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 미 관계에 봄은 오는가
  • 김태우(한국국방연구원 책임연구위원) (sisa@sisapress.com)
  • 승인 2007.01.30 1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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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의 '조급함'과 평양의 '두려움'이 양국 간 '온난 기류' 형성

김태우 (한국국방연구원 책임연구위원)

 
북·미 간의 갑작스러운 온난 기류와 윌리엄 페리 전 미국 국방장관의 ‘북폭론(北暴論)’이 묘한 앙상블을 이루고 있다. 온난 기류의 발원지는 베를린이었다.
크리스토퍼 힐 미국 국무부 차관보와 김계관 북한 외무성 부상이 지난 1월16일부터 18일까지 베를린에서 회동한 직후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일정한 합의가 있었다”라고 시인하자, 언론들은 일제히 ‘모종의 합의가 있었을 것’이라고 보도했다. 북한이 핵 활동을 중단하고 국제원자력기구(IAEA) 감시를 수용하는 조건으로 미국이 방코델타아시아(BDA)의 동결 계좌 일부 해제 따위 금융 제재 완화와 함께 경제·에너지 지원을 약속했을 것이라는 보도가 주종이었다. 당연히 6자회담 조기 재개설도 새어나오고 있다.
무엇이 갑작스러운 온난 기류를 불러왔을까. 저간의 보도들은 대개 두 갈래의 시각을 소개한다. 첫 번째 시각은 북한의 경제난에 초점을 맞춘다. 핵실험 이후 외부 원조가 끊어지고 미국의 금융 제재가 가해지는 가운데 폭설과 혹한까지 겹쳐 북한의 경제가 말이 아니라는 지적이다. 유엔개발계획(UNDP)도 미국의 요구에 따라 3월1일부터 대북 현금 지원을 중단하기로 했고,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도 UNDP 자금의 활용에 대한 외부 감사를 지시했다. 그래서 북한이 식량과 에너지를 얻기 위해 태도를 바꿀 수밖에 없다는 분석이다.
두 번째 시각은 미국의 ‘조급함’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2006년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에 완패한 데다 2년 미만의 임기를 남겨놓은 부시 대통령으로서는 양쪽으로부터의 비난이 무척 따가운 상황이다.
강경파로부터는 ‘악의 축’ 발언 등 과격한 표현만 사용했을 뿐 실질적 위협을 가하지 않는, 냉탕도 온탕도 아닌 정책으로 북한의 핵실험을 방조했다는 비난을 들어왔고, 온건파로부터는 대화 노력이 부족했다는 질타를 받아왔다.


북한, 빈곤 탈출보다 ‘핵 보유 굳히기’에 힘써


 

게다가 북한이 핵사찰을 받지 않는 가운데 마음대로 플루토늄과 핵무기를 만들 수 있는 현 상황을 무한정 방치할 수도 없다. 대북 정책 결정 라인의 변화도 눈에 띈다. 네오콘의 주축이었던 도널드 럼스펠드 국방장관이 온건파인 로버트 게이츠로 교체된 데 이어 로버트 졸릭 국무부 부장관 자리에 ‘비둘기파’로 알려진 존 네그로폰테가 내정되는 등 대화파들이 속속 요직을 차지하고 있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이번 북·미 간 의견 접근이 미국 쪽 사정에서 비롯된 측면이 적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이런 시각들이 간과하는 부분이 있다. 우선 ‘빈곤 탈출’은 북한의 시급한 과제이지만 평양 당국의 최우선 목표는 여전히 ‘핵 보유 굳히기’와 ‘더 많은 플루토늄과 핵무기 생산을 위한 시간 벌기’라는 사실이다. 북한 당국이 주민의 궁핍 문제를 최우선적으로 배려하는 정부라면 수백만 명이 굶주리는 중에 국제 제재와 고립을 자초할 핵 개발을 강행해온 사실 자체가 설명되지 않는다. 평양의 집요한 핵 보유 의지를 간과하면 북핵 문제의 핵심을 보지 못한다는 얘기다.
비슷한 맥락에서 동결 계좌 해제 문제에 지나치게 비중을 두는 것도 문제가 있다. 지난해 12월 베이징에서 열린 6자회담이 “동결 계좌를 풀어야 비핵화를 논의할 수 있다”라는 북한의 공세에 막혀 결렬되자, 많은 사람들은 금융 제재를 6자회담의 암초로 지목했다. 하지만 금융 제재 문제는 북한이 시간 벌기와 체면치레를 위해 던진 기만기(Decoy)일 가능성이 높다. 적 잠수함으로부터 함정을 보호하기 위해 함정과 같은 소음을 내는 기만기를 발사해 어뢰의 추적을 따돌리는 것은 해군에서는 교과서적인 전술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김계관의 미소는 더 많은 핵무기를 만들 시간을 벌기 위한 전술인지도 모른다.
미국의 무력 사용 가능성도 간과되고 있는 부분이다. 윌리엄 페리 전 국방장관은 지난 1월18일 하원 외교위원회의 북한 청문회에서 “외교적 노력이 소진되면 군사 조처가 불가피하다”라는 말로 좌중을 긴장시켰다. ‘한국과 중국이 대북 제재에 동참하지 않는다면’이라는 전제가 붙기는 했지만, 어쨌든 미국이 직접 북한의 핵시설을 파괴해야 한다는 주장은 남북한과 중국을 한꺼번에 겨냥한 초강경 발언이다.
이 발언은 미국이  F-117 스텔스 전폭기와 최신예 F-22 전투기를 한국과 일본에 배치하거나 배치키로 한 데 이어서 나왔다. 페리는 1996년 <포린 어페어>에 기고한 논문과 2002년에 출판한 책 <예방적 방어(Preventive Defense)>에서 ‘예방적 선제 행동’의 필요성을 역설한 바 있으며, 북한 핵시설 파괴도 결국 그 연장선에 있는 예방적 조처라는 주장인 셈이다.
물론 국제 정치의 큰 그림에서 보면 미국의 군사 행동은 가능성이 높지 않다. 통상 선제 공격을 하기 위해서는 확실한 공격 수단을 갖추어야 하고, 목표물들을 확실히 파괴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어야 한다. ‘침략국’으로 낙인찍힌다는 정치적 부담도 극복할 수 있어야 한다. 북한의 보복으로 인한 제2의 한국전쟁 가능성도 중요한 억제 요인이다. 게다가 미국은 증원군을 보내야 할 만큼 ‘이라크 수렁’에 빠져 있고, 이란의 핵 문제마저 여의치 못하다. 이런 상태에서 중국과 러시아의 반발을 초래할 대북 군사 행동을 취할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미국은 북한을 선제 공격할 것인가


