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0 GP에서 잠 못드는 영혼들
  • 정락인 기자 freedom@sisapress.com ()
  • 승인 2007.10.15 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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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천 GP 총기 사건이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유족들은 이번 사건이 북한측의 도발에 의한 것이라며 진상 조사를 촉구했다. 그날, 530GP에서는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사건의 진실을 추적했다.

고 김종명 대위·전영철·조정웅·박의원·이태련·차유철·김인창·이건욱 병장.
연천 GP 총기 사건의 희생자들이다. 고인들은 사후 1계급씩 추서되어 대전국립현충원에 안장되었다. 범인이라고 자백한 김동민 일병은 ‘상관 살해’ 등의 죄목으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겉으로는 사건이 일단락되었고, 과거 속으로 묻혀가는 듯했다. 하지만 유족들에게는 ‘미완의 사건’이었다. 당시 유족들은 ‘조작 흔적’이 있다며 의혹을 제기했지만 군 당국은 사건을 서둘러 마무리했다.

그리고 2년이 흘렀다. 지난 9월28일 유족들이 서울 프레스센터에 모습을 나타냈다. 기자회견을 자청하고 ‘국방부의 조작설’을 전면 제기하며 진상 조사를 촉구했다. 이 자리에는 김동민 일병의 아버지도 모습을 나타냈다. 자식을 잃은 부모와 자식을 죽인 아버지가 함께 기자회견장에 서 있었다. 선뜻 이해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나중에 알려진 일이지만 김일병의 아버지는 유족들의 설득으로 기자회견에 동참했다고 한다. 김씨는 “아들이 증거도 목격자도 없는데 왜 범행을 인정하는지 모르겠다”라며 망연자실해 했다.

여기서 커다란 의문점이 생긴다. 만약 유족들의 주장대로 군 수사당국의 발표와는 달리 북한군의 이동을 막기 위한 차단 작전 중 북측의 발포로 빚어진 사고였다면 ‘누가’ ‘무엇 때문에’ ‘왜’ 사건을 조작했느냐는 것이다. 

이에 대해 고 조정웅 병장의 아버지 조두하씨(51)는 “당시 남북한 관계에 해답이 있다. 2005년 6월17일 정동영 통일부장관(현 통합신당 대통령 경선후보)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면담했다. 사건 당일에는 전력 지원, 쌀 지원, 북한의 6자회담 복귀 등 굵직한 현안들이 놓여 있었다. 전방 GP 교전이 알려지면 남북한 관계에 찬물을 끼얹을 것이 뻔했고, 정부와 군 당국이 이를 우려해 벌인 일이다”라고 말했다.

<시사저널>은 당시 군 수사기록과 상황 보고서, 부대 일지, 장병 진술서, 530GP 병력 현황, 시체검안서, 증거물 감정서 등을 입수해 유족들의 주장과 대조해가며 사건에서 제기된 여덟 가지 의문점을 조목조목 풀어보았다.

 
2005년 6월19일 오전 02시30분께. 경기도 연천군 제28사단 81연대 530GP(전방관측소)에서 ‘꽝’하는 폭음과 총성이 울렸다. “적의 공격을 받고 있다” “대응 사격은 했는가” “상황을 보고해라” 등 전시 상태를 방불하게 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GOP대대 상황병은 ‘미상 확인 적으로부터 9발 피격’이라는 급전을 날렸다. 81연대에는 북한군의 공격시 발령하는 매트릭스가 발령되었다. 다른 부대 및 상급 부대에도 상황이 전파되었다. 연대 간부들도 모두 비상 소집되었다. 이 상황은 고속지령대(고지대)를 통해 합동참모본부(합참)까지 보고되었다.

① 북한군이 침입했다?

<시사저널>이 입수한 당시 군 수사기록, 상황 보고서, 부대 일지, 장병 진술서 등에 따르면  상황 근무자들과 GP 소대원들은 최초 상황이 발생했을 때 ‘북한군의 공격’으로 인지하고 있었다.
‘미상 적으로부터 530GP가 9발의 총격을 받았다는 내용 접수’ ‘530GP 및 GOP와 전화를 해 대응 사격 실시 여부 지속 확인’(81연대 지휘통제실장 정판영 대위), ‘옥상 쪽으로 포를 쏘지는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북한군이 공용화기를 쏘아서 건물이 무너지는 것으로 알았다’(생존 소대원), ‘북쪽의 도발이라 판단됨’(관측장교 김희준 소위) 등의 진술이 이어졌다.

