘이부장(이정훈)과 협의해 통전투쟁(통일전선 투쟁)에 나서자’ ‘(민회사) 상층 사업 전개’ ‘민회사 입장을 우리의 요구에 맞게 관철시킨다’ 등등.

국정원은 이렇게 증거가 뚜렷하다며 간첩 혐의 입증을 자신하는 분위기이다. 그러나 국정원과 검찰 사이에 온도 차가 생기고 있다. 검찰 주변에서는 주범 격인 장민호씨를 빼놓고 ‘간첩 혐의’를 두기 어렵다는 말까지 흘러나왔다. 이 사건은 다른 공안 사건과 달리 수사 초기부터 공론화되면서 역풍까지 불어 공안 당국을 더욱 곤혹스럽게 하고 있다. 지난 11월2일 장민호 사건의 변호인단은 이 사건을 ‘간첩단’으로 규정한 김승규 국정원장을 상대로 명예 훼손 및 국정원법 위반 등으로 고소했다. 또한 김원장과 국가를 상대로 피의자 한 명마다 2천만원씩 모두 1억원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냈다.

공동 변호인단에 법무법인 덕수·창조·정평 등 여덟 법률사무소가 합류하면서, 장민호 사건을 둘러싼 치열한 법정 공방이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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