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델 떠나도 계속 되는 ‘피델의 시대’ ‘쿠바의 봄’은 서구의 ‘춘몽’인가
  • 로스앤젤레스·진창욱 편집위원 ()
  • 승인 2008.03.03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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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직 승계한 라울 카스트로에 부정적 시각 우세… 정부 인적 구성·경제 구조 등 변화 없어

 
무려 49년을 집권한 쿠바의 독재자 피델 카스트로(81)는 지난 2월24일 대통령직 사퇴를 발표하면서 사퇴를 결심하게 된 이유를 자신의 양심 때문이라고 밝혔다. 장기 집권을 하면서 국민을 가난에 찌들게 한 실정에 대한 사과의 뜻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건강이 좋다면 대통령으로 더 오래 지배할 수 있었겠지만 거동조차 불편한 현재 상태에서 계속 대통령직을 수행하는 것이 양심에 꺼린다는 게 그의 사퇴의 변이었다.
공산당 일당 독재 체제인 쿠바는 선거를 통해 의회를 구성하고 그 의회에서 정부를 구성하게 되어 있다. 이번 대통령의 의회 선출은 이같은 의회 재구성에 따른 절차였다. 피델 카스트로는 여러 차례에 걸쳐 수술을 받는 등 건강이 악화되어 지난 2006년부터 사실상 대통령직 수행이 불가능했다.
피델 카스트로의 양심 선언은 대통령직을 자신의 동생 라울 카스트로(76)에게 승계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부자, 부녀, 배우자에게 후계 지위를 넘긴 권력 상속 사례가 적지 않으나 형제간 권력 상속은 카스트로 형제가 처음이다. 쿠바는 새로운 정부가 태어나도 역시 카스트로의 나라이다.
반미 공산주의 대통령 카스트로의 경제 성적표는 그야말로 형편없다. 1인당 국민소득은 4천5백 달러에 머물러 있고(2007년 현재), 공산 체제에 따른 배급제로 생필품을 공급한다고 하지만 근로자의 평균 월급이 15달러(1만5천원)로 최저 생활도 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모두 국민을 자신의 이념과 권력 보존을 위한 볼모로 삼다 보니 생겨난 결과이다. 그는 부패한 바티스타 독재 정권으로부터 국민을 구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혁명을 일으켰으며, 그 이념을 실천한다며 공산주의를 선택했다. 그러나 쿠바 국민은 지난 49년 동안 그의 정치적 이념과 권력 유지를 위한 도구에 불과했다. 그래서 피델 시대의 종언은 의미가 있다.
피델에 이은 라울의 시대는 쿠바가 변화를 모색할 수 있는 기회이다. 라울은 열혈 혁명아인 형 피델에 비해 조용하고 온건한 인물로 알려지고 있다. 경제 개혁이나 개방에도 관심이 크다. 라울이 새 쿠바 대통령으로 결정되자 많은 쿠바 전문가들은 아바나에서부터 변화의 바람이 불 것으로 기대한다. 이들은 나아가 라울의 등장으로 쿠바-미국 관계에 숨통이 트이리라고 내다본다. 미국은 지난 10년 동안 일관되게 대쿠바 봉쇄 정책을 고수하며 쿠바 경제의 숨통을 막아놓고 있다.
사탕수수와 아바나 시거로 국제적 명성을 누리는 쿠바의 대외 수출 능력이나 최근 개발 가능성이 확인된 근해 석유 매장량은 경제 봉쇄만 해제되면 쿠바인들의 삶을 비약적으로 개선시킬 도약의 발판이 될 것이다.