상황이 종료된 후 국방부의 발표는 달랐다. ‘북한군 침투 상황’이 아니라 ‘내무실 총기 사고’라고 발표했다. ‘선임병들에게 앙심을 품은 김동민 일병이 내무실에 수류탄 1발을 투척하고 소총을 난사해 GP장을 포함한 8명이 사망했다’는 것이다. 국방부가 사고 경위 조사 후 발표한 사건 전말도 ‘김일병에 의한 내무실 총기 사고’였다.
유족들은 국방부의 수사 내용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최초 상황시 군의 모든 움직임이 ‘북한군의 공격’에 맞추어져 있었는데 어떻게 갑자기 내무실 총기 사건으로 바뀔 수 있느냐는 것이다. 또 당시 상황 보고 중에는 ‘내부 침입’이나 ‘내부 공격’이라는 말이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만약 GP 내부에서 폭음이 들렸다면 적 침투나 적 기습에 의한 상황 전파가 가능할까. 최첨단 탐지 장비를 운영하고 있는 최전방 경계 부대가 실제 상황과 내무실 사고를 구분할 수 없었느냐는 것이다. 당시 군의 비상 상황 전개, 매트릭스 발령 등은 무엇을 말하는가. 유족들은 국방부가 ‘북한군의 침투 상황’을 은폐하기 위해 내무실 총기 사고로 조작했다며 ‘조작설’을 주장하고 있다.


② 최초 상황 보고, 왜 다른가?

최초 상황시 ‘미상 화기 9발’이 시간이 흐르면서 ‘수류탄과 실탄’으로 바뀌었다. 연대 지휘통제실장(지통실장)인 정판영 대위는 ‘고지대 방송(530GP에서 총격 도발 9발 받았음) 후 사단 지통실장의 전화가 와서 고지대 내용과 동일하다’라고 답변했다. 상급부대인 사단에 ‘미상 화기 9발 피격’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준 셈이다. 정대위가 6월23일 군 수사기관의 요구에 의해 작성한 진술서에 자세히 나와 있다.
최초 ‘9발’은 보고자에 따라 여러 번 바뀐다. 28사단 정훈공보참모 이숙자 중령이 사단에 보고한 GP 공보 상황 보고에는 ‘탄약 10여 발’이다. 530GP 부대일지에는 ‘수류탄 1발, 실탄 25발’이다. 지통실 상황 일지와 판이하게 다르다. 6군단 헌병대가 6월23일 작성한 수사 발표 자료에는 ‘수류탄 1발, 실탄 44발’이다.
범행에 사용된 무기와 실탄이 ‘미상 화기 9발→탄약 10여 발→수류탄 1발, 실탄 25발→수류탄 1발, 실탄 44발’로 4번이나 바뀌었던 것이다. 왜 이런 차이가 나는 것일까. 탄피 하나까지 챙기는 군대가 아닌가. 이후 군에서 나온 530GP 사고는 수류탄 1개와 탄창 2개에 의한 총기 난사 사고로 맞추어져 있다.

상황 보고와 상황 전개 과정도 각각 다르다. 국방부는 최초 상황 시간을 02시36분이라고 밝혔다. 81연대 지통실 상황 일지와 같은 시간이다. 상황 일지에는 ‘3중대장이 530GP 방향에서 총격 청취, 530GP 확인 결과 상황병이 북한군이 들어왔다(라고) 속삭이며 말함’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81연대 작전장교 김형호 대위가 사단 지통실에 보고한 ‘상황 보고(최초)’에는 총격 상황을 접수한 시간대가 02시34분이다. 2분의 간격이 있다. 당시 급박한 상황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1분 1초에 따라 상황이 확연하게 달라질 수 있다.

 

③ 내무실 사고가 아니라 ‘차단 작전 사고?’

