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리우드행 티켓’ 꿈꾸는 브로드웨이
  • 김종철 (<익스트림무비> 편집장) ()
  • 승인 2007.10.29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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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 역사 맞는 ‘뮤지컬 영화’의 성장사

 
화려한 의상과 조명을 파트너 삼아 때로는 사랑과 행복의 기쁨을, 때로는 슬픔과 절망의 감정을 춤과 노래로 표현하는 뮤지컬 영화의 세계. 뮤지컬 영화의 역사는 영화 탄생의 시기와 비슷하다. 나날이 발전하는 영화 기술의 세계는 라이브로 음악을 연주하던 시스템의 한계를 고민하던 메이저 제작사의 노력으로 오디오 시스템 개발이 본격화되면서 이루어진다.
최초의 유성 영화였던 <재즈 싱어>(1927)의 상업적 성공에 고무된 할리우드 스튜디오들이 속속 제작에 참여하면서 뮤지컬 영화의 시대가 열렸다. 1929년 MGM에서 제작한 최초의 뮤지컬 영화 <브로드웨이 멜로디>는 당시 변화하는 사운드 기술을 적극적으로 도입해 선보인 작품으로, 뮤지컬 스타를 꿈꾸며 뉴욕으로 온 해리엇과 퀴니 자매가 겪는 꿈과 사랑, 그리고 좌절의 이야기를 그렸다. <브로드웨이 멜로디>는 4백만 달러의 대자본을 투입해 노래와 춤으로 이루어진 뮤지컬 영화의 전형을 제시한 것으로 평가받으면서 제2회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했다.
1920년대 말부터 할리우드는 브로드웨이의 작곡가들을 적극적으로 기용해 뮤지컬 영화 제작에 박차를 가했고, 이것은 1930년대 초부터 불어닥친 브로드웨이의 불황과 맞아떨어졌다. 또한 프레드 아스테어 등 일류 댄서들이 할리우드의 러브콜을 받고 진출하면서 춤과 노래의 비약적인 향상이 이루어진다. 이후 아스테어와 진저 로저스 콤비의 매혹적인 댄스는 영화 관객을 뮤지컬 관객으로 바꿔놓았다.
뮤지컬 영화는 영화 기술이 발전하면서 초기 스테이지 쇼와 같은 단순한 스타일을 벗어나 점점 더 많은 영화적 기교들을 동원하게 된다. 편집과 특수 효과 사용, 그리고 무대와는 다른 영화만의 연출 방식을 통해서 차별화를 꾀했다. 1930년대 말부터는 본격적으로 테크니컬러가 영화에 도입이 되기 시작했고, 이와 더불어 음향 시스템과 녹음 기술의 발전이 맞물리면서 뮤지컬 영화에 날개를 달아주게 된다. 의상의 화려함이 관객에게 제대로 전달되었고, 역동적인 댄스가 주는 흥분이 스크린에 제대로 재현되었다.
1930년대가 본격적인 뮤지컬 영화의 태동기라면 1940년대에서 1950년대에 이르는 시기는 할리우드에서 자리를 잡은 스타 시스템의 위력이 유감없이 발휘되면서 최전성기를 구가한다. <오즈의 마법사>(1939)의 주디 갈란드, <사랑은 비를 타고>(1952)의 진 켈리, 그리고 <춤추는 결혼식>(1941)의 프레드 아스테어와 리타 헤이워드 같은 배우들을 중심으로 완성도 높은 뮤지컬 영화들이 속속 발표되었다. 이후 1950년대 말부터 할리우드를 지배한 대작 영화 제작 붐에 편승해 이전의 작품과는 차별성을 꾀하는 큰 스케일의 작품이 뮤지컬 영화에서도 나오게 된다.
그러나 뮤지컬 영화는 1960년대 후반을 지나면서 쇠퇴기에 접어든다. 이는 엘비스 프레슬리와 같은 로큰롤 스타의 탄생과 팝 뮤직이 젊은 층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면서 일어난 변화이다. 존 트라볼타의 <토요일 밤의 열기>(1977)가 당시 젊은 층의 취향을 고스란히 반영해 대히트를 기록하기도 했다. 그 와중에도 밥 포시의 <캬바레>(1972)와 같은 정통 뮤지컬 영화의 걸작도 간간이 만들어지기는 했다. 1980년대와 1990년대는 뮤지컬 영화의 암흑기에 해당한다. 이따금 한두 편씩 나오곤 했지만 양과 질적인 면에서 과거에 비해 턱없이 부족했다. 1990년대 뮤지컬 영화의 숨통을 이어간 것은 뜻밖에도 디즈니의 애니메이션들이다. <인어공주> <미녀와 야수> <라이온 킹>과 같은 작품에 다량의 노래를 삽입해 뮤지컬 영화의 기억을 불러일으킨 것. 물론 실제로도 이 작품은 브로드웨이의 무대에 진출했다.

