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배만 불리는 ‘안하무인 은행’
  • 안은주 기자 (anjoo@sisapress.com)
  • 승인 2006.12.04 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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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적자금 덕에 수십 배 성장했으나 국민 ‘무시’…주주·임직원만 큰 이익 봐
 
외환위기가 시작되었던 9년 전 이맘 때, 한국 은행산업은 바람 앞의 등불이었다. 너나 할 것 없이 은행이란 은행은 거의 다 망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러나 이제 한국의 은행은 확 달라졌다. 은행들은 위기를 극복했을 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기업으로 거듭났다. 특히 국민․우리․신한․농협 등은 세계 100대 은행에 진입할 정도로 성장했다.

주요 은행들의 시가총액은 9년 전에 비해 10~30배 이상 불어났다. 국민은행은 시가총액이 9년 만에 30배, 신한금융은 18배, 우리금융은 25배, 외환은행은 11배, 하나금융은 33배나 올랐다(표1 참조). 물론 대부분 여러 은행이 합병한 탓도 있지만, 그만큼 수익성과 성장성이 높아졌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 은행들의 총 자산 역시 8년 동안 2~5배가량 늘었다(표2 참조). 국민은행만 하더라도 1997년 44조2천여 억원이던 자산이 2005년 1백97조여 원으로 4배가량 증가했다. 그야말로 ‘상전벽해’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성장의 그늘일까. 거대 기업으로 탈바꿈한 은행들은 오늘날 부동산 값을 폭등시킨 주범으로 몰리는가 하면, 장삿속만 챙긴다는 비난을 피하지 못하고 있다. 정부는 부동산 가격이 폭등한 한 원인이 은행들이 경쟁적으로 주택담보대출을 늘린 데 있다고 보고, 시중은행의 주택담보대출과 외화 대출 실태를 조사하며 은행을 압박하고 있다. 은행들이 담보 비율을 높여가며 마구잡이로 대출해주는 바람에 부동산 광풍이 번졌고, 외화 대출을 통해 해외 부동산 투기까지 부채질하고 있다고 의심하고 있는 것이다.

은행의 장삿속에 일방적으로 휘둘렸다고 보는 소비자들은 은행을 공개적으로 성토하기 시작했다.
인터넷 여행 사업을 하는 윤용인씨(40․노매드 대표)는 최근 한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 ‘은행도 흥정이 되나요’라는 글을 올려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는 ‘금융회사들은 서민 처지에 서기보다는 실적 올리기에 여념이 없다. 이렇다 보니 서민 살림살이에 희망을 주기는커녕 주름살만 더 지우고 있다는 비난을 받는다. 몇 년 전부터 은행은 점점 커지고, 객장도 무슨 궁전처럼 화려해졌지만 돈 보낼 때, 돈 찾을 때 등등 은행이 야금야금 내 지갑을 털어가고 있다는 의혹이 들었다’라고 은행에 대한 불만을 털어놓았다. 윤씨는 주거래 은행으로부터 쓰디쓴 배신감을 맛본 뒤, 신뢰와 신용을 최우선으로 해야 하는 금융기관이 원칙도 없이 소비자를 우롱하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어 인터넷에 글을 올렸다고 했다.

윤용인씨는 한 대형 은행의 ‘우수 고객’이었다. 그러나 그 은행은 우수 고객인 그에게조차 경쟁 은행보다 비싼 대출 이율을 받았다. ‘시장 조사’를 하지 않은 그의 잘못도 있지만, 주거래 은행이니 ‘알아서’ 좋은 조건으로 서비스해줄 것이라 믿었던 탓이다. 그러나 윤씨는 뒤늦게 다른 은행에 갔다가 자신이 쓸데없이 많은 이자를 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다른 은행에서 대출받는 것보다 이자를 월 10만원이나 더 내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을 확인하자마자 그는 거래 은행에 따졌다. 은행의 반응은 더 황당했다. 전화로 따지자마자 ‘고객이 특별히 요청했으니 상부에 보고해서 대출 이자를 깎아주겠다’는 답이 돌아왔다. 윤씨는 “전화 한 통화로 대출 이자를 깎을 수 있다니…. 은행도 흥정이 된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모르는 사람은 당해보라는 심보가 아닌가”라고 물었다.

 
주부 박진미씨(36․경기 용인시)도 윤씨와 비슷한 경험이 있다. 은행에서 주택담보 대출을 빌렸던 박씨는 약정 기간보다 일찍 대출 원금을 상환하게 되었다. 그런데 은행에서는 약정 기간보다 대출금을 일찍 상환하려면 수수료를 1% 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2천만원을 갚으려면 20만원을 중도 상환 수수료로 내라는 주장이었다. 주택담보대출액이 많아 경제가 위험하다는 뉴스가 흘러나오면 대출 금리를 올리기 바쁜 은행이 대출 부담을 줄이기 위해 중도 상환하는 고객에게는 수수료까지 물리는 것이 마뜩치 않아서라도 박씨는 수수료를 내고 싶지 않았다.