유족들은 GP 총기 사건은 차단 작전 중에 발생한 사고라고 주장한다. 이날 차단 작전 수행을 위해 간부 2명과 상병급 12명이 노루골 방향에서 작전 중 북한군의 미상 화기(RPG-7, 로케트포) 9발의 공격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 사고로 차단 작전지역(7~8발)과 530GP 옥상(1~2발)이 피격되었으며, 사망자 8명 중 6명은 노루골 차단 작전 지역에서, 2명은 530GP 옥상에서 사고를 당했다고 보고 있다. 사고 발생 시간도 군에서 발표한 02시30분께가 아니라 2005년 6월18일 22시~6월19일 오전 1시 사이에 일어났다고 보고 있다.  
 

 
GP에서 실시하는 차단 작전은 월북하려는 적이나 불순 세력을 막기 위한 것이다. 보통 주간 작전 (14시00분~16시00분)과 야간 작전(23시00분~01시00분)이 있다. 01시 이후에는 적으로 오인할 수 있으므로 01시 이전에 복귀하는 것이 원칙이다. 유족들은 이를 근거로 연천 GP 사고는 6월19일 01시 이전에 발생된 사고라고 주장한다.

사고가 발생한 날 새벽 유족들은 지통실장이던 정판영 대위(수색중대장)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정대위는 사망·부상 가족들에게 “폭탄이 폭발해 사망했다”라거나 “지뢰를 밟아 부상했다”라는 등으로 자식들의 소식을 전했다. 이때 유족 중 누구도 ‘내무반 총기 사고’라는 말을 듣지 못했다. 유족들의 말이 사실이라면 정대위는 왜 사망 경위에 대해 말을 바꾼 것일까.

조두하 연천 총기사건 유족대책위원회(유족 대책위)는 “차단 작전 중 북한군의 공격을 받았다는 증거는 여러 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포격 6~7발이 먼저 시작된 후, 530GP 옥상 포격은 8~9발째 진행된 후 정전되었다. 북한에서 GP 옥상 쪽으로 포를 쏘았을 것이라고 생각한 소대원의 진술도 있었다”라고 말했다.


④ 경계 근무 나갔다가 부상한 병사는 누구인가?

연천 GP사고에서 가장 안타까운 것은 늦은 후송으로 인한 추가 사망이다. 군 당국은 DMZ 출입규정을 준수한다며 7통문(DMZ 출입문)을 4시간 후에나 열었다. 이 때문에 부상병들의 응급조치와 후송이 늦어졌고,

 
경미한 부상인데도 과다 출혈로 인한 사망자가 나왔다. 이태련 상병은 사입구만 있는데 사출구가 없는 상처로 목숨을 잃어야만 했다. 군 당국의 처사에 유족들은 분노했다.

군은 왜 7통문의 문을 빨리 개방하지 않았을까. 7통문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2개의 열쇠가 있어야 한다. GP 상황실에 하나를 보관하고 다른 하나는 GP장이 가지고 있다. 당시 군은 GP장 김종명 중위가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열지 못했다고 했다.
군의 발표대로라면 김중위는 트레이닝복을 입은 채 체력 단련실에서 김일병에게 사살되었다. 김중위의 전투복은 당연히 자신의 방에 있었을 것이다. GP장 김중위가 가지고 있던 7통문 열쇠를 빨리 찾지 못할 이유가 없다. 유족들은 당시 김중위가 작전에 투입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2005년 6월22일 81연대 1대대 군의관 박정현 중위가 작성한 진술서에 의문이 생긴다. 박중위는 부상자를 후송한 후에도 2명의 경상자를 발견했다고 적고 있다. “허벅지에 찰과상을 입은 병사를 발견(경계근무 나갔다 복귀한 인원이기 때문에 늦게 발견됨)하여 응급처치 해주었으며 그로부터 수시간 후 하지에 여러 개의 열상환자를 발견(이 인원도 늦게 발견됨)하여 응급처치 해줌”이라고 적혀있다. 박중위가 말한 ‘근무나갔던 병사는 누구이고 왜 부상을 입은 것일까.
 

⑤ 사망자의 총기와 전투복의 행방은?

<시사저널>이 입수한 ‘530GP 부대 일지(05. 6.9(목)~18(목)’를 보면 사고 발생 하루 전날인 6월18일의 인원은 총 36명(간부 3명, 의무병 1명, 소대원 26명, 배속병 6명)이다. 부대 일지를 근거로 하면 당시 530GP K-1/K-2는 모두 34정이다. 수사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 무기를 반납한 사진에는 20정뿐이다. 14정이 부족했다. 나머지 총기의 행방이 묘연하다.