무대극에서 시작해 영화로 태어나기까지

 
과거 뮤지컬 영화의 전통과 완전히 단절된 듯했던 할리우드는 2000년대 접어들면서 큰 변화를 맞이한다. 이 시기에는 그 어느 때보다 활발하게 뮤지컬 영화 제작이 시도되었다. 롭 마샬 감독의 <시카고>가 거둔 놀라운 상업적 성공이 가져온 축복이다. 지금 할리우드 뮤지컬 영화는 브로드웨이에서 성공한 작품들을 영화화하는데 열을 올리고 있다. 수많은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은 할리우드 뮤지컬 영화들 속에서 무대극에서 시작해, 영화로 새롭게 태어나 재조명된 대표적인 작품들을 만나보자.
지난 10월16일 8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데보라 커는 <지상에서 영원으로>라는 작품으로 유명하지만, 뮤지컬 영화 팬들에게는 월터 랭 감독의 <왕과 나>(1956)에서의 영국인 가정교사 안나로 기억된다. 마가렛 랜든이 1944년에 발표한 소설 <애나와 샴의 왕>을 원작으로 1951년 초연되었던 뮤지컬이 영화의 베이스이다. 영화로서는 1946년 존 크로웰 감독의 영화에 이어 두 번째 작품이며, 이후 주윤발과 조디 포스터 주연으로 노래와 춤이 빠진 형태로 리메이크되기도 했다. 극 중 흘러나오는 <Shall We Dance> <Something Wonderful> 두 곡이 특히 유명하다.
1950년대 뉴욕의 뒷골목을 어슬렁거리는 10대 청소년들의 사랑과 방황, 그리고 비극적인 죽음을 그린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1961)는 할리우드에 대작 영화 붐이 일던 시기에 제작된 70mm 영화이다. 셰익스피어의 고전 희곡 <로미오와 줄리엣>을 뼈대로 삼아 1957년에 초연된 브로드웨이 뮤지컬로 영화 버전의 경우 가장 성공적인 영화화 사례로 평가되고 있다.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는 뮤지컬 영화 변화의 시발점이다. 그동안 만들어진 대다수의 할리우드 뮤지컬 영화들은 해피엔딩을 통한 ‘꿈의 세계’를 실현하는 데 중점을 두었던 반면, 이 영화는 청소년들의 대립 관계를 통해 인종차별과 같은 사회성 짙은 이야기를 주제로 호평을 이끌어냈다. 뉴욕 도심 곳곳에서 이루어진 촬영 덕분에 생생한 현장감이 돋보이며, 제롬 로빈스의 안무로 이루어진 현대 무용과 레너드 번스타인의 클래식 음악, 재즈의 조화가 강렬하다.
세상을 떠난 스크린의 요정 오드리 헵번의 눈부신 아름다움이 돋보이는 <마이 페어 레이디>(1964)도 이상적인 영화화의 사례로 손꼽힌다. 원작은 브로드웨이에서 7년간 장기 공연된 버나드 쇼의 작품으로, 영화는 원작의 정수를 살리는 한편 영화만의 매력을 선보이며 성공을 거두었다. 뛰어난 영상과 음악적 구성이 탁월하며, 버릇없고 품위 없는 말괄량이에서 우아한 귀부인으로 거듭나는 과정을 통해 영국 계급 사회에 대한 풍자적 메시지를 담아냈다.
한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뮤지컬 영화라면 단연코 로버트 와이즈 감독의 <사운드 오브 뮤직>(1965)을 꼽게 된다. 1959년 11월 브로드웨이 무대에 올려진 후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며 영화로 진출했다. <사운드 오브 뮤직>은 같은 이야기이지만 무대와 영화의 차이점을 극명하게 보여준 대표적인 뮤지컬 영화이다. <도레미송> <에델바이스>처럼 주옥 같은 노래는 알프스 산맥의 그림 같은 풍광과 함께 잊을 수 없는 감동을 안겨주었다. 무대에서는 도저히 재현할 수 없고 영화 작업에서나 가능한 로케이션 촬영이 주는 뛰어난 영상미가 뮤지컬 영화의 존재감을 보여준 경우이다. 줄리 앤드류스는  <메리 포핀스>(1964)와 이 영화의 성공으로 할리우드의 대표적인 뮤지컬 배우가 되었다.
1970년대 작품으로는 날카로운 시대 반영과 사회 비판의 메시지를 담은 밥 포시의 걸작 <캬바레>(1972)가 대표적이다. 미국인 소설가 크리스토퍼 어셔우드의 <베를린 이야기>를 원작으로, 1966년 홀 프린스 연출로 브로드웨이 무대에서 초연을 가졌다. 2차 세계대전을 앞둔 독일 베를린을 배경으로 캬바레에서 일하는 샐리 보울스의 삶을 그린 작품이다. 그 어떤 뮤지컬 영화보다 높은 평가를 받는 것은 영화배우가 아닌 실제 뮤지컬 배우였던 라이자 미넬리의 다시는 재현할 수 없는 노래와 춤, 그리고 혼신을 다한 열연 덕분이다.