‘이념은 그대로’인 상태에서 미국-쿠바 관계 개선도 멀어

제1부통령 겸 국방장관이던 라울은 지난 2006년 형 피델이 병석에 누운 직후 대통령직을 대리했다. 라울이 최근 쿠바의 대외 개방을 언급한 것을 두고 외부 특히 미국은 상당한 관심을 나타내고 있다. 라울의 이같은 발언을 근거로 라울 시대에 본격적인 개방과 개혁이 시작될지 모른다는 희망을 피력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쿠바의 개혁과 개방은 바로 대미 관계 개선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기대와 함께 한다.
하지만 이같은 긍정적인 반응 및 기대와 달리 쿠바의 장래에 대한 부정적인 전망은 여전히 우세하다. 피델은 갔지만 쿠바는 아직도 카스트로 정권이라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이다. 피델 카스트로가 대통령직은 사퇴했지만 사실상 최고권좌인 쿠바 공산당 서기장직을 여전히 유지해 그가 쿠바 정치에서 완전 퇴장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부정적인 시각의 첫 번째 근거로는 라울 카스트로의 대통령직 수락 연설 내용이 꼽힌다. 라울은 “(쿠바에) 피델 말고는 있을 수가 없다. 누구도 그를 대신할 수 없다(Fidel is Fidel). 그가 육체적으로 우리와 함께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인민은 그의 과업을 계승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라울은 이어 비록 자신이 대통령직을 행사하더라도 중요한 정치적 사안의 처리는 형 피델과 상의할 것이라고 천명했다. 피델 시대는 갔지만 피델의 정책은 계속 이어질 수밖에 없다.
라울의 수락 연설은 쿠바 정치가 지금의 북한과 유사할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북한은 김일성의 사망으로 김정일 정권이 등장했지만 정치 전반이 김일성 시대의 기본에 머무르고 있다.
두 번째 근거는 새 라울 정부의 인적 구성이다. 제1부통령에는 피델과 라울의 혁명 동지이자 라울이 가장 신임하는 호세 라몬 마차도 벤투라가 임명되었고, 최근 새 의회의 신임 의장에 리카르도 알라르콘이 재선임되었다. 벤투라는 쿠바 정권 내에서 이름난 골수 공산주의자이다. 따라서 이번 권력 이양에도 불구하고 쿠바 권력 구조는 이른바 혁명 1세대와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 반미 공산주의를 표방하는 쿠바 혁명 1세대의 권력이 살아 있다면 앞으로 별다른 개혁이나 개방을 기대하기 어렵다.
특히 쿠바 경제를 여전히 군부가 장악하고 있어 대대적인 개혁이나 변화가 불가능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쿠바 경제의 핵심인 대형 국영 기업이나 생산업체의 사장은 거의 대다수가 군 출신이다. 피델의 권력을 보좌해 지난 49년간 국방장관 등 요직을 차지하면서 군부를 통제하던 라울이 정권 보존의 수단으로 군부 출신을 경제계 요직에 심어놓은 결과이다.
아바나 주재 전 캐나다 대사 마크 엔트위슬은 이같은 쿠바의 정치 구조로 보아 라울의 새 정부는 급격한 변화를 시도하지 않을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특히 지난 49년간 권력의 강력한 통제를 받아온 국민에게 갑작스런 대규모 개방을 허용할 경우 혼란이 불 보듯 뻔하다는 것이다.
더구나 피델과 라울은 지난 1953년 반 바티스타 봉기나 1959년 쿠바 혁명 때 형제 투사였을 뿐만 아니라 가장 가까운 동지였으며 쿠바 공산 정권의 대들보와 기둥 역할을 함께 한 사이이다. 또 라울이 피델에 비해 상대적으로 온건해 보이기는 하지만 바티스타 정권의 요직 인사 수백명에 대한 처형을 직접 명령했을 정도로 잔인하고 단호한 면을 겸비한 골수 공산주의자라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라울 카스트로가 쿠바 정치의 전면에 등장하면서 미국의 반응도 긍정과 부정으로 엇갈리고 있다. 우선 조지 부시 대통령은 피델 카스트로의 사임을 환영했다. 그는 “피델의 퇴진이 쿠바에 새로운 전환기를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라울의 등장이 민주화의 시작이 되기를 바란다”라고 말했다. 콘돌리사 라이스 국무장관은 특별 성명을 통해 인권 존중, 정치범 석방 그리고 자유 선거 보장 등 쿠바의 민주화를 향한 제반 조치를 시행할 것을 촉구했다.
그러나 부시와 라이스는 대쿠바 관계 개선이나 경제 봉쇄 해제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라울의 성향으로 보아 그같은 언급을 하는 것이 시기상조라고 보는 듯하다.
미국 정치에서 직책이 위로 올라갈수록 대쿠바 입장은 공화·민주당 가릴 것 없이 강경 일변도이다. 올해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가장 유력한 후보로 꼽히는 존 매케인은 대쿠바 경제 제재 해제를 반대하고 있다. 공화당에 비해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민주당에서도 큰 차이는 없다. 심지어 힐러리 클린턴이나 버락 오바마 등 민주당 예비선거전 핵심 후보들마저 쿠바의 민주화 없이는 미국-쿠바 간 관계 개선이 있을 수 없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피델의 권력은 갔지만 피델의 이념은 쿠바에 상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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