박씨는 ‘내 빚 빨리 갚겠다는데 무슨 수수료를 받느냐’고 은행에 따졌다. 승강이 끝에 박씨는 중도 상환 수수료를 내지 않고 대출금을 갚았다. 박진미씨는 “은행이 오늘날 부자가 된 것이 누구 덕인가. 외환위기 때 국민의 피 같은 돈으로 공적자금을 쏟아 부어 살아나지 않았는가. 그런데 이제 와서 장삿속에만 빠져 국민의 주머니를 털어 제 배 채우기에만 급급하다”라고 비난했다.

은행 수수료, 6년간 무려 35% 올라

이런 불만에 공감하지 않는 소비자가 드물 정도로 은행의 각종 수수료는 원성의 대상이다. ‘은행은 수수료의 귀재’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과거에 비해 수수료가 대폭 올랐고, 종류도 많아졌다. 한국은행이 올 봄 발표한 금융서비스 물가지수에 따르면 송금과 인터넷 뱅킹, ATM 서비스에 대한 은행 수수료는 지난 2000년에 비해 무려 35%나 올랐다. 또 돈을 보내거나 찾을 때뿐 아니라 통장을 새로 만들 때나 거래 확인서를 발급받을 때조차 수수료를 요구하는 것이 은행업계의 관례가 되었다. 지난 9월 국민고충처리위원회가 ‘은행이 담보대출을 하면서 근저당 비용을 고객에게 부담토록 하는 것은 불공정하다’며 공정위에 표준 약관을 개정하도록 제도 개선을 권고한 것도 은행들의 ‘수수료 횡포’에 대한 소비자들의 원성이 턱밑까지 차올랐기 때문이다.

 
물론 은행업계에서는, 금융 선진국에 비하면 국내 은행들의 수수료는 비싼 편이 아니라고 항변한다. 선진국 은행의 비이자 수익이 30~40% 선인데, 국내 은행은 20~30%여서 수수료가 비싼 편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오랫동안 ‘공짜’에 익숙했던 소비자로서는 각종 수수료가 못마땅할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박진미씨 말대로 국내 은행들은 국민 덕에 살아났고, 그 빚이 아직 남아 있다. 죽어가던 은행을 회생시키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했던 것은 국민의 혈세로 조성된 공적자금이었고, 공적자금은 1997년부터 은행권에 86조9천억원가량 투입되었다. 이 돈은 출연, 출자, 부실채권 정리 등에 투입되어 은행들이 살아날 수 있도록 기여했다. 이때 투입된 돈 가운데 지난 6월까지 회수한 자금은 52조원뿐이다. 9년 동안 60%만 회수한 것이다(표 참조).

회수하지 못한 34조원 가운데는 이미 손실 처리가 되어 영원히 회수할 수 없는 돈도 적지 않다. 공적자금관리위원회 이문규 사무관은 “공적자금을 100% 회수할 가능성은 크지 않다. 출자 형태로 들어간 공적자금은 회수 가능성이 크지만 감자가 이뤄진 것도 있어 완전히 회수하기는 어렵고, 부실 기업에 현금으로 들어간 돈은 회수하기가 더 어렵다고 봐야 한다”라고 말했다. 특히 합병과 민영화 과정을 통해 정부 지분이 모두 매각된 은행에서 공적자금을 회수할 길은 거의 없다.

금융 전문가들은 오늘날 은행이 경쟁력을 갖추게 된 데에는 이 공적자금의 역할이 컸다고 분석한다. 한국은행 금융경제연구원 정형권 과장(금융연구실)은 “외환위기 때 공적자금을 투입해 응급 처치를 하고, 은행산업의 경쟁력 제고를 위한 다양한 법과 제도를 정비한 덕에 오늘날 은행이 탄탄해졌다”라고 분석했다. 공적자금을 투입해 금융 시스템을 정비할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고, 그 뒤 소유․지배 구조를 ‘관치(官治(덧말:관치))’에서 ‘자율 경영’으로 바꾸고, 시장 규율을 엄격하게 한 덕에 은행들이 경쟁력을 확보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 외국 자본을 유치하고, 대규모 합병매수를 통해 시장을 집중화하면서 은행들은 덩지를 더 불릴 수 있었다. 공적자금이 투입된 은행을 합병을 통해 민영화한 결과 한국의 은행 산업은 소수의 대형 은행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1997년 26개까지 늘어났던 은행은 2006년 10월 현재 13개로 대폭 줄었다. 총여신 기준으로 1996년 31%에 머물던 상위 세 개 은행의 시장 점유율은 2006년 10월 현재 약 61%로 추산되는 등 시장 집중도도 상당히 높아졌다.

