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 넘는 영어 숭배 국어가 죽어간다
  • 노진섭 기자 no@sisapress.com ()
  • 승인 2008.03.17 14:5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새 정부는 ‘영어 공교육’, 지자체는 ‘영어도시’ 청사진 100돌 맞은 한글학회는 예산 모자라 빚 낼 판

 
우리나라 영어 교육의 실상은 ‘10년 배워도 영어 한마디 할 줄 모른다’라는 말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너도나도 영어 사교육 현장으로 몰리는 현상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이명박 정부는 이런 난맥상을 해결하겠다며 영어 공교육을 주창한 바 있다. 사교육 못지않은 고품질의 공교육으로 영어 문제를 풀겠다는 것이다.
영어 공교육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이면에서 그 그림자는 더욱 짙어지고 있다. 특히 영어 만능주의가 판을 치면서 국어 천대 풍조까지 생겨나 모국어 실종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새 정부 출범과 함께 영어 열풍이 전국을 휩쓸자 지방자치단체들은 기존 영어마을보다 규모가 큰 영어도시까지 건설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규모는 실제 도시보다 작지만 주거 시설·교육 시설·상업 시설 등을 두루 갖추고 있다. 경남 밀양시는 지난해 외국으로 빠져나가는 유학생을 유치하기 위해 1만명이 거주할 수 있는 미국형 영어도시를 건설하겠다고 선언했다. 이 도시 내에서는 구멍가게 주인도 영어를 사용하게 한다는 것이다. 도시명도 작은 미국을 의미하는 ‘리틀 유에스(Little US)’로 잠정 결정되었다. 이어 부산·인천·제주·서울 서초구도 잇달아 영어도시를 짓겠다고 발표했다.
부경대 신문방송학 김영환 교수는 “영어마을 16곳이 만성 적자에 허덕이는 등 모두 실패하지 않았는가. 돈만 쓰고 효과도 없는 영어마을보다 더 큰 영어도시를 짓겠다는 것은 결과를 보지 않아도 뻔하다”라고 말했다. 실제로 경기도가 1천여 억원을 들여 건립한 파주 영어마을은 2006년 한 해 동안 1백59억원의 적자를 냈다.
민간 기업도 덩달아 영어 교육 정책에 편승하고 있다. 예를 들면 아파트 단지에 영어마을을 지어주겠다는 건설사들이 늘고 있다. 입주 후 1~ 2년간 원어민 강사를 상주시켜 입주민들에게 무료로 영어를 배울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미 10여 곳이 운영 중이다. GS건설의 경우 대구 ‘상인자이’ 아파트단지에 영어마을을 개설하고 원어민 1명과 국내 강사 2명을 상주시켜 생활영어를 가르치고 있다.
새 정부의 영어 교육 정책의 골자는 고등학교만 졸업하면 기본 생활영어로 대화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다. 사교육 부담을 줄일 수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현실은 다르다. 서울 영일초등학교 조진희 교사는 “영어를 아예 포기하는 아이들을 의미하는 ‘영포’라는 신조어도 생겼다. 영포가 늘고 있다. 영어 사교육을 하는 학생들도 전혀 줄지 않고 있다. 학생 10명 중 8명 정도가 영어 사교육을 받고 있다”라고 말했다.
새 정부는 우리나라가 선진국으로 도약하기 위해 영어는 필수라고 강조해왔다. 이에 대해 전문가들은 외국의 사례를 들어 반대되는 시각을 보이고 있다. 한말글문화협회 김한빛나리 사무처장은 “영어가 잘 통하지 않는 일본도 선진국이다. 중국도 중국어를 앞세워 세계적인 국가로 발돋움하고 있다. 세계화에 반드시 영어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국내에 거주하는 외국인들도 영어 열풍을 꼬집고 있다. 지난 5년 동안 우리나라 대학에서 영어를 가르치고 있는 미국인 헐 데이먼 씨(44·가명)는 “한국의 부모들은 아이들의 영어 사교육에 많은 돈을 쓰는 것 같다. 이는 가정에 큰 부담으로 작용한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학교와 부모가 지혜를 모아 방법을 찾아야 한다. 아이들에게는 자신들이 원하는 언어를 배울 선택권을 주어야 한다. 학생들이 영어뿐만 아니라 중국어·일어·스페인어 등 원하는 언어를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정부가 제공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데이먼 씨를 포함해 취재 중에 만난 외국인 네 명은 “한국이 세계화로 도약하기 위해 영어를 배우는 것은 반길 일이지만 영어만 고집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세계 각국의 언어를 익혀야 진정한 국제 사회의 일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언어는 말하기 위한 것일 뿐만 아니라 사고의 폭을 넓혀주는 도구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세계 각국의 언어를 고루 익혀야 국제화

나라가 영어 열풍에 휩싸이는 동안 국어는 어떤 대우를 받고 있을까. 오는 8월31일 100돌을 맞는 한글학회는 <한글 100년사> 편찬·학술대회·기념비 건립·전시회 개최 등 한글학회 100주년 기념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그러나 예산 부족으로 당장 빚을 내야 할 처지이다. 사업 예산을 애초 6억5천만원에서 5억원으로 낮춰 잡았지만 현재까지 모금된 후원금은 3천5백만원 정도이다. 한글학회 유운상 사무국장은 “100주년이라면 다들 놀라지만 후원은 어렵다고 한다. 정부의 연간 보조금 2억원이 전체 예산이다. 기념식 장소도 협조를 받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다 겨우 건국대로부터 후원을 받았다”라고 말했다.
