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미어리그행도 한 걸음부터…
  • 한준희 (KBS 축구해설위원·<풋볼위클리> 편집장) ()
  • 승인 2008.01.21 1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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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인방’ 부진 속 한국 선수 진출 주춤…설기현의 행로가 모범적

 
물밀듯 쏟아져 들어오는 유럽 축구에 ‘눈높이’가 맞춰진 축구팬들이 K-리그를 등한시하게 된다는 견해도 존재하지만, 대표팀 A매치와 확연히 구별되는 클럽 축구의 본성이 널리 알려지면서 궁극적으로 우리의 클럽 축구 발전에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유럽 축구에 대한 접근성이 상승한 것은 역시 유럽에서 활약하는 우리 선수들의 수효 증가와 직접적 관련을 맺는다. 그중에서도 네 명의 우리 선수가 활약하고 있는 프리미어리그는 방송 중계뿐 아니라 모든 미디어에서 초미의 관심사이다. ‘프리미어리그 4인방’에 관한 뉴스가 연일 인터넷 포털의 헤드라인을 장식하고 있으며, 국내에서 쏟아지는 기사들에 결코 만족하지 못하는 열성 축구팬들은 이 순간에도 영국의 웹사이트들을 섭렵하고 있다.

클럽들 상황도 선수들 입지에 불안 요소로

하지만 올겨울 쏟아지고 있는 국내외 프리미어리그 소식들 가운데 우리 팬들의 가슴을 시원하게 만드는 뉴스는 그다지 많지 않은 듯하다. 그 어느 때보다 첨예한 팀 내 경쟁에 직면한 프리미어리그 4인방의 입지는 여전히 호전될 기미가 없다. 그뿐만이 아니다. 1월 이적 시장에서 잉글랜드의 문을 노크하고 있는 다른 태극전사들에게서도 희소식이 들려오지 않는다. ‘코리언 프리미어리거’의 수효가 더 늘어나리라고 기대해온 우리 팬들에게는 적어도 아직까지는 실망스런 상황의 연속이다.
이전에도 한 차례 언급한 바 있듯이, 프리미어리그 4인방의 어려움은 사실상 올시즌 개막 당시부터 어느 정도 예상되었다.
박지성의 소속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올시즌을 앞두고 질적·양적 선수 보강에 성공했다. 한마디로 지난 시즌에 비해 훨씬 더 뛰어난 선수단이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성공을 누린 알렉스 퍼거슨 감독이 지금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선수단을 “내가 이끌었던 모든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팀들 가운데 최고”라고 말하는 것은 결코 사기 진작용 립서비스가 아니다. 미드필드와 공격진의 총체적 수준을 고려할 때, 지금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유럽 전체를 통틀어 프리메라리가의 바르셀로나와 함께 가장 괄목할 만한 역량의 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크리스티아노 호날두+10’의 인상을 풍겼던 지난 시즌은 이제 잊어야 한다.
이영표가 소속된 토트넘의 새 감독 후안데 라모스는 필요 이상으로 비싸게 데려온 공격수 대런 벤트, 실책을 연발해온 수비수 유네스 카불, 아직까지 별반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는 미드필더 케빈프린스 보아텡과 같은 선수 영입에 대해 클럽 수뇌부 및 전임자 마틴 욜을 원망할지 모르지만, 적어도 레프트백 개럿 베일에 관해서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 올시즌 부상으로 결장하고 있는 시간이 길기는 하지만, ‘미래의 특급 윙백’ 베일을 보유하고 있는 것을 마다할 감독은 그리 많지 않다.

