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영권 물려주는데 왜 피를 따지나”
  • 김진령 기자 jy@sisapress.com ()
  • 승인 2007.12.17 1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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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경영인에게 회사 맡기고 2선 후퇴한 박종규 KSS해운 고문“삼성 사태, 비자금 쓰게 만드는 사회 시스템에도 문제”

 
베이트 없는 회사’, ‘비자금을 만들지 않는 기업인’, ‘자식에게 기업을 넘겨주지 않는 기업인.’ 박종규 KSS해운 고문(72) 하면 떠올리는 이미지들이다. 그가 창업한 KSS해운은 지난해 매출액 8백40억원에, 순이익 1백90억원을 올린 탄탄한 중견 기업이다. 재벌 계열의 유명 해운회사들이 비자금 조성 등의 비리로 인해 몇 년에 한 번 꼴로 세무조사를 받거나 거액의 추징금을 물고 있지만 KSS해운에게는 다른 나라 이야기이다. 박고문은 KSS해운 사장 자리를 전문경영인에게 물려주고 현재 2선으로 물러나 있다. 그는 “기업을 마치 DNA를 나눠주듯이 자식들에게 물려주는 것은 바보짓이다”라고 단언했다.
그는 KSS해운의 1대 주주(31.43%) 자격으로 주주총회에는 참석하지만, 회사 경영에는 사실상 손을 뗐다. 대신 경제 민주화를 위한 사회 활동에 열중해 경실련 중앙위원회 위원장을 맡았고 바른경제동인회라는 단체를 만들어 이사장을 지냈다. 2004년부터 2006년까지 규제개혁위원회 위원장직을 수행하기도 했다. 그가 기업 경영인으로 평소 주창해온 모토는 ‘투명 경영’과 ‘합리적인 사회 구현’이었다.
그는 2005년 8월 위암 발병으로 위를 잘라내는 큰 수술을 하고는 제주도로 내려갔다. 항암 치료를 받으라는 주변의 권유도 있었지만 공기 좋고 스트레스 받을 일 없는 제주도에서 살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그는 “제주도 생활 이후 석 달에 한 번씩 서울에 올라와 정기 검진을 받는 것을 빼놓고는 항암 치료 없이 건강하게 잘살고 있다”라고 자랑하기도 했다.

제주도 생활이 적적하지 않은가?
나는 외로움을 모른다. 사업 하면서는 책도 못봤다. 올해는 책을 80권이나 읽었다. 이전에 사놓은 책부터, 역사책, 과학책, 일본책까지 닥치는 대로 읽는다. 책이 떨어지면 인터넷으로 주문한다. 뉴스는 신문으로 읽어야 제 맛이기에 뉴스 사이트에는 안 들어간다. 초전도물질연구나 DNA, 나노테크 등 최신 테크놀로지에 관한 책도 읽고 있다. 이런 책들을 읽으면서 떠올린 생각이지만 사업 하는 사람은 과학자들의 덕을 많이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학책을 읽고 미국에서 엔지니어 생활을 하는 첫째와 셋째 아들에게 “과학자가 훌륭하다”라고 e메일을 쓰기도 했다.
전문경영인에게 회사를 맡겼는데 걱정은 없나?
내가 그만둔 뒤 회사가 더 잘된다. 진작 그만두었어야 했다고 본다. 전권을 주니까 더 잘한다. 상장까지 하고(박고문은 사장 재임시 KSS해운의 주식시장 상장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이 회사는 지난 가을 상장했다). 1995년 사장직에서 물러날 때 임직원들에게 “나 하나 먹여 살려달라”라고 부탁하며 일체 간여하지 않겠다는 말도 했다. 회장실도 다른 층으로 옮겼다. 7년 만에 회장도 그만두고 고문으로 물러났다.
내가 약속한 것을 지켜야 회사가 돌아간다. 위임 전결 규정을 만들면 그대로 지켜야 한다. 은퇴 뒤 내가 회사에 자꾸 나타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어떤 조직이든 사장이 인사권을 행사하지 못하면 제구실을 할 수 없다. 직원이 잘못해 회사가 망한다면 그것은 내가 사람을 잘못 선택한 것이기 때문이다. (주주로서) 나는 이익배당만 잘해주면 더 바랄 것이 없다.