이런 소식이 알려지자 지난 3월5일 포털사이트 다음에는 한글학회를 돕자는 모금운동이 등장했다. 대학생 한광호씨(21)는 “한 달 정도 기간을 잡아 3백만원을 모금할 생각이었다. 돈보다 한글이 이렇게 천대받고 있다는 것을 많은 사람에게 알리고 싶었다. 그런데 4일 만에 목표액을 초과해 모금이 마감되었다”라고 말했다. 2차 모금운동을 시작할 것이라는 한씨는 “인터넷이나 방송 등을 보면 우리말이 매우 왜곡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는다. 학생들도 전공 과목보다 영어에만 매달린다”라고 말했다.
우리말 왜곡은 예사이다. 아예 영어에 우리말이 치이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예를 들면 ‘로드맵’ ‘클러스터’ ‘허브’ 따위이다. 한글문화연대 고경희 대표는 “국어가 천대만 받는 것이 아니다. 아예 영어에 치여 발도 못 붙이고 있다. 정부가 우리말과 글을 놔두고 영어 사용에 앞장서고 있다. 동사무소를 동주민센터로 바꾼다고 한다. 편의상 영어를 사용한다고 하지만 아이들은 아예 영어를 국어처럼 받아들여 사용하는 실정이다”라고 말했다.
실제로 주요 정부 부처의 표어는 영어 일색이다. 법무부는 대한민국 ‘정의 1번지’라는 뜻에서 ‘저스티스 퍼스트(Justice 1st)’라는 구호를 내걸었다. 공정거래위원회도 전자행정시스템 명칭을 ‘씽크 페어(Think Fair)’로 정했다.
정부까지 영어 열풍에 나서자 국어 전문가들이 반대 의견을 제시했다. 지난 1월30일 한글학회와 한글문화연대 등 32개 단체가 한자리에 모였다. 이들은 기자회견을 열고 이명박 정부의 영어 교육 정책을 영어 숭배 정책이라고 비판했다. 이들은 “정부가 영어 숭배 정책을 폐기해야 한다. 국어를 팽개치고 영어에 몰입하는 것은 나라의 근간을 흔드는 일이다”라고 주장했다. 이어 “영어 교육 자체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영어가 중요한 만큼 한글도 중요하다는 것을 이명박 정부가 알아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영어를 숭배하고 국어를 천대하면 향후 언어 생활에서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나타날 것이라는 지적도 있다. 부경대 김교수는 “영어 교육은 시켜야 한다. 그렇지만 영어 교육은 과잉 공급 상태이다. 입시·국가고시·승진 등 모든 시험에서 영어가 차지하는 비중이 지나치다. 모두 영어에 매달리고 있다. 반면 국어는 매우 소홀해진 상태이다. 영어는 교육을 받은 사람들의 언어이고 국어는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의 언어가 되어가고 있다. 대학에서도 학생들이 전공 수업을 듣지 않는다. 외국으로 어학 연수를 떠난다. 대학도 이미 영어 학원과 다르지 않다”라고 말했다.
무엇보다 언어는 한 나라의 근간이라는 점에서 소중하게 다루어져야 한다. 한글 전문가들은 우리나라가 언어를 바로 세우지 못해 외세의 억압을 받아왔다고 주장한다. 한글학회 김승곤 회장은 “우리 민족은 중국으로부터 한문, 일본으로부터 일어를 강요받았다. 그 후에는 미국의 언어인 영어가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 우리에게는 아직도 식민사관이 남아 있다. 영어 사대주의에 빠져 있다. 이를 깨우쳐야 할 지도자층이 오히려 영어만 고집하는 현실이 안타깝다”라고 털어놓았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