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 보유 자축’ 간판 줄이어
  • 정희상 전문기자 (hschung@sisapress.com)
  • 승인 2006.12.22 2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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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실험 후 처음 직항로 통해 평양 방문·현장 취재…전력 사정은 더 나빠진 듯

 
북한이 핵무기 실험에 이어 핵 보유 선언을 한 지 100여 일이 지난 12월 말, 평양 거리는 추웠지만 분위기는 차분했다. 영하 10°를 오르내리는 매서운 추위 속에서 평양시내 곳곳에는 핵실험과 관련된 각종 대형 선전 간판들이 들어서 있었다. 대부분 핵무기 보유를 기정사실화하고 핵실험 성공의 역사적 의미를 부여하며 주민 결속을 다지고자 하는 내용들이었다.
 ‘핵 보유국이 된 5천년 민족사의 자부심을 길이 빛내자’(평양 역전) ‘세계적인 핵 보유국을 일떠세워주신 절세의 명장 김정일 장군 만세’(평양시 보통문 앞) “핵 보유국의 자긍심으로 제국주의 압제 책동 분쇄하자”(평양 광복거리).

그러나 핵 보유 선언 이후 미국이 주도하는 대북 경제 제재 조처의 후유증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평양 시내 식료품 상점 앞에는 줄을 길게 늘어선 주민들 모습이 자주 눈에 띄었고, 연탄을 실은 리어카들도 심심찮게 보였다. 또 평양의 밤거리는 지난해 겨울에 비해 더욱 어려워진 전력 사정을 반영하듯 가로등도 꺼지고 건물마다 불빛을 찾아보기 힘든, 칠흑 같은 분위기를 연출했다. 북한측 안내자는 “미국의 압제로 전기 사정이 더 긴장된(나빠진) 것은 사실이지만 이보다 어려운 고난의 행군 시기도 넘겼기에 우리 인민들은 그 어떤 어려움도 이겨낼 각오가 돼 있다”라고 말했다. 기자가 “핵무기를 개발해 인민들에게 또다시 고난의 행군을 안겨주는 것은 너무 가혹하지 않느냐”라고 되묻자 그는 “지난 시기 고난의 행군은 우리 인민을 검증해주는 긍정적 의미가 있었다. 빠져나갈 사람은 다 빠져나가고 강철같이 단련된 인민들만 남았기에 문제 없다”라고 주장했다.   

겉으로 보기에 평양 시민들은 핵 보유 국가가 된 북한의 현실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는 듯했다. 주민 접촉을 철저히 차단하는 안내원들의 눈을 피해 틈틈이 일부 평양 시민들에게 조심스레 접근해 물어본 결과 핵 보유 선언 이후 북한 주민의 내부 결속은 더욱 공고해진 것처럼 비쳤다. 평양 시내에 있는 김책공업대학의 도서관에서 만난 한 대학생은 “남쪽 인민들도 우리 민족이 핵을 보유한 데 자긍심을 느끼지 않나요?”라고 물었다. 대다수의 남한 국민이 북한의 핵실험과 핵무기 보유 선언을 우려하며 반대하고 있다고 전하자 그는 “핵은 우리 민족을 향해 쓰자는 것이 아닌데….”라며 의아스럽다는 반응을 보였다. 취재진 일행이 머문 양각도 호텔에 근무하는 한 북한 여성은 “미국·중국 같은 강대국만 핵을 가지란 법 있나요. 이번에 김정일 장군님의 지도로 우리가 핵무기를 갖게 된 것은 세계 만방에 5천년 민족사의 힘을 보여준 일대 사변입니다”라고 강변했다.

틈만 나면 “핵에 대한 오해 거두어달라”

핵 보유 선언 이후 철저한 내부 결속을 보여주는 일반 주민들의 반응과 달리 그동안 남측과 각종 교류 협력 사업을 벌여온 북한 아태평화위원회와 민족화해협력위원회(민화협) 관계자들에게는 적잖은 고민의 흔적이 엿보였다. 이번에 93명에 이르는 남측 방북단(대표 단장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공동대표 무원 스님) 일행을 맞이해 12월18일부터 21일까지 3박4일동안 평양 곳곳을 안내한 북한측 대표 단장 리충복 민화협 부회장은 “누차 남측 당국에 얘기한 바 있듯이 핵무기는 우리 민족을 지키려고 만들었지 남측 인민에게 피해를 주려고 만든 것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다(인터뷰 참조).