 
2006년 6월18일, 81연대 본부 중대원이 인터넷에 올린 글에서 총기 행방의 단서를 찾았다. 익명을 사용한 이 사병은 “사고 후에 폐기한다고 그곳에서 가지고 내려온 총과 방독면은 피로 물들어 있었고…”라고 적었다. 총과 방독면에는 왜 피가 묻어 있었고, 군에서는 왜 폐기 해야만 했을까. 유족들은 사망자들이 내무실에서 총격을 받은 것이 아니라 작전 중에 사망했고, 전투복을 입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사고 후 부대에서 보내온 사망자의 유품에 전투복이 빠진 것도 이상하다. 일반적인 관례에 따르면 사망자가 입었던 옷이나 평소 쓰던 물건들을 가족들에게 보내준다. 그런데도 부대에서는 전투복을 보내오지 않았다. 국방부의 발표대로 취침 중에 사망했다면 전투복은 장병들의 관물대에 있었을 것이다.


⑥ 총탄?혈흔은 조작되었나?

유족들은 국방부가 내무실 사고로 위장하기 위해 시신을 배치하고, 현장에 총탄흔이 있는 것처럼 조작했으며, 고인들에게 두 차례 총상을 가했다고 주장한다. 그 근거로 군 수사당국의 발표 내용과 자신들이 현장에서 파악한 단서가 맞지 않음을 강조한다.

다시 말해 김일병이 발사했다는 위치, 총탄흔의 모양, 총알의 파편과 탄심, 연발 총탄흔의 존재 여부가 군 발표와 달랐다는 것이다. 또 희생자들의 상처와 내무실 상태를 감안할 때 수류탄 폭발 흔적이 전혀 없다는 점도 들고 있다. 희생자들의 상처는 총상이라 하기에는 너무 크고, 포격의 흔적이 분명하며 이는 X-RAY상으로도 확인할 수 있었다고 유족들은 주장한다.


⑦ 김동민 일병은 가짜 범인이다?

김동민 일병은 진짜 범인일까. 현재까지 김일병이 범인이라는 유일한 증거는 자백뿐이다. 김일병의 범행을 목격한 사람은 한 명도 없다. 생존 사병들도 수류탄 폭음과 총소리만 들었다고 진술하고 있다.  

김일병이 범행에 사용한 총이나 수류탄 고리에도 지문이 없었다. 국방부는 김일병이 정은총 상병의 총을 가지고 범행을 했다고 발표했다. 김일병은 후방 초소 근무 중 후번 근무자를 기상시킨다는 명분으로 내무실로 내려왔다. 내무실에 들어오자마자 정상병의 K-1 소총을 꺼낸 후 수류탄과 25발 탄창 두 개를 사용하여 총기를 난사했다.

사건 정황상으로 보면 김일병의 지문은 총기 곳곳에 묻어 있어야만 했다. 또 김일병이 투척했다고 말하는 KG14 세열수류탄은 원기둥 형태의 수류탄 곽에 테이프로 봉해져 있고, GP장의 사인이 들어간 종이로 봉인되어 있다. 수류탄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테이프를 뜯고 뚜껑을 열고 꺼내 안전핀을 제거한 후 던져야 한다.

그런데도 지문 감식 결과 탄창이나 수류탄 손잡이 어느 곳에서도 김일병의 지문이 발견되지 않았다. 2005년 7월 5일 국방부과학수사연구소가 낸 감정서에는 “범행 증거물(탄창, 수류탄 손잡이)에서 지문이 현출되지 않았다”라고 되어 있다. 범행 당시 김일병은 지문을 감추기 위해 장갑을 끼거나 다른 도구를 사용하지 않았다.

김일병의 범행 동기도 석연치 않다. 국방부는 “김일병이 평소 선임병들로부터 잦은 질책과 욕설 등 인격모욕을 당한 데 앙심을 품고 선임병 등을 살해했다”라고 밝혔다. 당시 530GP의 내무실 분위기는 어떠했을까. 생존 소대원의 진술서에 나타난 분위기는 ‘화기애애’였다. “사병 상호간에는 존중과 경어를 사용하였다. 휴가시 계급 관념을 두지 않고 서로 반말을 사용했다. 휴가시에는 함께 놀기도 했다. 휴가를 마치고 복귀시는 위계질서, 선·후임병에 맞는 호칭을 사용했다. 김일병도 휴가지에서 상병급에게 반말을 하기도 했다. 김일병과 소대원들의 분위기는 좋았다”라고 적고 있다.

