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부가 되어도 ‘노풍’ 일으키니 ‘봉하’는 바쁘다
  • 김해·김회권 기자 judge003@sisapress.c ()
  • 승인 2008.03.24 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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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전 대통령 ‘낙향’ 후 한 달 솔직 담백한 시골살이에 “친밀감 느낀다” 반응 주말 7천~8천명 관광객 찾아 마을 전체 ‘북적’

 
한 반도의 남쪽은 이미 따뜻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촌부(村夫)로 변신해 낙향한 경남 김해군 진영읍 봉하마을 역시 선선한 봄날이었다. 지난 3월16일 봉하마을로 진입하는 편도 1차선의 도로는 밀려든 차량의 행렬로 주차장이나 다름 없어 보였다. ‘계속 차를 몰고 들어가야 하나’를 고민하다가 결국 ‘봉하마을 1.2km’라는 표지판이 보이는 지점에 차를 세웠다. 그리고 한 손에는 가방을 들고, 다른 손에는 외투를 들고 터벅터벅 걸어갔다.
뒤를 따라오던 관광버스가 봉하마을로 진입하려는 찰나, 교통정리를 하던 경찰이 앞을 가로 막고 버스에 올라탔다. 마을이 혼잡하고 길이 좁으니 버스를 막아선 것이었다. 승객들이 우르르 내렸다. 어르신들이었다. 한 할아버지는 “여기까지 왔는데 대통령 얼굴은 함 보고 가야 되지 않겄어~”라며 걸쭉한 전라도 사투리를 쏟으셨다. “뭐 볼 게 있다고 이리 사람을 걷게 만드냐”라는 할머니의 핀잔에도 할아버지는 아랑곳하지 않는 눈치였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대선 가도의 첫발을 ‘노풍’이라는 바람으로 시작했다. 지지율이 한자리에 불과하던 민주당 경선 후보가 정식 대통령 후보가 되더니 끝내 청와대에 입성했다. 바람을 타지 않고서는 쉽게 일어나기 힘든 일이다. 그리고 퇴임 이후 또 다른 노풍이 불고 있다.
그는 헌정 이후 처음으로 시골로 낙향한 대통령이어서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혹자는 이명박 대통령이 취임 초기 실망스런 행보를 보이자 노 전 대통령이 반사적으로 각광받는 것이라고 말했다. 반면 솔직 담백한 그의 시골살이를 보면서 전임 대통령에게 느끼지 못했던 친밀함을 느끼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이유야 어떻든 ‘노 전 대통령의 퇴임 후 30일’이 사람들의 구미를 당기는 사건인 것만은 분명했다.
인터넷에서 ‘노간지’ 열풍을 불러온 한 장의 사진은 사람들을 충격(?)에 빠뜨렸다. ‘간지’는 일본어에서 유래한 말로 해석하자면 ‘뭔가 느낌이 난다’ ‘폼 난다’쯤으로 풀이할 수 있다. 봉하마을 쉼터에서 수수한 점퍼를 입은 채 담배를 물고 앉아 있는 사진 한 장은 ‘대통령’ 노무현이 ‘서민’ 노무현으로 돌아왔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이때부터 ‘전임 대통령 노무현’은 ‘노간지’로 온라인에서 재탄생했다. 대한민국 최고 권력자였던 한사람이 슬리퍼를 찍찍 끌며 동네 매점에서 담배를 무는 모습을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임시 주차장에 차량 북새통…단체로 “대통령님 나오세요” 합창도
게다가 노 전 대통령의 홈페이지인 ‘사람 사는 세상’은 이미 온라인에서 큰 호응을 얻고 있다. 그는 홈페이지를 통해 “주제를 올리고 자유롭게 논의하는 장을 만들고 싶다”라고 이전부터 말해 왔다. ‘함께 생각해봅시다’라는 코너에서는 요즘 시민주권운동에 관한 논의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가장 인기 있는 곳은 ‘봉하사진관’이다. 노 전 대통령과 찍은 사진을 다운받을 수 있고 그의 고향살이를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전임 대통령을 보러 봉하마을로 가는 사람들의 행색은 영락없는 나들이 복장이다. 기자 앞의 한 무리는 등산복을 입은 채 봉하마을로 걸어가고 있었다. 부산에서 왔다는 최윤석씨(44)는 “노 전 대통령을 보면 좋은 거고 아니면 봉화산이나 한 번 올라가 보려고 사람들이랑 왔다”라고 말했다. 유모차를 끌고 가는 사람, 팔짱을 끼고 걸어가는 연인도 보였다. 더러 보이는 말쑥한 정장차림의 노신사가 대통령을 만나기 위한 과거의 표준 복장을 대변하고 있었다.
