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로에 선 북한 개혁·개방 해낼까
  • 임을출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연구교수) ()
  • 승인 2007.10.08 17:42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북한은 앞으로 어디로 갈까.’ ‘2007년 남북정상회담’결과를 담은 ‘10·4 공동선언’을 지켜보면서 가장 먼저 떠올린 물음이다. 이번 선언 내용은 전문가의 애초 예상을 훨씬 뛰어넘은 파격적인 합의 내용을 담고 있다. 이 합의들이 순조롭게 진행된다면 남북 관계의 미래는 경제공동체를 넘어서 사실상의 통일 초입 단계로 진입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만큼 이번 합의는 놀라운 것이다. 특히 이번 공동선언은 북한호의 선장인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향후 북한 체제를 어디로 끌고 갈 것인지에 대한 단초를 보여주고 있다는 측면에서도 주목할 만하다. 
합의문의 뼈대는 10월3일 오전과 오후 두 차례 총 4시간가량 나눈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 간 회담 내용을 토대로 만들어진 것이다. 합의 문건의 공식 명칭인 ‘남북 관계 발전과 평화 번영을 위한 선언’에는 남측의 핵심 제안 사항이 80% 이상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역사적으로 남북 간에 나눈 적지 않은 문서들과 비교해볼 때 남측 입장이 이처럼 고스란히 반영된 것은 극히 이례적이다. 선언 1항이나 2항의 일부를 빼고는 거의 남측이 준비해간 의제들을 수용한 것으로 보인다.
둘째 날 오후 정상회담을 시작하면서 김위원장이 갑자기 회담 일정 연장을 요청하는 등 돌출 행동을 보였으나 이 또한 “충분한 대화를 통해서 회담의 성과를 높이고 예정된 일정을 다 하고 가셨으면 하는 취지의 호의였다”라는 천호선 청와대 대변인의 설명으로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다. 공동선언이 담고 있는 내용은 이를 입증하기에 충분해 보인다. 
두 정상 간의 유일한 기싸움은 개성공단 사업의 속도에 대한 평가와 이 사업을 개혁·개방의 표본으로 간주하는 남측의 시각과 관련해 언쟁을 벌인 정도이다. 개혁과 개방에 대한 김위원장의 불신감과 거부감이 노대통령에게 쉽지 않은 벽으로 다가선 셈이다. 합의문을 놓고 볼 때 결과적으로 이 기싸움에서 노대통령이 김위원장을 설득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남북 공동 번영을 위한 남북 경협 관련 내용을 담고 있는 선언 제5항은, 북한은 극구 부인할지 몰라도 결국 북한의 개혁·개방을 촉진시킬 수 있는 핵심 내용들이다. 다만 노대통령도 강조했지만 역지사지의 입장에서 북측의 체제를 존중하는 용의 주도한 배려를 하는 것이 남측의 과제일 뿐이다.      
북한, 남측 핵심 제안 80% 이상 수용
김위원장은 작심하고 비핵화를 통해 북·미 관계를 개선시키고, 남북 관계를 통해 민생 경제를 살려보겠다는 전략적 결단을 내린 것으로 조심스럽게 평가할 수 있다. 이는 심심치 않게 눈에 띄는 김위원장의 파격 행보와 무관하지 않다. 사실 역사적으로 김위원장은 남측의 시각으로 보았을 때 실질적으로나 형식적으로 개혁·개방으로 규정할 수 있는 통 큰 결단들을 해왔다. 돌이켜보면 2002년의 신의주 행정특구 지정, 개성 남한전용공단 건설, 금강산 관광특구 지정 등은 김위원장의 용단이 없었으면 실현되기 불가능한 사업들이었다. 특
 
히 신의주 행정특구 건설을 확정하면서 외국인을 행정특구 장관으로 임명하고 입법·사법·행정 3권을 법적으로 부여한 것은 국제 사회도 인정하는 획기적인 개방 조치였다. 이런 맥락에서 어떤 이는 지독한 역설일지 몰라도 김위원장이 북한 내에서 가장 개혁적인 인물이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그러나 김위원장의 이런 시도에는 북한 내에서 뒷받침해줄 만한 인적·물적·제도적 역량이 늘 모자랐다. 공동선언에 담긴 많은 합의들이 과연 때맞춰 순조롭게 이행될 수 있을까하는 의구심을 갖게 만드는 대목이다. 몸이 마음을 따라주지 못하는 꼴이다. 그밖에도 북한은 비우호적인 외부 환경 즉, 북·미 적대 관계 등으로 개혁과 개방이 번번이 난관에 봉착했고 결과적으로 실패의 쓴 잔을 여러 차례 마셔야 했다. 특히 미국의 대북 봉쇄 정책 등으로 체제 안보에 심각한 위협을 느끼면서 반개혁·반개방 조치로 내부를 다시 단속해야 하는 악순환을 거듭했다. 그러나 내부 단속에도 불구하고 자생적인 개혁·개방의 큰 흐름은 거역하기 어려울 정도로 북한 내 엘리트 집단이나 일반 주민들에게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김위원장은 이런 민심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제 북한의 주민들은 드러내놓고 공개적으로 언급하지는 않고 있지만 개방을 하지 않으면 버티기 힘들다는 인식을 갖기 시작했다. 북한의 적지 않은 엘리트들도 김정일 현 체제는 유지하더라도 중국이나 베트남처럼 개혁·개방으로 가지 않으면 식량난 해결은 물론 체제 유지도 어렵다고 생각하고 있다. 지난 2002년 7월1일 경제 관리 개선 조치 이후 북한 내 시장화가 크게 진척되면서 외부 세계의 흐름에 눈을 뜬 결과이다. 이제 북한 주민들의 생존을 위한 시장에의 의존율이 크게 높아졌다. 이런 맥락에서 이번 공동선언은 김위원장이 나름으로 북한 민심을 반영한 것이다. 그는 이제 다시 변화의 소용돌이를 일으키려 하고 있다.
