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들은 빨리 진다
  • 김재태 편집부국장 jaitai@sisapress.com ()
  • 승인 2008.04.28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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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은 늘 그렇듯 꽃과 함께 와서 꽃과 함께 진다. 지난 월요일 출근길에 만난 후배가 주말에 어디 꽃구경이라도 다녀왔느냐고 인사치레로 물어왔을 때 “마음에 늘 꽃이 피는데 멀리까지 가서 볼 필요가 뭐 있겠느냐”라는 유치한 궤변으로 얼버무렸지만, 꽃이 채워지지 않은 봄날의 기억은 아무래도 안쓰럽고 허전할 수밖에 없다.
이제는 봄이, 계절이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할 만큼 짧아져서 그저 겨울과 여름을 잇는 ‘환절기’ 같은 지위로 추락하고 말았지만, 그 짧은 기간에도 봄꽃들은 어김없이 피고 또 진다. 매화와 목련이 앞장서고 벚꽃이 만발한 뒤 철쭉과 진달래·개나리가 뒤를 잇는 순서도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봄을 즐기는 상춘(賞春)의 백미는 뭐니뭐니 해도 벚꽃 구경일 것이다. 산천을 뒤덮는 그 현란한 분홍의 물결은 가히 자연이 인간에게 베푸는 지고지순의 향연이라 할 만하다. 그런데 예전에는, 그처럼 아름다운 벚꽃을 보는 일이 괜스레 불편했던 적이 있었다. 벚꽃은 일본 꽃이라는데 왜들 저리도 호들갑인가 하는 막연한 불쾌감 탓이었는데, 자라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일본을 상징한다고는 하나 벚꽃은 그저 많고 많은 꽃 중 하나일 따름이며, 벚꽃은 그것이 벚꽃일 때 우리나라 꽃이고 사쿠라일 때 일본 꽃일 뿐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취임 후 처음으로 미국과 일본을 방문하고 돌아왔다. 대통령이 중요 우방인 미국의 대통령을 만나 돈독한 신뢰를 구축한 것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다. ‘디스 맨’이라는 호칭을 들은 김대중 전 대통령, ‘이지 맨’으로 표현된 노무현 전 대통령과 달리 ‘파인 드라이버’라는 말까지 들었으니 기분이 썩 좋았을 법도 하다. 내용물이 확실하게 채워져봐야 제대로 평가할 수 있겠지만 ‘21세기 전략적 동맹’을 맺는 데 합의한 것도 나름의 의의가 있다. 그럼에도 소고기 협상 문제는 못내 찜찜하다. 일본, 중국, 타이완도 다 고수하고 있는 ‘도축 소고기 연령 제한’을 왜 그리 빨리 포기했는지는 납득하기가 쉽지 않다. 이대통령이 부시 대통령과 캠프 데이비드 별장에서 마주 앉아 웃고 있을 때 국내 산지의 한우 가격은 벌써 큰 폭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전 영국 총리 파머스톤의 저 유명한, “우리에게 영원한 적도, 영원한 동지도 없다. 다만 국가 이익이 있을 뿐이다”라는 말을 새삼 들먹일 필요도 없이 외교에서 제일 가는 덕목은 국익이다. 그리고 그 국익은 영원불멸의 것이 아니다. 이대통령과 같은 시기에 미국을 방문해 조용히 클린턴, 오바마 같은 차기 대권 주자들을 만나고 귀국한 고든 브라운 영국 총리의 행보가 돋보이는 것은 그 때문이다. 외교에는 특히 공짜 점심이 없다. 이명박 정부가 이번 미국 방문에서 큰 실리를 챙겼다고 자평하는 동안 백악관도 열심히 주판알을 튕기고 있을 것임은 분명하다. 부디 이대통령이 챙겨왔다는 국익이 미국에서 정권이 바뀐 뒤에도 지속 가능한 국익이기를 바랄 뿐이다. 한국에는 벚꽃이 피고, 미국에는 미국의 벚꽃 ‘체리블로썸’이 핀다.
꽃이 지고 봄이 기우는 일은 또 다른 곳에서도 있었다. 이건희 회장의 퇴진과 함께 삼성의 한 시대가 막을 내렸다. 쇄신안을 놓고 많은 말들이 나오지만 이회장의 퇴진으로 삼성이 새로운 시험대에 오른 것만은 분명하다. 그리고 삼성에게는 이제 쇄신의 진정성을 인정받고 확실히 거듭나기 위해 죽어야 산다는 ‘사즉생(死卽生)’의 각오가 필요할 것이다.(14쪽 커버스토리 참조)
이 짧은 봄날 꽃은 빨리 진다. 꽃 향기에 취해 있다 보면 세월은 늘 저만치 앞질러 가 있기 마련이고, 나무는 꽃이 진 후에야 열매를 맺는다. 무릇 세상의 이치가 다 이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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