 
나흘간 방북단을 밀착해 안내와 감시를 맡은 북한측 민화협 참사관들은 틈만 나면 북한 핵에 대한 ‘오해’를 거두어달라고 말했다. 북측의 한 관계자는 “세계 여러 나라가 우리의 핵 보유를 손가락질한다는 것도 다 안다. 그러나 미국이 계속 공화국 압살 책동으로 나오는 현실에서 우리는 자위적 수단으로 핵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지금 미국도 중국도 강대국 논리로만 나오는데 이런 때일수록 북남의 민족끼리 지혜와 힘을 합쳐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북한의 핵 보유가 결국 한국과 일본의 핵 보유를 자극해 동북아에서 핵 도미노 현상을 일으킬 뿐 북한이 원하는 상황은 오지 않을 것이라고 반박하자 그는 곤혹스러워하는 기색을 역력히 보였다. “위에서 정책적으로 결정하실 문제지만 우리도 개인적으로는 종국에 가서는 북·미 간에 모든 현안을 일괄 타결을 하는 방법이 가장 이상적일 것이라고 내다본다”라고 말했다. 핵시설 폐기의 대가로 북·미 간 수교와 경제 봉쇄 해제 및 미국의 ‘대북 원조’를 내심 기대한다는 것이다.

핵 보유 선언 이후 중단되었던 6자회담이 베이징에서 다시 열린 이유에 대해 북측은 “미국이 회담의 전제 조건으로 경제적 압박을 양보할 의향을 내비쳤기 때문에 만난 것이다”라고 말했다. 미국측이 경제 제재 해제 조처를 약속했기 때문에 북·미 양자 회담을 거쳐 6자회담 복귀를 추진했다는 주장이다. 

‘신천 집단 학살’ 상기하며 응징 다짐도

북한측 관계자들은 특히 미국이 북한의 인권 문제에 대해 시비를 거는 데 강한 반발심을 드러냈다. 한 관계자는 “미국이 공화국 인권 운운하는데 우리는 조국해방전쟁(한국전쟁) 시기에 미군이 우리 인민을 잔인 무도하게 대학살한 데 대한 피의 값을 반드시 받아내고야 말 것이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한국전쟁 시기 미군이 북진하는 과정에서 황해도 신천군에서 3만5천명의 북측 민간인을 집단 학살한 사례를 들면서 6자회담이 무르익어가면 북측은 반드시 이 문제를 의제로 삼아 미국의 책임을 물을 것이라고 말했다. 전쟁 이후 북한이 미국을 ‘철천지 원수 미제’라고 부른 것도 신천 대학살의 한을 표현한 것이라는 설명이다. 이 학살 때문에 인민군 산하에 ‘신천 복수대’라는 부대가 꾸려져 현재까지 운영되고 있고, 1978년 판문점에서 일으킨 미군 병사에 대한 도끼 난자 살해 사건도 바로 그 부대가 신천 학살에 대한 보복으로 응징한 것이라는 주장도 폈다.

 
이번에 성사된 3박4일의 남한측 대표단 평양 방문은 핵실험 이후 사실상 냉각기에 접어든 남북 관계에서 작은 해빙의 무드를 조성했다는 의미가 컸다. 북측은 이례적으로 기존 인천공항 노선이 아닌 서울 김포에 고려항공 전세기를 보내 방북단 일행을 맞아들이며 ‘화해 협력사업’ 재개 의지를 과시했다. 그러나 남북 교류 과정에서 발생한 남한측의 각종 잡음(개성공단 춤 파문 등)을 의식한 듯 대표단을 맞이하는 분위기는 딱딱했고, 특히 일행에 끼인 기자단에게는 극도로 예민한 반응을 보였다. 기자단을 안내한 민화협 관계자는 “그동안 남측 기자 선생님들을 따뜻이 환대해왔지만 서울에 돌아가면 나쁜 쪽으로만 보도하는 것을 보고 우리는 남측 언론에 실망이 큽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반가운 손님을 만나면 저녁에 자연스럽게 음주가무를 하는 것이 우리 민족의 전통적인 습관이건만 남측 기자 선생들이 이것도 문제 삼고 늘어지니까 당 중앙에서 앞으로는 남측 손님들에게 절대 피해를 드리는 일을 하지 말라는 지시가 내려왔습니다”라는 말로 서먹해진 분위기를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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