그렇다면 김일병은 왜 자신이 범인이라고 주장할까. 범행을 목격한 사람도 없고 증거도 없다. 연천 GP 총기 사건의 최대 의문점 중의 하나이다. 김일병의 아버지 김영래씨는 유족들과 만나 “동민이를 면회한 자리에서 사건 이야기를 하면 입을 닫아버린다”라고 말했다.

 
김동민 일병의 변호인인 법무법인 창조 이기욱 변호사는 고등군사법원에 무죄 추정 근거에 의해 항소했으나 기각되었다. 이변호사는 “김일병이 범인이라고 볼 수 있는 정황은 아무것도 없다. 일단 직접적인 증거가 없다. 그런데도 김일병이 자신을 범인이라고 자백하고 인정하고 있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이변호사는 ‘군법의 상관 살해죄 사형은 위헌’이라며 대법원에 헌법소원을 제기했다. 대법원도 이를 받아들여 재판 계류 중에 있다. 확정 판결 때까지 김일병의 재판도 정지된다. 최종 판결 시한은 정해져 있지 않아 2~3년이나 그 이상이 걸릴 수도 있다.

조두하 유족 대책위 대표는 “동민이는 처음부터 범인이 아니다. 군 헌병대가 직접 증거를 만들지 않은 데는 이유가 있다. 헌법소원을 통해 재판이 지연되면 국민의 관심에서 멀어질 때 증거 불충분으로 가석방하는 시나리오가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⑧ 김일병을 괴롭혔다는 선임 사병들은 왜 국가유공자가 되었나?

김일병에게 질책과 욕설, 폭행 등을 한 사병들은 어떻게 조처되었을까. <시사저널>이 입수한 ‘2005년 군 검찰의 수사 보고서’에는 7명의 사병(상병 신재희·정은총·김동업·유민호·임창용·일병 김유학·성천옥)들의 입건 여부를 조사했다가 모두 불입건 처리했다. 이 사건으로 입건된 사람은 부GP장 최충걸 하사와 김동민 일병이며 최하사는 구속되었다 풀려났다. 김일병의 범행도 직접 증거가 없는 상태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들 질책 사병들이 조기 전역은 물론 국가유공자 7급으로 지정되었다는 것이다. 군 복무 규정을 위반하고 8명을 살해한 동기를 제공한 사병들이 아닌가. 국방부는 왜 이들에게 ‘유공자 지정’이라는 특혜를 주었을까.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다.

 
유족들은 “군 복무 규정을 위반한 책임은 관용을 베풀 수도 있다. 부상자는 정신적 고통을 감안해 유공자로 예우할 수도 있다. 그 외 사병들에게 이런 특혜를 준 것은 무슨 이유인가. 질책 사병들이 국가 유공자가 된 이유와 누가 여기에 관여했는지 궁금하다”라고 말했다.

국방부는 유족들의 ‘조작설’에 대해 ‘꾸며낸 소설’이라며 일축했다. 박관용 국방부 정책홍보팀장은 “이미 수사가 종결된 사안이다. 국방부에서는 달리 더 조사할 계획이 없다. 이미 여러 차례 검증을 받았고, 김일병도 범행을 자백하고 있다. ‘북한군의 침입’으로 인지한 것은 수류탄과 총격으로 아수라장이 된 상황에서 나온 GP의 오인 보고였다”라고 말했다.

유족들은 연천 GP 총기 사건의 재조사를 촉구하고 있다. 국회 차원에서 진상조사위원회를 꾸려야 한다는 것이다. 국회 국방위원회 위원장인 김성곤 의원실은 “유족이 국방부의 조작설을 제기한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아직 유족측에서 재조사 요청이 들어오지 않았고, 재조사 여부는 아직 검토하지 않고 있다”라는 입장이다.
사고 당일 연천 530GP에서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사건 발생 2년이 흘렀지만 여전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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