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 권력’과 ‘절개’ 두 노란색의 충돌
  • 유중하 (연세대 중문과 교수) ()
  • 승인 2007.02.26 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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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황후화> 속에 감춰진 중국적 인문 코드

 
색채의 마술사로 불리는 장이머우가 이번에 실험 한 가지를 또 추가했다. 영화를 보노라면 온통 노란색, 그것도 황금빛이다. 저우룬파가 걸치고 있는 갑옷과 곤룡포 혹은 머리에 쓰고 있는 왕관은 물론, 궁정 뜨락을 덮고 있는 국화에서 심지어는 궁궐의 기둥에 이르기까지 온통 노랑 일색이다. 초기의 장이머우는 붉은색 실험을 즐겼다. 영화 <국두> <홍등> <홍고량> 등에서 색은 오로지 붉은색이다. 피를 팔아 카메라를 샀다는 장이머우는 영화판에 들어설 무렵 자신의 카메라 렌즈에 피의 색깔을 입혀놓았던 것일까. 그러다가 진시황의 천하통일을 다루는 <영웅>에 이르러서는 온갖 컬러, 검은색·붉은색·초록색·흰색 등을 동원한다. 그런데 <황후화>에 이르러서 느닷없이 노란색 일색으로 영화를 물들이고 있는 것이다. 장이머우는 이 노란색에 어떤 문화 코드를 감추고자 했는가.
우리말로 노란색이라고 하면 조금은 색감이 어긋나므로 한자로 바꾸어 ‘황’이라고 해보자. ‘황’은 땅의 색깔이다. ‘하늘 천, 땅 지, 검을 현, 누루 황’이라는 문구는 예전 같으면 삼척동자에게도 주지의 사실. 중국의 땅이 누렇다는 뜻이다. 한자로 하면 황토다. 중국의 대지인 황토는 마치 이집트가 나일 강의 선물이듯 황허(黃河)의 선물이었다. 황허 물에 녹아 있는 뻘흙은 입자가 가늘어서 물과 뻘흙이 쉽사리 분리되지 않는다. 예컨대 황허 강물을 한 컵 받아놓는다고 치자. 시간이 흘러도 그 뻘흙은 가라앉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설탕물처럼 콜로이드 상태로 되어 있는데 그런 모양새를 가리키는 낱말이 바로 ‘혼돈’(混沌)이라는 한자어이다. ‘백년하청(百年河淸)’, 곧 황허 물이 언제 맑아지겠는가 하는 자조 어린 고사성어가 바로 이 황허 강물에 녹은 뻘흙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장황하게 중국의 자연지리를 훑어본 것은 물론 인문 문화 코드를 짚기 위한 예습이다. 이 ‘황’자로 이어진 코드의 연장선 위에 살며시 고개를 든 것이 바로 중국의 시조로 일컬어지는 황제(黃帝). 뜻을 풀면 누런 제왕이다. 이때의 누루 황은 토덕(土德), 곧 흙의 덕택을 보아 낸 임금이라는 뜻이다. 흙의 덕택을 보아서 어쩌겠다는 것인가. 중국의 문명을 누런 황토에서 나는 물산, 곧 농경의 기초 위에 올렸음을 뜻한다. 석양이 질 녘 누런 뻘흙이 녹아 있는 황허 강물을 굽어보노라면 구불구불한 모습이 이상한 짐승을 떠올리게 한다. 그것이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상상의 동물 용이다. 용은 용이되 누런 용, 곧 황룡이다. 중국의 역대 임금은 용이 그려진 곤룡포를 입는다. 그 용 역시 누런 용이다. 청룡도 적룡도 아닌 황룡이어야 하는 것이다.
역사보다 색깔의 환각에 치우쳐 ‘흠’
저우룬파가 입고 있는 갑옷 혹은 곤룡포가 어떤 색인가를 영화를 본 관객은 다 알고 있을 것이다. 노란색은 황제만의 불가침의 색이다. 금단의 성이라는 뜻의 베이징의 고궁, 자금성 기와도 온통 누런색이다.
거기에 대조를 이루는 것이 바로 국화의 노란색이다. 국화는 무슨 꽃인가. 동방에서 말하기로는 사군자의 하나로 국화의 고결함을 나타내는 문구가 바로 ‘아마도 천지간에 오상고절은 너뿐인가 하노라’고 했을 때 그 ‘오상고절’이라는 성어일 것이다. 서리가 내리는 가을이 본격적으로 들이닥치기 직전인 중양절, 곧 두 개의 양이 겹쳐 양의 기운이 극성에 이른 시절, 서서히 음기가 천하에 드리우기 시작하는 그 무렵 오연(傲然)히 색을 잃지 않고 음기에 맞서는 그런 꽃이다.