대형화하고 시장 집중도가 높아지면서 은행들의 수익은 당연히 나아졌다. 정형권 과장은 ‘은행 대형화 및 시장 집중도 상승이 은행 효율성에 미친 영향’을 분석한 바 있다. 그에 따르면, 은행 간 합병과 지주회사를 통한 결합은 인건비나 운영 경비를 절감하는 데는 효과가 별로 없었지만, 은행 이익이 증대되는 데는 효과가 있었다. 정과장은 “합병된 덕에 수익 창출 능력이 나아지고, 은행 시장이 몇 개 은행으로 집중되면서 은행 간 담합이 쉬워지고, 경쟁도 완화되어 은행 이익이 늘어났다”라고 말했다.

은행원 연봉, 8년 만에 두 배 이상 올라

이처럼 은행들은 공적자금과 금융 구조 조정을 지렛대 삼아 사상 최대 규모, 사상 최대의 수익을 내며 세계적인 은행 대열에 올라설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은행들이 거두어들이는 이득은 더 이상 국민의 것이 아니다. 혈세로 은행을 살리는 데 기여했던 국민들은 아직 빚(공적자금)을 다 받지 못했는데도 말이다. 합병을 거쳐 민영화된 은행은 주주들의 회사요, 시장에서 벌어들인 이득은 주주와 임직원 몫으로만 돌아가는 것이 현실이다. 주주들은 배당과 주식 가치 상승으로 큰 이득을 보고 있다. 1997년 11월 6천원 대였던 국민은행 주가는 2006년 12월 7만원대까지 올랐다.

 
임직원들은 국내 최고 수준의 연봉으로 그 열매를 공유한다. 각종 취업 포털 사이트에서 기업 연봉 조사를 할 때마다 은행들은 상위권을 기록한다. 한국경영자총협회가 조사한 금융권 임금 조사표만 보아도 은행 직원 연봉이 얼마나 가파르게 상승했는지 알 수 있다(표 참조). 1997년 은행 대리 초임은 평균 2천7백66만원이었다. 외환위기 파고가 최고조에 달했던 1999년 평균 2천5백10만4천원까지 내려갔지만, 2005년에는 5천7백54만원으로까지 치솟았다. 은행원 연봉은 8년 만에 두 배 이상 오른 것이다. 공적자금을 3분의 1 이상 반환하지 못한 은행의 직원 연봉도 예외가 아니다. 직장 경력 10년차의 평균 연봉이 3천만~4천만원 대인 것에 비하면 은행 직원의 임금은 상당히 높다.

물론 국민들은 서비스를 통해 은행 성장의 열매를 공유할 수 있다. 그러나 은행의 발전된 서비스는 모든 국민의 몫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은행들은 더 높은 수익을 내기 위해 모두를 위한 서비스보다는 부자만을 위한 서비스에만 역량을 집중하고 있다. 프라이빗 뱅킹을 비롯해 부자를 위한 서비스는 눈부시게 향상하고 있고, 부자들은 은행으로부터 VIP 대접을 받으며 그 서비스를 향유한다.

그러나 중소기업과 서민은 오히려 전보다 더 ‘찬밥 신세’가 되고 말았다. 중소기업 사장들은 여전히 ‘은행에서 돈 빌리기 힘들다’고 토로한다. 윤용인씨는 “사업을 하다 보면 은행 문이 얼마나 높으며, 얼마나 있는 자를 위한 ‘돈놀이 가게’인지 절감한다”라고 말했다. 과거에 비해 중소기업 대출액이 절대적으로 줄어든 것은 아니지만, 중소기업이 대출 신청을 했을 때 국내 은행이 거부하는 비율은 캐나다나 미국에 비해 상당히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01년부터 은행권 가계 대출이 기업 대출을 추월한 것도, 은행들이 불안한 중소기업 대출보다는 안전하게 담보를 잡을 수 있는 가계 대출에 집중했기 때문이다. 김경수 교수(성균관대·경제학부)는 ‘은행이 위험 부담이 높은 (중소)기업에 대한 대출 비중을 줄이고 대신 가계 대출을 늘린 것이다. 가계 대출은 은행의 경영수지를 개선하는 데 크게 기여했으나 동시에 가계 부채가 과다하게 증가하는 결과를 초래했다’라고 지적한 바 있다(<금융구조조정의 성과와 과제>중에서). 담보나 신용을 내밀 수 없는 서민에게 은행 문턱이 높은 것은 말할 나위 없다.

물론 지금은 ‘관치 금융’ 시대가 아니다. 한국투자증권 이준재 분석가 말대로 은행이 주식회사이기 때문에 주주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주주 자본주의 사회라고 해도 은행이 담당해야 할 공공 기능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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