봉하마을은 우선 외관상으로 지난 1월 말 ‘노무현 타운’이라는 비판에 직면한 상황을 취재했을 때와는 많은 것이 변해 있었다. 가장 눈에 띠는 변화는 임시 주차장이다. 주차 안내를 하고 있던 김해 경찰서 소속의 한 경관은 “한마디로 주말에는 정신이 없다. 지금도 20여 명이 나와 있는데 통제가 안 될 정도다”라고 말했다.
관광객이 늘어난 만큼 장사꾼도 늘었다. 지난번 방문했을 때 한가하던 주차장 앞 쉼터는 외지인들의 발길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한 명으로도 여유 있던 계산대에 서너 명이 달라붙어 손님을 상대하고 있었다. 봉하마을 테마 식당이 생기고 텃밭에서 키운 농작물을 파는 할머니들이 길가에 앉아 손님을 기다리는 모습도 전에 볼 수 없던 풍경이다.
노 전 대통령 사저 앞에는 이미 수백명의 사람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그들은 ‘노 전 대통령이 혹시 나오지 않을까’라는 기대감을 안고 집안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불러봐라. 나올 지도 모른다 아이가”라고 한 아저씨가 호기 있게 선동하지만 서로 눈치만 볼 뿐이었다.
이런 적막을 깨고 갑자기 여러 명의 합창 소리가 들려왔다. “대통령님, 나오세요!” 그러자 모두 리듬에 맞춰 “대통령님, 나오세요!”를 몇 초 간격으로 반복해서 외친다. 요즘 노 전 대통령을 피곤(?)하게 만든다는 대통령 부르기 구령이다. 사저 앞을 막아서고 있는 의무경찰들에게 노 전 대통령이 안에 있는지를 물어보았지만 그들은 묵묵부답이었다. 한 의무경찰은 “퇴임 후 대통령을 지킨다는 것이 이렇게 피곤한 일일 줄은 짐작하지 못했다”라고 토로했다.
주차장 옆에 설치된 관광안내소를 찾았다. 지난번 취재 때 만났던 봉하마을 가이드 김민정씨가 반갑게 맞아주었다. 이곳에도 변화가 생겼다. 김씨 혼자서 근무하던 안내소에 두 명의 안내원이 더 붙었다. 늘어난 관광객 수를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김씨는 “주말에는 평균 7천~8천명 정도가 오는데, 오늘은 그보다 더 많을 것 같다. 한 1만명 정도는 될 것 같다”라고 말했다. 봉하마을로 들어가는 관광객 수를 체크하는 것은 김씨의 몫이다. 그녀는 대통령 사저로 들어가는 관광객 수를 10명이나 20명 단위로 묶어서 노트에 기록하고 있었다.
“노 전 대통령은 보통 주말에는 등산을 가는데, 대략 오후 3시쯤 되면 나오신다.” 김씨의 말을 듣고 시계를 보니 오후 2시45분. ‘나올 때가 되었나 보다’라고 생각하는 순간, 사람들이 노 전 대통령의 사저 쪽으로 뛰기 시작했다. ‘나왔구나’라는 생각에 함께 뛰니 이미 앞은 수백명의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어 더 이상 들어갈 수가 없었다. 노 전 대통령은 길 옆 비탈길에 서서 사진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챙 넓은 하늘 색 모자에 털털한 베이지색 점퍼 차림이다.

 
노 전 대통령, 관광객들과 1시간 넘게 사진 촬영
사람들의 환호가 끝나기를 기다리던 노 전 대통령이 “마을 설명 좀 하겠습니다. 여기 봉하마을은…”이라고 말하기가 무섭게 “대통령님! 여기요”라며 사진 포즈 요구가 쇄도한다. 노 전 대통령은 하던 말을 끊고 여러 번 V자 포즈를 취했다. 사람들의 ‘여기요’라는 외침에 마을 설명은 이미 포기한 눈치다. “도저히 마을 설명을 못하겠는데 다음에 오시면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잘 꾸며놓겠습니다. 내 얼굴보다 훨씬 잘생긴 마을로 만들어놓겠습니다”라는 농담을 던지자 사람들은 웃는다.