전문경영인 체제에서는 ‘주인 없는 회사’의 단점 같은 부작용이 생길 수 있는데.
주인 없는 회사의 단점은 의사 결정 속도가 늦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주인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임기의 문제이다. 오너 경영인에게는 임기가 없기 때문에 잘못을 해도 책임을 물을 수 없다. 반면 임기를 주주에게 물어야 하는 전문경영인은 항상 책임을 의식해야 한다. 임기만 확실하게 보장한다면 의사 결정을 화끈하게 할 수 있다.
KSS의 지분은 누구에게 물려줄 것인가?
3분의 1 원칙을 지키겠다. 지분을 3분해서 하나는 사회에 기증하고, 또 하나는 사주조합에 넘기겠다. 가장으로서의 역할도 해야 하지 않겠나. 나머지 3분의 1은 가족에게 유산으로 남기겠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핏줄에게 재산을 물려주는 것이 흠은 아니지 않은가?
나의 결정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 경영권을 물려주는데 왜 피를 따지나. 지난해 어느 단체에서 나에게 아름다운 기업인 상을 주었다. 그때 수상 소감을 말하면서 가족끼리 돈 문제로 얽히면 서로 싸우고 불화를 빚게 된다고 했다. 아버지가 재산이 많으면 자식들이 ‘아버지=돈’이라고 생각한다. 평소 고 유일한 선생을 존경했다. 유선생의 발뒤꿈치라도 따라가려면 가족 상속을 의식해서는 안 된다고 본다.
그렇다면 경영권 상속도 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인가?
작은 기업은 아버지가 아들에게 가업을 물려주듯이 경영권을 상속해도 괜찮다. 또 그렇게 해야 능률을 살릴 수 있다. 그러나 대기업이 그렇게 하면 경쟁력을 잃게 된다. DNA만 믿고 경영권을 후손에게 넘겨주는 기업이 발전할 리 없다. 돈 잘 버는 사람에게 물려줘야지. 꼭 자식에게 물려주고 싶다면 그 자식을 검증해볼 필요가 있다. 스스로 유사 업종에 취업해서 능력을 키우고 누구나 인정하는 실적을 낸다면 스카우트를 해서 회사를 물려주어도 좋다. 그냥 물려주면 기업도 망치고 자식도 망친다. 기업은 사유물이 아니고 사회의 공기이다. 재산은 상속할 수 있지만 경영권은 상속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사업에 관심 있는 자녀도 있을 텐데.
한 번은 서울에서 사업을 하는 둘째아들에게 “우리 회사 사장 해보고 싶냐. 사장하고 싶으면 KSS해운이 상장될 경우 자력으로 20%의 지분을 사들이면 된다”라고 제안한 적이 있다. 그랬더니 둘째가 “시장에 아버지 회사보다 더 좋은 주식이 꽉 찼다. 나는 갑과 을의 관계에서 갑이 될 것이다. 해운회사는 지게꾼으로 언제나 을이다”라며 사장 제의를 거부하더라. 나는 둘째의 그런 용기, 독립심이 가상하다고 생각했다.
(지난 2000년 박고문이 펴낸 자서전 <손해를 보더라도 원칙은 지킨다>에 이 둘째아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둘째가 유학 갔을 때 아무리 아르바이트를 해도 6백 달러 이상은 벌기 힘들다며 최소 생활비인 월 7백50달러에서 모자라는 1백50달러만 보내달라는 애절한(?) 편지를 보냈으나 아버지는 이를 들어주지 않았다. KSS해운이 세무조사를 받을 때 가택 수색을 나온 국세청 직원들이 장롱에서 이 편지를 발견하고는 두 말 않고 철수했다고 한다. 편지가  곧 박고문의 투명 경영을 그대로 증명해준 셈이다.)
최근 삼성 비자금 조성 의혹으로 세상이 떠들썩하다.