물론 영화 <황후화>에서는 그 국화가 공리의 분신인 것이다. 거사가 일어나는 중양절은 두 개의 양의 기운 혹은 두 개의 노란색, 곧 황제인 저우룬파의 노란색 권력과 궁리의 노란색 국화가 서로 일장의 혈투를 벌이는 그날인 것이다. 하여 노란 국화는 붉은 피로 물들지만 그 붉은 피는 종당에는 노란 권력에 의해 다시 노란 꽃으로 뒤덮이는 것. 이웃의 강대국 양나라에서 저우룬파에게 시집왔다가 찬밥 신세가 되어 독수공방하는 궁리의 가슴에 맺힌 한풀이 혈투극은 이렇게 해서 수포로 돌아가고 마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영화 스토리 밖에 있는 저간의 사정이다. 궁리가 누구인가. 이 질문은 적절치 않다. 궁리와 장이머우는 어떤 사이인가. 배우와 감독의 사이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안으로 은밀한 사연이 감추어진 사이라는 사실은 아는 사람은 대충 안다. 장이머우는 궁리를 국화로 그리기를 즐겨 했다. <국두>가 그렇고 <추국타관사>가 그렇다. 말하자면 <황후화>의 국화는 궁리라는 배우에게 국화를 오버랩시킨 일련의 연작 위에 얹혀진 ‘내연’의 변주곡인 셈이다.
중국 현대극의 대가 차오위(曹愚)가 뒤얽힌 가족 간의 치정극을 통해 봉건 사회의 어두운 면을 보여주려고 했던 작품 <뇌우>에서 기본 얼개를 따온 것으로 전해지는 <황후화>가 최근 대륙에서 곤욕을 치르고 있다는 소문이다. 자식과 양어머니가 통정하고, 오누이가 비운의 육체 관계를 맺는 <뇌우>의 설정은 이름하여 ‘반봉건’이라는 당시의 시대 사조와 맞물리면서 세를 탈 수 있었지만, <황후화>를 보는 당국자의 눈은 자못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노란색 곤룡포의 저우룬파는 자신의 장남을 낳아준 여인네 일가의 몰살을 기도할 뿐 아니라, 심지어는 그 장남을 죽인 막내를 자신이 두르고 있던 황금으로 만든 황용이 아로새겨진 허리띠로 말 그대로 패죽이게끔 그린 설정이 탐탁했을 까닭이 없는 것이다. 노란색은 중국 인민들에게 아직도 중심적 권력을 상징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중공 당국의 입장에서 보자면 베이징올림픽의 총연출을 맡긴 장이머우가 노란색 색깔 놀이에 탐닉해 들어간 나머지, 궁리를 노란색 꽃으로 채색하는 데만 몰두한 나머지 그야말로 ‘진도를 나가도 너무 나간 것’일 수 있다. 장이머우는 이름하여 역린(逆鱗), 노란 용의 비늘을 건드리고 만 것이 아닐까. 이것 <국두>나 <홍등>에서 이른바 ‘셀프 오리엔탈리즘’, 곧 자신의 치부를 드러냄으로써 중국의 속살을 들여다보고 싶어하는 서방인 관객의 관음증 욕구를 채워주었다는 비난과는 유를 달리한다. 장이머우의 처지는 자칫 위태로운 지경에 빠질 수 있다.  
하지만 그 역시 중국 안의 사정이다. 장이머우가 위태로운 것은 또 한 가지 있으니 색깔의 환각으로 관객을 인도하면서 역사를 몰각해가고 있지 않은가 하는 우려가 그것이다. <영웅>에서는 야시시하게 현란한 색깔의 비단 폭들이 역사를 가리더니 <황후화>라는 역사극에서는 역사에 발을 딛는 시늉만 했을 뿐 허공 위를 떠돌고 있는 느낌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노란색이라는 중국적 인문 코드의 설정에는 겨우 성공한 듯하지만, 그 노란색은 역사를 오늘날에 맞게끔 새롭게 리바이스하기는커녕 역사를 덧칠 내지 개칠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 점에서 역사에 늘 눈을 뜨고 있다는 것은 아무리 낡아도 좋은 사랑 같은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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