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의 방 울리는 핏빛 분노
  • 조 철 (출판 기획자) ()
  • 승인 2007.06.25 1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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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추리 소설 <왕의 밀실>/광해군 시대 허균의 목숨 건 ‘수사 잠행’ 추적

최근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가 방한해 많은 관심을 받았다. 미래학이라…. 현실에 기초해 예상과 전망을 내놓는 학문이라면 과학적 상상력의 표현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과학적 논리로 말하니 사람들은 앨빈 토플러의 미래에 귀를 쫑긋 세운다. 그래도 오지 않은 미래는 사실(fact)이 아니다. 그렇다고 허구(fiction)라고 매도되지도 않는다. 어쨌든 미래를 예상하는 일은 현재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주장하는 근거로 환영받고 있다.
역사를 아는 일도 그와 같은 맥락이다. 과거의 일을 반추하는 일은 현재의 모습을 진단하는 데 꽤 유익하다. “역사도 모르는 것들이 뭘 알아”라는 욕을 얻어먹지 않으려면 역사 공부를 해야 한다. 현재를 지혜롭게 사는 사람은 역사를 참고하기 때문이다. 역사소설이 문단에서 환영받는 데는 그런 이유도 한몫한다. 역사소설은 새로운 역사 해석을 목표로 하거나 또는 역사를 재현시키려는 의도에서 쓰여지기도 하고, 또는 현재의 문제를 짚어보는 방편으로 역사에서 소재를 구해 허구의 이야기를 풀어내기도 한다.

 
그런데 최근 몇 년 사이 팩션(팩트(fact)와 픽션(fiction)을 합성한 신조어)이라는 장르가 출판계에 자리 잡았다. 이건 역사소설도 아니고 그냥 소설도 아니라는 말을 듣는다. 팩션은 역사적 사실이나 실존 인물의 이야기에 작가의 상상력을 덧붙여 새로운 사실을 재창조하는 문화예술 장르를 가리킨다. 소설에서 많이 쓰이던 것이 영화·드라마·연극 등에서 많이 쓰는 기법이 되었다. 역사적 사건을 소재로 상상력을 크게 보태 완전히 새로운 역사를 써버림으로써 ‘역사의 옷을 입은 오락물’을 탄생시킨다. 역사를 왜곡한다는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 팩션이 한국 문단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외국에서 판타지와 팩션 장르를 결코 가벼이 보지 않는다. 문학의 장르로 인정해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한국 문단은 문학의 위기를 말하는데, 그 위기 밖에서는 젊은 장르들이 외롭고 힘겨운 글쓰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출판계와 다른 문화예술 분야에서 팩션은 이미 한 자리를 차지했다.
“신하들이나 나인들도 알지 못하는 서궐(경희궁)의 깊숙한 밀실에 의지할 수밖에….” <조선왕조실록> 광해 131권 광해10년 7월26일 기록에 이렇게 전한다. 이 역사적 기록을 중심으로 병자호란을 예견했던 시대의 혼란을 추리해낸 소설 <왕의 밀실>이 스스로 팩션이라 말하며 출간되었다. 팩션과 역사소설의 경계는 인간의 내면과 현실의 구조를 탐구하는 문학적인 면모에 있다고 말한다. 모호한 지적이지만 그 경계에서 논란을 할 필요가 없다는 듯 이 책은 팩션을 강조한다. 그래도 현재 국내외 정세를 겨냥해 쓴 것 아니냐는 혐의를 떨치지 못한다.


