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동티 나는 동티모르, 악몽 슬금슬금
  • 김회권 기자 judge003@sisapress.com ()
  • 승인 2008.03.03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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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피격, 반군 지도자도 현장에서 사살돼 2006년 반란 때 생긴 난민 문제 해결도 난항

 
동티모르는 불행한 현대사로 얼룩져 있다. 포르투갈의 식민 지배를 벗어나 1974년 독립했지만 1976년 인도네시아는 일방적으로 동티모르를 침공해 병합을 선언했고 국제 사회는 이를 묵인했다. 그러나 1991년 평화 시위 행렬에 인도네시아군이 무자비하게 발포해 6백여 명이 사망·실종한 ‘산타크루스 대학살’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지지 여론을 얻기 시작했고 결국 유엔 평화유지군의 방패 아래 제헌의회를 구성한 뒤 2002년 5월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된 사나나 구스마오가 독립을 선언했다.
동티모르는 2004년 기준으로 1인당 국민소득이 5백50달러에 불과한 세계 최빈국 중 하나이지만 뉴스 가치는 경제력보다 큰 편이다. 인권의 가치를 기반으로 탄생한 21세기 최초의 국가이며 유엔 평화유지군의 활동이 가장 좋은 결과를 얻은 곳이기 때문이다.
최근 동티모르가 세계 언론의 국제면에 다시 등장하는 것은 동티모르의 라모스 호르타 대통령이 지난 2월11일 반군의 총에 맞아 중상을 입었기 때문이다. 1996년 노벨평화상 수상자이기도 한 그는 지난 2006년 7월에 물러난 알카티리 전 총리를 대신해 총리직에 올랐으며, 지난해 5월 대선에서 정치적 동지인 구스마오 현 총리(당시 대통령)의 지지를 얻어 압승했다.

반군측 “담판하러 갔는데 경호원이 먼저 쐈다”

그에 대한 총격을 지시한 사람은 반군 지도자인 알프레도 레이나도 소령으로 알려졌지만 그는 현장에서 사살되었다. 오히려 반군의 한 멤버는 인도네시아 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레이나도 소령은 단지 오르타 대통령과 담판을 하기 위해 갔을 뿐이다. 오히려 총을 먼저 쏜 쪽은 호르타의 경호원이었다”라고 말해 논란이 되고 있다.
반군의 레이나도는 2006년에 갑자기 등장해 동티모르에 혼란을 가져온 인물이다. 그는 2006년 2월8일 군대 내에서 동티모르의 서부 출신자가 동부 출신자들에 비해 차별 대우를 받고 있다고 주장하며 4백4명의 군인들을 이끌고 탈영했다. 이후 군 이탈자는 총 5백91명으로 늘어나는데 이는 동티모르군(FDTL) 총 인원 1천5백여 명의 40%에 이른다. 당시 총리였던 알카티리는 “정부가 통제할 수 없는 군인은 필요없다”라고 말하며 이들을 강제 전역시켰고 이를 계기로 사태는 악화되었다.
같은 해 4월28일 동티모르의 수도 딜리에서 동티모르군과 전역 군인 사이에 유혈 충돌이 벌어졌다. 일반 국민도 여기에 휘말려 10명이 사망했다. 사망자가 생긴 것도 문제였지만 수도인 딜리를 빠져나가는 난민들이 수없이 발생했다. 레이나도는 “알카티리를 물러나게 하고 구스마오에게 전권을 넘기면 우리는 투항할 것이다”라고 말하며 그의 퇴진을 요구했다. 동티모르는 대통령제를 택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내각제에 가깝다. 구스마오 대통령은 상징적인 의미만 있을 뿐 권력은 알카티리 총리가 갖고 있었다. 그 권력을 구스마오에게 넘기라는 말이었다. 결국 알카티리는 구스마오 당시 대통령의 사퇴 압력과 여론에 떠밀려 유혈 사건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임했다.
레이나도의 반란 때문에 공석이 된 총리 자리에 구스마오는 자신과 같은 친 호주파인 라모스 호르타를 앉혔다. 지난 2007년 5월 대선에서 라모스 호르타는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한 달 뒤인 6월 총선에서 2위를 차지한 구스마오의 동티모르국가재건회의(CNRT)와 3위를 차지한 라모스 호르타의 의회다수연합(AMP)은 연정을 꾸려 구스마오가 총리에 오르며 대통령과 총리의 자리를 바꾸었다. 구스마오가 동티모르의 실질적인 권력자가 된 셈이다. 당시 총선에서 제1당은 알카티리의 ‘프레틸린’이었지만 연정 대상에서 무시되었다.
레이나도는 자신이 반란을 일으킨 것은 서부 지역 출신들을 차별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해왔다. 차별이 어느 정도 있었던 것은 사실인 듯하다. 2006년 2월27일 동티모르 인권 단체인 HAK의 올리베이라 대표는 호주 신문 더 오스트랄리언과의 인터뷰에서 “동서 차별 문제가 FDTL 내에 서서히 퍼지고 있는 것이 염려 된다”라고 말한 바 있다. 페르난도 팔린틴(과거 동티모르 독립파 민족해방군) 사령관 역시 현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동티모르인은 하나이며 독립 투쟁을 함께 했다. 특정 지역에서만 과실을 차지해서는 안 된다”라며 현재 FDTL의 상황을 비판했다. 동티모르의 지역 갈등은 인도네시아의 독립 투쟁 과정에서 생겨났다. 당시 인도네시아군이 주둔한 곳이 동부 지역이었는데 그 지역 출신들의 투쟁 업적이 더욱 뛰어난 데서 갈등이 싹트기 시작했다.
하지만 차별이 반란을 일으킬 정도로 심각했는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시각이 많다. 게다가 알카티리는 총리 시절에 지역 차별 문제 해결을 위해서 의도적으로 FDTL 구성원의 60% 정도를 서부 출신으로 뽑았다. 그런 상황인데도 레이나도의 요구 사항은 오직 ‘구스마오의 전권 행사와 알카티리의 퇴진’뿐이었다.