진상은 검찰의 수사가 끝나야 알겠지만 예전에 비해 많이 좋아진 것 같다. 예전에는 비자금 숨겨놓을 데가 많았다. 지금은 실명제 때문에 임직원 명의를 차용한 것 같다. 그만큼 비자금 만들기가 어려워졌고 오너를 견제할 수도 있는 것이다.
문제의 비자금이 회사 경영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사람이나 집단을 관리하기 위한 자금이지 수뢰 자금은 아닌 것 같다. 그렇다 해도 비자금을 만들었다면 중대한 회계 부정에 해당한다. 회계 부정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회사 업무를 위해서 비자금을 만든 경우가 있다. 또 하나는 사주가 개인 사생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비자금을 만들어 쓰는 경우이다. 후자의 경우는 도덕적으로 말이 안 된다. 첫 번째 경우는 넓은 의미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사회가 전반적으로 그런 것을 요구했기 때문에 기업으로서는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한 정치인이 ‘삼성이 해외에서는 일류로 깨끗하게 사업하면서 국내에서는 왜 지저분하게 구느냐’라고 일갈했지만 외국에서는 뇌물을 요구하는 일이 없다. 정계와 관계가 깨끗해야 비자금을 만들지 않는다.
비자금이 필요악이란 말인가?
완벽주의를 추구하더라도 방법론에서는 융통성이 있어야 한다. 회사 경영에 필요해서 어쩔 수 없이 만든 비자금이라면 정상을 참작해주어야 한다. 일종의 사회적 비용을 전가시킨 것이 아닌가. 나나 우리 회사는 아주 예외적인 케이스이다. 사회가 그렇지 않은데 회사에만 완벽하라고 요구하면 안 된다.
박고문은 비자금이나 리베이트 없는 회사를 만들지 않았나?
KSS해운의 경우는 예외적이다. 그래서 회사가 제대로 성장하지 못한 측면이 있다. 우리 사회에서 비자금을 쓰지 않고는 대기업이 되기 힘들다. ‘김우중이 하는데 나라고 못하겠느냐’라는 생각이 들던 때도 있었다. 대기업으로 크려면 은행 돈도 많이 빌려야 하는데, 돈 보따리 없이 어떻게 큰돈을 장만할 수 있는가. 은행 융자나 정책 금융을 이용하려면 뒷돈을 주어야 했다. 정계나 관계의 고위직은 물론 말단까지 돈이 들어가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았다. 이런데 삼성이라고 배겨날 수 없었을 것이다.
나는 1970년대에 리베이트 없는 회사를 만들겠다고 결심한 뒤 회사가 커지면서 이 결심을 유지해야 할까 말까 고민했다. 사업을 더 키우려면 돈이 필요했다. 그러다 결국 원칙을 지키기로 했다. 큰 회사를 만들려는 사람은 많지만 깨끗한 회사를 만들려는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KSS해운은 선박 구입 자금을 대부분 외국계 금융기관에서 빌린다. 과거에는 융자의 3%를 리베이트로 뜯겼기 때문에 국내 금융기관 이용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삼성 사태의 본질은 무엇이라고 보는가?
삼성 사태의 가장 큰 문제는 차명계좌를 이용한 것보다는 비자금을 어떻게 조성했느냐에 있다. 하지만 세금 부과 시효가 5년이고, 김용철 변호사가 대부분 5년 전의 이야기를 하고 있어 삼성이 세금을 더 내야 하는 부분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삼성 정도면 혈연에 의한 경영권 세습에 연연하지 말아야 한다. 나는 친인척을 더 못 믿는다. 기업을 운영한다면 배당을 더 받을 생각을 해야지, 왜 후계 타령, 피 타령을 하는지 모르겠다. 대기업은 주식회사라는 이름에 걸맞게 주주 이익 우선으로 가야 한다. 국제 경쟁력 강화를 위해서라도 그래야 한다.
다만 이번 사건이 대선 선거운동이 시작되는 시점에 터져 나와 선거 전략에 이용되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있다.
성향이 보수적으로 많이 변한 것 같은데.
과거에 우리 사회가 오른쪽으로 가 있을 때는 좌파로 몰리면서도 할 얘기를 했다. 요즘은 우리 사회가 너무 왼쪽으로 가 있기에 오른쪽에 서서 얘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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