 
반역의 시대 통찰한 허균의 영웅담
<왕의 밀실>은 조선사 미스터리 ‘광해군 궁궐 밀실’에서 벌어진 반역 살인 사건과 좌참찬 허균의 목숨을 건 4일간의 수사 잠행을 추리와 스릴러로 구성했다. 이 책은 임진왜란 이후 광해군 시대를 배경으로 당대 안팎의 정국을 가장 정확하게 통찰한 허균의 영웅담이다. 임란 이후 호란이 예고된 조정의 분열, 음모가 난무한 참담한 정치 상황과 명·청 교체기의 국제 정세를 세 건의 살인 사건을 추적하며 치밀하게 짜깁기하고 있다.
저자는 왜 잘 알려지지 않았고 자취도 없는  <왕의 밀실>을 복원해 세상에 드러내려고 했을까. 저자는 책 끝에 자신의 역사 노트를 붙여 그 저의를 밝힌다. 경덕궁(지금의 경희궁) 공사에 관련된 기록인 <궁궐지>를 살펴보면 1617년 말에 경덕궁의 공사는 짧게는 수 개월, 길어야 1년 정도의 공정만 남기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때부터 공사는 알 수 없는 이유로 계속 연기되어 3년이 지난 1620년에 완공되었고, 그동안 나무 자재가 몇 천 그루씩 더 필요했다는 기록이 있다. 일반적으로 궁궐의 건축 순서는 사대문을 세우고 종묘를 지으며, 다음으로 창고 같은 건물을 짓는다. 그 다음이 중요 전각을 순서대로 짓는 것인데, 1617년 말 당시의 건축 진행 상태는 숭정전이 거의 완성된 상태였다는 것이다. 그것은 숭정전 공사에 자재가 더 필요했고 시간이 지체되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왜 시간이 지연되었고 자재를 추가로 필요로 했을까. 저자는 ‘서궐(경덕궁)의 깊숙한 곳에 따로 은 수백 궤짝을 마련해 쌓아두었다’는 기록에서 이유를 짐작했다. 실록을 들여다보면 광해군이 신하들과 나인들도 알지 못하는 서궐의 깊숙한 곳에 숨어 지냈다는 기록이 두서 없이 나타나는데 허균의 죽음 이후에는 이를 찾아볼 수가 없다는 것이다.
또 저자는 청의 실록인 <대청역조실록>에 조선으로 떠난 두 명의 사신이 있다는 기록만 있고 되돌아왔다는 기록이 발견되지 않은 점도 기이하게 여겼다. 그렇다면 조선으로 떠난 사신은 왜 돌아오지 못했을까. 그리고 사신이 떠났다고 기록되어 있는 청의 실록에 반해 조선의 실록에는 왜 그들의 자취가 없는 것일까. 저자는 이 대목에서 청이 보낸 밀사를 죽이는 장면을 탄생시켰다. 그렇다면 청의 밀사가 죽으면 해를 입는 쪽은 누구이고, 이득을 얻는 쪽은 누구였을까. 해를 입는 쪽은 당연히 조선의 왕인 광해군이다. 반면 득을 보는 쪽은 광해군과 노선을 달리하는 적 당파 혹은 광해군 정권에 밀려난 무리들이라는 결론에 다다른다. 광해군은 임란의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 또 다른 전쟁을 막아내는 것에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그런 광해군에게 청의 밀사는 큰 의미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청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청의 밀사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역사학자들은 ‘광해군의 피부병을 치료하기 위한 황토방’에 불과하다고 밀실 관련 부분에 대해 의견을 모은다. 일제 강점기에 모든 궁궐이 동물원, 학교, 총독의 사저, 미술관 등으로 전락하면서 왕의 밀실도 메워져 지금은 위치도 정확하게 알 수 없다. 그러나 <왕의 밀실>의 특수 장치로 고안해낸 밀실은 조선의 존폐가 걸린 충격적인 소재로 탈바꿈한다.
광해군은 밀실 안에서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 하는 소인배의 치적을 일삼는다’는 대신들의 쑥덕거림에 분노한다. 그의 분노는 자책으로, 가장 높은 자리가 주는 고독함으로 몸부림치고 있었다. 이런 왕에게 허균은 “문제라면 변절하여 전하의 주위를 간신배들로 가득 채운 관송이 문제일 것이고, 의리와 대의명분의 주자학을 목숨처럼 받들며 말로만 떠드는 서인들이 문제일 것이며, 동족이어도 남의 새끼라 하여 잡아먹는 복사 같은 대비가 문제이옵니다”라며 거침없는 충언을 올린다.
허균은 역적으로 몰린 상황에서 또 거침없이 말한다. 물론 저자의 말인 셈이다. “전하, 취약해진 조선의 병권을 보시옵소서. 강국에 둘러싸여 이리저리 눈치만 보는 조선을 보시옵소서. 썩어빠진 생각으로 아직까지 조정을 장악하고 있는 사대부들과 군자로 위장한 소인들을 보시옵소서. 그들이 뿌리 뽑히지 않는 한 조선의 앞날은 밝을 수 없사옵니다.” <홍길동전>을 쓴 허균의 ‘혀’를 잘 표현했다 할 만하다. 저자가 이 책을 낸 의도가 짐작되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허균은 누군인가. 그동안 허균에 대해서 <홍길동전>의 저자, 기생 매창과의 관계, 허난설헌의 동생 등으로 사람들은 알고 있다. 누구나 허균을 알고 있지만, 인조반정 뒤 복권되지 못한 유일한 신하이며, 법 절차도 거치지 않고 처형된 조선 역사상 유일무이한 재신(宰臣: 종2품 이상의 대신)이라는 사실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왕의 밀실>은 3백90년이 지난 지금 팩션이라는 방식으로 그를 오롯이 복권시키고, 삶 전체를 옹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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