호주 단독 파병 등 독립국가로 가는 길에 걸림돌 많아

구스마오와 알카티리는 오랫동안 독립운동을 함께 한 동지였지만 독립 이후의 정치 노선에서는 갈등을 보여왔다. 친호주파인 구스마오와 달리 알카티리가 호주를 경계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호주는 1999년 동티모르의 독립 선거 이후 줄곧 ‘동티모르의 가장 친한 친구’를 자처하며 독립적인 파병부대를 구성해 보내왔다. 하지만 친구여서라기보다는 동티모르 인근에 매장된 석유와 천연가스의 채굴권을 보장받기 위해서였다. 동티모르가 탄생하면서 생길 해양 국경 분쟁에서 유리한 위치에 서기 위함이었다.
동시에 국제법에 의한 해결은 거부하고 있다. 호주 사법부의 윌리엄 캠벨 국제법 담당 과장은 “해안 국경의 문제는 교섭에 의한 해결이 가장 바람직하다”라고 호주 정부의 입장을 분명히 밝혔다. 호주는 2002년부터 국제사법재판소와 국제해양법재판소의 심판을 거부하고 있다.
그러면 레이나도는 자신이 바란 대로 알카티리가 물러나고 구스마오가 실세가 되었는데도 왜 라모스 호르타 대통령에게 총을 쏜 것일까? 죽은 자는 말이 없고 피격당한 사람은 입을 열지 않고 있다. 하지만 동티모르 내부에서는 ‘반란군의 군대 복귀를 원하는 사람은 원래 위치로, 원하지 않는 사람은 공무원으로’를 조건으로 구스마오와 협상을 했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 구스마오와의 협상이 순탄하게 이루어지지 않자 라모스 호르타와 협상을 하기 위해 찾아갔다가 사건이 벌어진 것이 아니냐는 설이 인도네시아 언론을 통해 제기되고 있다.
어쨌든 알카티리가 물러나고 내각은 새로운 인물들로 꾸려졌다. 하지만 여전히 호주군은 딜리에 주둔하고 있고 2006년의 반란으로 생긴 15만명의 난민들 중 3만여 명은 불안한 치안 때문에 딜리 주변의 캠프에 머무르며 아직 자신들의 보금자리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호르타, 구스마오. 알카티리가 꿈꾸던 독립 국가 동티모르의 모습이 과연 이런 것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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