미국이 공격 시나리오들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 자체도 뉴스가 아니다. 미국은 1949년 소련이 핵실험을 준비할 때에도 선제 공격 시나리오를 준비했고, 1950년 한국전쟁 때에도 중국에 대한 핵 공격 시나리오를 작성했으며, 1964년 중국이 핵실험을 준비할 때에도 그랬다.
북한에 대해서도 미국은 핵시설과 함께 미사일·야포 등 대남 보복력을 초기에 초토화시키는 시나리오에서부터 극소수의 표적만을 파괴하는 ‘초정밀 타격(Pin-Point Strike)’에 이르기까지 많은 시나리오를 준비하고 있을 것이다. 많은 대외 정책 수단을 가진 초강대국이란 늘 다양한 시나리오를 준비하는 법이기 때문에 시나리오 그 자체가 공격 가능성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는 총론적인 분석일 뿐이다. 초정밀 타격을 가할 가능성은 다시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미국 처지에서 보면 현재 건설 중인 영변과 태천의 원자로 및 재처리 공장을 파괴하고 가동 중인 영변의 5MW 원자로의 주변 기기를 타격한다면 북한의 플루토늄 생산을 중단시킬 수 있다.
1981년 6월 이스라엘의 F-15 및 F-16 전폭기들은 이라크의 오시라크(Osirq) 원자로를 파괴하기 위해 사우디와 요르단을 가로질러 날아가야 했지만, 북한의 핵시설 네 곳을 타격하기 위해서는 대규모 군사력을 집결시킬 필요도, 한국 내 기지를 사용할 필요도 없다. 인근 기지나 항공모함에서 발진한 F-117 스텔스 전폭기를 이용하거나 토마호크 미사일로 공격이 가능할 것이다.
즉 미국은 방사능 오염을 유발하지 않으면서 그리고 북한의 대남 보복을 정당화시키지 않는 한도 내에서 북핵 프로그램을 중단시킬 수 있다고 믿을 수 있다. 한국전쟁의 악몽을 가진 한국 처지에서는 어떠한 대북 공격에도 찬성할 수 없지만, 문제는 미국이 자국의 처지에서 판단할 것이라는 점이다.
6자회담 복귀 시사하며 시간 벌기 할 수도
여기서 리비아의 경우를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 2003년 12월 카다피 대통령이 모든 대량살상무기 프로그램을 포기한다고 선언했을 때 세계가 깜짝 놀랐다.
세계 각지의 반미·반서방 테러 세력들을 지원해 레이건 대통령이 ‘중동의 미친 개’라고 불렀던 카다피가 아닌가. 우선은 국제 제재로 인한 경제적 궁핍으로부터의 해방을 원했을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그것만이 모든 이유는 아닐 것이다.
1986년 4월 리비아 공작원들이 서베를린의 디스코텍을 폭파해 미국인들을 죽인 데 대한 보복으로 열흘 후 레이건 대통령은 카다피의 관저 등에 정밀 타격을 가했다. 카다피의 15개월 된 딸이 사망했고 카다피 본인도 죽음을 당할 뻔했다. 카다피는 2003년 미국이 1백15명의 사망자만을 기록하면서 3주일 만에 아랍 최강의 이라크군을 패배시키는 것을 보았고, 사담 후세인이 생포되는 모습도 보았을 것이다. 이런저런 두려움이 작용하지 않았다면 카다피가 결단을 내리는 데 어려움을 겪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현재의 북·미 간 의견 접근 움직임은 워싱턴의 ‘조급함’과 평양의 ‘두려움’이 만들어낸 합작품일 가능성이 있다. 즉 미국이 ‘동결 계좌 해제’ ‘식량·에너지 지원’ 같은 당근과 함께 ‘선제 공격 가능성’을 시사하고 북한이 이를 중시함으로써 나타난 결과물일 수 있다. 북한으로서는 동결 계좌 해제를 빌미로 6자회담에 복귀하는 그림이 나쁘지 않다. 자신의 핵 집착에 대한 세계인들의 시선을 피함과 동시에 미국의 군사 행동에 대한 두려움도 감쪽같이 감출 수 있다. 그러는 과정에서 또다시 소중한 시간을 벌 수 있다. 6자회담이 한두 번만 열려도 금세 1년이 지나간다는 사실은 지금까지의 사례에서 익히 보아왔다. 이것이 평양이 회담 재개에 적극성을 보이는 진정한 이유인지도 모른다. 베를린 회담 이후 지나친 기대감을 표출하는 일부 언론들을 보면서 너무 앞서나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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