“저는 이제 등산을 좀 하려고 합니다. 안녕히 돌아가십시오”라는 말과 함께 대통령은 사저 뒤편 길로 나들이를 나선다. 그때서야 사저 쪽으로 쳐 있던 접근금지 라인은 무용지물이 된다. 100명은 더 되어 보이는 사람들이 노 전 대통령의 뒤를 따라 함께 나들이를 나선다.
화포천 쪽으로 3백~4백m를 걸었을까. 노대통령 주위에 있던 비서관들이 뒤따르는 사람들을 도로 한편으로 줄 세운다. 얼마 전까지 국가의 중요 정보를 취급하며 대접받던 사람들이 지금은 놀이공원의 안전요원과 별반 다르지 않다. 줄을 선 사람들은 그때부터 차례대로 노 전 대통령과 기념 사진을 찍었다. 한 비서관은 노 전 대통령의 홈페이지 ‘사람 사는 세상’의 주소가 적힌 명함을 돌리면서 “이곳에 들어가서 사진을 다운로드받으면 된다”라고 열심히 설명했다. 노 전 대통령이 촌부가 되는 바람에 이들도 덩달아 촌부가 되었다.
노 전 대통령과 사진을 찍은 한 여성은 “악수하는 손이 너무 따뜻해서 좋았다. 가문의 영광 아니냐”라며 즐거워했다. 김장석씨(37)는 “기획된 것이 하나도 없이 모두 자연스러운 만남이어서 즐겁다”라며 노 전 대통령의 등산길을 계속 뒤따를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는 아이가 컸을 때 좋은 기억을 남겨주기 위해서 봉하마을을 찾았다고 덧붙였다.
부동 자세로 찍는 정치인들의 일반적인 사진 촬영과는 사뭇 다르다. 여성은 대부분 노 전 대통령에게 팔짱을 끼고 사진을 찍는다. 노 전 대통령은 아이들을 자신의 앞으로 데리고 와 어깨동무를 하며 찍는다. “모든 분들과 사진을 찍어드리니 질서를 지켜주시기 바랍니다”라는 비서관의 말처럼 1시간여 동안 노 전 대통령은 아스팔트 한가운데서 모델 노릇을 했다.
봉하마을은 아직 관광지로는 낙제점이다. 들어가는 진입로는 좁아서 차량이 조금만 몰려도 밀리기 일쑤이다. 노 전 대통령의 보좌진과 그 가족이 머무를 연립주택은 아직 공사 중이라 작은 마을 곳곳에 먼지가 풀풀 날렸다. 노 전 대통령 외에는 딱히 볼 것도 없는 ‘깡촌’이다. 노 전 대통령은 홈페이지 ‘사람 사는 세상’에서 “지금은 밥 먹을 곳도 없고 잠잘 곳도 없어서 불편이 많지만 올해 안으로 밥 먹고 잠잘 곳을 해결해볼 것이며 내년, 후내년 계속해서 아름다운 숲, 자연 학습 환경, 재미있는 운동거리 등도 마련할 계획이다”라고 밝혔다.
김해시에서도 봉화산과 화포천을 연계해 개발한다지만 아직은 진행 중인 단계다. 김해시청의 관계자는 “봉하마을을 인근 자연환경과 연계해 개발하는 사업에 대략 75억원의 예산이 필요한 것으로 나타났는데 확보된 예산은 35억여 원에 불과하다”라고 말했다. 그런 곳에 시계바늘이 오후 5시를 가리키는 순간에도 노 전 대통령을 보기 위한 차량은 계속 밀려들고 있었다.
한 할아버지가 “좀 있으면 요 길 옆 논에서 대통령이 모내기도 하겠네. 보니까 농사도 좀 짓는 것 같더만”이라고 말하자 옆의 할머니가 “잘 짓게 생겼다 아이가”라고 말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게 사람들의 머릿속에 노 전 대통령은 보통 사람으로 무사히 돌아왔다. 그리고 새로운 전임 대통령의 모습을 보기 위해 봉하마을은 하루 내내 몸살을 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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