 
설기현의 풀럼과 이동국의 미들스브러는 한마디로 절박한 상황이다. 올시즌 프리미어리그 ‘최악의 팀’이 분명한 더비 카운티를 제외하고, 나머지 강등권 두 자리에 들지 않기 위해 투쟁하는 예닐곱 개 클럽들 가운데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천문학적 중계권 계약에 힘입어 ‘프리미어리그에 단지 소속되어 있는 것’의 값어치가 물경 6천만 파운드(약 1천1백억원)에 이르는 현 상황에서, 강등을 피하기 위한 사투는 그야말로 피비린내가 날 지경이다. 지금의 ‘돈벼락’을 1년이라도 더 누리기 위해서는 모든 클럽들이 “강등만은 면해야 한다”라는 대명제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올시즌 프리미어리그의 강등권 싸움은 틀림없이 시즌 마지막 라운드에 이르기까지 계속될 공산이 크다.
결국 선수단의 질적·양적 성장을 이루어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베일을 보유하고 있는 토트넘, 강등권 투쟁으로 내몰려 있어 장기적인 부류의 인내심을 지니기 어려운 풀럼과 미들스브러, 우리 선수들이 속해 있는 이 클럽들 각각의 상황은 우리 선수들의 입지를 단 한 순간도 마음 놓지 못하게끔 하는 주요한 배경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을 한탄할 수만은 없다. 이는 어쩌면 유럽 리그, 그것도 유럽 최정상 대열의 리그에서 뛰고 있는 모든 축구 선수들의 ‘숙명’과도 같은 일이기 때문이다. 뛰고 있는 리그, 소속된 클럽의 규모가 크면 클수록 끊임없이 계속되는 첨예한 경쟁을 피하기란 아예 불가능하다. ‘빅리그’의 기본적 속성이 선수를 성장시키는 곳이라기보다 ‘완성된 선수들’이 모여 뜨거운 경합을 펼치는 곳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러한 맥락에서, 요즈음 우리 선수들 대다수가 프리미어리그 진출에만 온 신경을 기울이는 데는 다소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다.
물론 프리미어리그는 여러 가지 메리트를 지닌다. 지금 세계에서 가장 ‘돈 많은’ 리그임에 틀림이 없고, 이에 비례해 평균적으로 다른 빅리그들보다 연봉도 후하다.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영어 문화권’이라는 강점이 있는 데다, 가족을 동반할 경우 배우자와 자녀들에게도 생활과 교육의 측면에서 유리한 점들이 존재한다. 영국에는 ‘유럽 최대의 한인 거주 지역’ 뉴 몰든(New Malden)과 같이 별반 불편 없이 한국식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곳도 있다.
뿐만 아니라, ‘박지성과 이영표’로 상징되는 선배 선수들의 성공적 정착, 그리고 이에 따른 국내 방송과 언론에 의한 집중적 노출이 유럽을 꿈꾸는 후배 선수들로 하여금 프리미어리그를 매우 친숙한 곳으로 인식하도록 만드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왜 꼭 프리미어리그인가?
유럽 진출의 꿈을 키우는 한국 선수들에게 가장 모범적이고도 현실적인 교본은 적어도 필자가 보기에 설기현이다. 설기현은 중간급 리그인 벨기에의 작은 클럽 로열 안트워프에서 출발해 벨기에 최고 명문 안더레흐트를 거친 후 잉글랜드로 날아가 2부 리그(챔피언쉽) 울브즈에서 뛰었다. 그리고 1백35년만에 프리미어리그를 밟게 된 레딩에서 한 시즌을 보낸 후, 레딩보다 큰 클럽 풀럼-저조한 성적으로 현재 고난을 겪고 있기는 하지만-으로 이적했다. 그야말로 한 걸음 한 걸음씩 내디뎌온 셈이다. 이 행보는 여러 가지로 시사하는 바가 있다.

하부 리그에서 능력 키워가는 것이 현실적

물론 세계 축구판에는 ‘작은 곳’으로부터 단번에 ‘거대한 곳’으로 옮겨가는 선수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마케팅적 가치를 논외로 할 경우, 작금의 유럽 클럽들이 어떤 아시아 출신 선수를 향해 이러한 종류의 신뢰를 보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현실적으로, 남미와 아프리카 선수들에 비해 아시아 선수는 유럽의 관점에서 ‘덜 검증된’ 선수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전반적 수준의 견지에서 ‘아시안컵’의 권위가 ‘코파 아메리카’나 ‘아프리칸 네이션스컵’에 비해 높은 것일 수 없음을 떠올려보면 알기 쉽다. 또한 유럽의 클럽은 FIFA 월드컵 한두 경기에서의 반짝 활약에 결코 무한 신뢰를 보내지도 않는다. 따라서 아시아의 선수는 자신의 가치를 좀더 꾸준하게 선보일 필요가 있고, 그것을 해내기에 용이한 무대가 바로 유럽의 중소 리그 내지 빅리그의 하부 리그인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프리미어리그 진출의 꿈을 꾸는 우리 선수들에게 필요한 또 하나의 필수 전제는 다름 아닌 ‘능력의 향상’이다. 우리는 막연한 도전에 나섰다가 유럽에서 실패를 경험하고 돌아온 선수들을 예전부터 목격해왔다. 타고난 신체 조건에다 어린 시절부터의 체계적 축구 교육이 더해진 외국 선수들과 경합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능력에 대한 냉철한 판단과 그것을 향상시키려는 노력이 선행되어야 함은 물론일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것을 해내기에 용이한 장소 또한 중소 리그 내지 하부 리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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