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하는 ‘추리’를 따라잡아라
  • 조철 기자 2001jch@sisapress.com ()
  • 승인 2008.05.27 1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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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추리소설 창작 부진 속 ‘전성기’ 재현 안간힘…“비주류라는 괄호에서 벗어나라” 주문도

ⓒ시사저널 박은숙
예전에는 여름이 다가오면 추리소설이 당겼다. 요즘도 그럴까. 영화사에서 시나리오 작가로 활동하는 기승태씨(46)는 젊었을 때 추리소설 마니아이기도 했고, 10년 전쯤 신춘문예 추리소설 단편 부문에 당선되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그는 서둘러 추리 작가의 길을 포기했지만 미련도 남고 영화 소재도 얻을 겸 서점에만 가면 추리소설 코너를 맴돈다. 그는 추리, SF, 스릴러 등 장르 문학 코너를 여전히 해외 유명 작가들이 장악한 것을 확인했다. 히가시노 게이고, 미야베 미유키 등 일본 작가들의 작품은 두 작가 것만 해도 올해 초에 번역되어 나온 것들까지 수십 종에 이른다. 미국과 유럽 작가들의 작품도 많다. 그 속에서 한국 추리 작가가 쓴 것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기씨는 “나도 ‘배고파서’ 추리 소설가의 길을 계속 가지 못했지만, 우리나라 것이 너무 없다. 10년이 지나도록 추리소설계의 현실이 그대로라는 얘기다”라며 아쉬움을 표시했다.

영·미권 작가 이어 일본 작가들이 시장 키워

인터넷 서점 예스24의 문학 담당 MD인 이지영 대리는 “추리소설 시장이 확대됐다는 보도 등 장밋빛 예측도 있었다. <다빈치 코드>의 영향으로 한때 팩션 장르가 큰 인기를 끌었는데, 이마저도 2006년 이후로는 감소 추세에 있다. 보통 팩션 장르는 영·미권 작가들이 많이 펴내는데, 그들 중 꾸준한 주목을 받는 작가가 별로 없었다. 그 틈새로 일본의 히가시노 게이고, 미야베 미유키 등이 인기를 끌면서, 추리소설 시장에서 일본 소설 비중이 매우 높아졌다. 최근의 변화라면, 일본의 사회파 추리소설이 인기라는 점일 것이다”라고 말했다.
예스24의 집계에 따르면 올해 들어 추리소설 분야의 신간 등록이 지난해 동기에 비해 10% 정도 줄어든 60여 종에 이른다. 매출도 지난해 여름 상승했다가 감소 추세가 이어지고 있다. 이대리는 “판타지 소설의 판매 증감이 추리소설 장르에도 영향을 미친다. 판타지 소설의 매출이 상승하면, 출판사의 관심도 판타지 쪽에 쏠리고, 그에 따라 출간 종수나 홍보 방향도 판타지 소설 쪽에 집중된다. 판타지, 추리 등 장르 문학 분야는 유행을 많이 따르는 편이다. 여기에 시장 규모는 제한적이라 한쪽의 경향이 다른 쪽에도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라고 분석했다.

분명 ‘황금기’를 누렸던 국내 추리소설계는 그 시기에 약진하지 못하고, 역사도 짧고 독자층도 얇다는 핑계에 ‘저질 양산’만 해왔던 일부 출판사와 ‘저급’이라는 자기 비하의 늪에 빠진 작가들까지 합세해 고사 직전에 몰렸다. 하지만 추리소설 시장의 부흥과 국내 추리소설계의 부활을 점치는 목소리도 계속 들려온다. 국내 추리소설계의 대부로 통하는 김성종 작가가 최근 <안개의 사나이>를 발표했다. 지난해 조선일보가 1억원 고료 ‘대한민국 뉴웨이브 문학상’을 마련해 첫 수상자로 <진시황 프로젝트>의 유광수씨를 선정했다.

불황에도 신인 추리소설 작가들을 발굴하고 지원하는 일을 계속해온 출판사 황금가지는 최근 <한국 추리 스릴러 단편선>을 펴내 ‘신참’들의 의욕에 불을 지폈다. 이 책에 단편을 올린 작가들의 면면을 보면, 한국 미스터리 작가 모임을 중심으로 한 20~30대의 젊은 작가들로서 출간 경력이 있는 작가이거나 출간 준비 중인 작가들이다. 이들은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통해 활발하게 작품 활동을 벌이고 있다. 1년 동안의 기획과 준비 기간을 거쳐 발표된 단편들은 외국 작가 못지않은 실험적인 작품들도 있어 한국 창작 추리소설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 이 책에 실린 ‘푸코의 일생’을 쓴 작가 최혁곤씨는 ‘순수 문학이 아니면 문학이 아니다’라는 것이 통념처럼 되어 작가들이 의식적으로 추리소설을 기피하는 분위기가 여전하다면서 “10만권 파는 1명의 작가보다 1만권 파는 10명의 작가가 필요하다. 외국 작품들은 반짝 했다가 사라진다. 김성종 같은 생명이 긴 국내 작가가 여럿 나와야 출판 시장이 살아날 것으로 보인다”라고 말했다.

국내 작가들, 까다로워진 독자 입맛 맞춰야

추리소설 평론가인 박광규씨는 “최근 몇 년 사이 추리소설을 읽기 시작한 독자층이 늘어난 것은 확실해 보인다. 2006~2007년 사이 약 3백50여 종의 추리소설이 나온 것에서 볼 수 있듯 독자와 출판계는 다시 추리소설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라고 희망적인 조짐을 알렸다. 박씨는 “국내 장르 문학 시장은 최대 호황기를 맞고 있다고 할 만하다. 셜록 홈즈, 애거서 크리스티 등 고전이 다시 주목받는 한편, 해외 스릴러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의 붐을 타고 장르 소설들이 대거 출판되었다. 최근 2년 사이 베스트셀러를 기록한 작품도 30여 종에 이른다. 국내 창작물은 전체의 10%에도 미치지 못하지만, 김성종과 김진명으로 대표되는 창작 추리소설의 붐이 다시 오지 말라는 법도 없다”라며 작가들의 분투를 기대했다.

하지만 이런 독자들을 다시 붙잡으려면 예전처럼 ‘저질 양산’의 잘못을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는 지적이 많다. 황금가지 김준혁 편집장은 “고급을 지향하는 우리나라 독자들 눈높이를 따라잡지 못하는 등의 이유로 국내 추리소설 작가들의 활약이 10여 년 위축되었다. 그래서 일본이 ‘사회파’ ‘신본격’ 등 새 형태를 창조하듯 ‘지적’ 추리소설 같은 것을 우리도 해볼 만하다”라고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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