사실 남측 입장에서 선언 제5항은 남북경제공동체 토대 구축을 위한 중요한 첫 걸음이다. 5항은 개성공단을 비롯해 그간 남북 경협의 진전을 가로막아온 적지 않은 장애물을 구체적으로 제거하겠다는 북측의 의지와 구체적인 실천 조처를 담고 있다. 이 조항은 교역이나 투자를 추진하고 있거나 향후 진출 계획을 가진 남측 기업들의 요구 사항을 상당 부분 수용한 것이다. 선언 내용이 1차 정상회담 때 나온 ‘6·15 공동선언’보다 다소 내용이 많고, 북측이 원론적인 문구가 아니라 구체적인 사업까지 명시된 문건에 합의한 것은 북측의 실천 의지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대목이다.
주목할 부분은 남측 기업들을 위해 각종 우대 조건과 특혜를 우선적으로 부여하기로 한 것이다. 이는 중국이 개혁·개방 초기에 타이완 기업의 투자를 유치하기 위해 과감한 혜택을 제공했던 사례를 떠올리게 한다. 이제 북한은 남한 기업들이 경제특구뿐 아니라 북한 전지역에서 투자를 할 경우 남한 기업들의 투자여건 및 자유로운 인적·물적 왕래 등을 보장하기 위해 가칭 ‘남한동포투자보호법’을 만들 가능성이 한층 높아졌다.
5항은 남북 관계는 물론 북한 체제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이다. 이 조항이 담고 있는 각종 우대 조건이나 특혜들은 개성공단에서도 부분적으로 적용하고 있는 시장 친화적인 법·제도 확대 발전의 이행을 요구할 것이다. 이미 금강산과 개성에는 각 금강산관광지구법과 개성공업지구법에서 북한의 주권과 법이 전면적으로 적용된다고 명시하면서도 경제 활동에 관해서는 기존의 북한법 대신 금강산관광특구 및 개성공업지구에 고유한 법이 적용된다는 취지로 규정함으로써 경제 활동과 관련해 시장경제에 입각한 새로운 제도의 도입을 원활하게 하고 있다는 특징이 있다. 남측 기업들이 줄기차게 요구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지만 기업의 경영 자율성 보장 등 시장경제 원리를 반영한 친기업적 법제가 착착 세워지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미진한 부분이 많다. 개성공업지구의 법제는 시장경제 원리에 기초해 입주 기업의 자율적 경영 활동의 보장을 강화하는 법규의 마련과 이행이 필요하다. 이와 관련해서는 기업의 고용자주권을 보장하고, 노동 시장 형성을 지원해 노동계약제를 실현하는 것이 우선적인 과제이다. 또한 북한 근로자에 대한 채용·해고, 근로자 배치, 작업 지시 등 기업의 인사권 보장을 통한 자율적 인사 관리가 실현되어야 한다. 이는 북한의 기존 사회주의 시스템과는 크게 배치된다.
그간 북한 실무자들은 남측 기업들의 법제 개선 요구들을 애써 외면하면서 어정쩡한 태도로 일관해왔다. 이 문제는 지도자 수준의 결단이 있어야 자신들도 쫓아갈 수 있다는 태도를 보였다. 그런데 이번 정상회담에서 양 정상이 선언을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물꼬를 텄다. 이제 적어도 경제특구 내에서는 기존 사회주의 법제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좀더 자본주의적인 법제가 통용될 것이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