<시카고>의 성공으로 뮤지컬 영화 ‘부활’

 
이후 침체기에 빠진 뮤지컬 영화의 화려한 부활은 <시카고>를 통해 이루어진다. 작가 모린 왓킨스가 1924년에 실제 일어났던 살인 사건 재판을 모티브로 이야기를 구성한 <시카고>는 연극 무대로 먼저 올려진 작품이다. 이후     <시카고>(1927) <록시 하트>(1942) 두 편으로 영화화되었고, 훗날 베테랑 안무가 밥 포시에 의해 1975년 브로드웨이 무대에서 초연을 가졌다. 롭 마샬의 <시카고>는 이 뮤지컬의 영화 버전으로 4천만 달러의 제작비를 들여 리차드 기어, 캐서린 제타 존스, 르네 젤위거 등 할리우드 스타들의 참여로 낭만적이며 퇴폐와 향락에 찌든 1920년대 시카고의 모습을 멋지게 재현했다. 영화 <시카고>는 골든글러브 최다 노미네이트가 증명하듯 높은 완성도와 뛰어난 오락성을 갖추었고, 배우들의 연기도 최고 수준에 이른다. 감옥과 재판정을 오가며 진행되는 극영화 스타일의 현재 시점과, 시간·공간적 제한을 초월해 캐릭터의 감정을 드러내는 춤과 노래의 무대를 분리시킨 점이 독특하다. <시카고>는 현대 브로드웨이 뮤지컬 영화의 결정판으로 상업성과 작품성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은 사례로 지목되며 할리우드 뮤지컬 영화 부활의 결정적 역할을 했다. 영화의 히트 이후 국내에서 브로드웨이 순회 공연 팀의 <시카고>와 국내 캐스트의 <시카고>가 무대에 올려져 흥행에 성공을 거둘 정도로 영화 <시카고>의 흥행 여파는 컸다.
조엘 슈마허의 <오페라의 유령>은 다른 영화들과 달리 무대극과 영화라는 차별성이 크지 않았다. 이는 제작자로 참여한 앤드류 로이드 웨버의 입김이 크게 작용한 결과이며, 그로 인해 무대 뮤지컬의 ‘필름 기록’이라는 평가를 듣기도 했다. 이 작품에서 흥미로운 대목은 영화 자체보다 국내 발매된 DVD 타이틀에 수록된 음성 해설이다. 국내 <오페라의 유령> 공연 팀의 주요 멤버들이 참여해 무대와 영화의 느낌, 차이점에 대한 얘기를 들려주기 때문이다.
최근 가장 주목할 만한 작품은 빌 콘돈의 <드림걸즈>(2006)이다. 무명의 백 보컬로 활동하는 3명의 흑인 여성들의 성공담과 우정을 다룬 영화이다. 최근 몇 년간 할리우드에서 제작된 뮤지컬 영화들 가운데 가장 대중적인 취향이 강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코믹 패러디 영화의 대가로 잘 알려져 있는 멜 브룩스 감독의 <프로듀서스>(2005)도 <시카고> 이후에 나온 뮤지컬 영화 목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이다. 이 영화는 애초 영화로 먼저 제작되었다가 거꾸로 브로드웨이로 진출했고, 다시 영화로 재현된 것이다. 공연 작품마다 망해서 투자금을 빼돌려 거액을 챙기려는 뮤지컬 제작자의 음모를 코믹 터치로 그린 <프로듀서스>는 예상 밖의 호평과 성공으로 주목을 받았다. 그 밖에도 푸치니의 오페라 <라보엠>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브로드웨이 뮤지컬을 영화화한 <렌트>(2005)도 뮤지컬 영화 팬들의 눈길을 끌었다. 할리우드는 지금 브로드웨이 뮤지컬과 열애 중이다. 블록버스터만큼이나 시청각적 재미와 즐거움을 추구하는 뮤지컬 영화의 세계. 당분간 브로드웨이 뮤지컬과 할리우드의 달콤한 밀월여행은 계속 이어질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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