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방송 ‘KBS 목장의 대결투’
  • 소종섭 (kumkang@sisapress.com)
  • 승인 2008.06.03 1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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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사장 퇴진을 둘러싼 싸움이 여야 정치권과 보수ᆞ진보 언론 및 시민단체 등으로 확산되면서 격해지고 있다. 내부에서는 노조와 PD협회가 갈등을 빚는 등 대결 구도도 복잡해졌다.

지난 5월26일 KBS 9시 뉴스를 보던 이들은 잠시 눈을 의심했다. ‘KBS 경영, 뒤바뀐 평가 반발’이라는 제목으로 ‘KBS이사회가 KBS에 대해 부정적인 경영 평가를 내놓았다. 하지만 이같은 평가는 외부 평가위원들의 실제 평가와 다른 것으로 드러났다. 외부 전문가들이 수용할 수 없다며 강력 반발하고 있다’라고 보도했기 때문이다. KBS가 KBS이사회를 비판한 것이다. 속사정을 알 수 없는 시청자들로서는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이해가 안 되는 것이 당연했다.

이 사례는 한국을 대표하는 공영방송 KBS에서 지금 벌어지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외부로 표출된 한 경우다. KBS의 현재를 상징하는 한 단어는 ‘싸움’이다. 그 핵심에는 정연주 사장이 있다. KBS의 중요 정책을 결정하는 이사회는 사장과 싸운다. 이사회 자체도 친 정연주파와 반 정연주파로 나뉘어 표 대결을 벌인다. 사장은 자신의 퇴진을 주장하는 노동조합과 싸운다. 노동조합은 노선을 둘러싸고 의견이 다른 PD협회, 기자협회 등과 싸운다. 정연주 사장의 퇴진을 주장하는 이라도 누구는 김 아무개씨가, 누구는 안 아무개씨가 차기 사장이 되어야 한다고 외친다. 그야말로 백가쟁명이다. 공영방송으로서 국민에게 어떻게 하면 더 질 높은 방송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을까를 고민할 틈이 있을까 싶을 정도다.


KBS 노조 “정연주 사장 퇴진부터”, PD협회 “외부 압력 방어부터”

과거에는 그나마 싸움의 전선이 KBS 내부에 국한되어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달라졌다. 한나라당과 민주당 등 정치권과 뉴라이트전국연합과 민주언론시민연합 등 시민단체, 언론노조 같은 노동운동 단체들까지 싸움에 뛰어들었다. 언론도 두 패로 갈라졌다. 바야흐로 KBS를 중심으로 권력과 방송의 한판 대회전이 벌어지는 형국이다. 갈등은 첨예화되었고, 전선은 넓어졌다. 갈수록 KBS가 늪에 빠져 들어가는 모양새다. 그렇지만 현재로서는 정사장이 자진 퇴진할 가능성은 별로 없다.

KBS가 이런 격랑에 휩싸이게 된 데는 각 세력들의 이해관계가 다 다르기 때문이다. 꼭짓점에 서 있는 것은 정연주 사장이다. 2006년 12월7일 상대 후보를 1천2백12표라는 큰 차이로 물리치고 등장한 전국언론노조 KBS본부(KBS 노조) 박승규 위원장의 핵심 공약은 ‘정연주 퇴진’이었다. 박위원장은 2005년 1월6일 ‘반 정연주’ 노선을 내걸고 당선한 진종철 위원장의 노선을 계승했다. 2006년 정사장의 연임에 대해 조합원 82%가 반대 의사를 나타냈을 정도로 보도와 기술 부분을 중심으로 형성된 ‘반 정연주 정서’는 뿌리가 깊다. 정사장이 뚜렷한 경영 성과를 내지 못한 가운데 팀제 등으로 조직을 개편한 것이 내부적으로 불만 요소를 키웠다.

내부 갈등이 계속되는 가운데 정권이 교체되면서 정사장의 거취를 둘러싼 힘겨루기가 격화되는 흐름을 보이고 있다. 여당이 된 한나라당은 노골적으로 정사장에게 물러나라고 말하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의 측근인 최시중 방송통신위원장이 KBS 이사장을 만나 정사장의 퇴진을 거론한 것이 신호탄이었다. 친 정연주파로 분류되는 한 이사는 자신이 몸담고 있는 학교측으로부터 이사직 사퇴를 권고받았다. 반 정연주파로 분류되는 이사들은 ‘만성적인 적자를 기록하고 수신료 인상에 실패했으며, 인사 제도 개혁에도 성과를 내지 못함으로써 경영에 대한 부정적 평가를 피하기 어렵다’라는 내용을 추가한 경영 평가 보고서를 통과시켰다. 이런 가운데 감사원은 5월21일 KBS를 특별 감사하기로 결정했다.

안팎에서 KBS를 향해 엄청난 파고가 밀려들고 있는 가운데 주 전선을 어디로 설정할 것인지를 놓고 내부는 크게 두 갈래로 나뉘어 있다. ‘정연주 퇴진’을 주장해온 노동조합은 정사장이 퇴진하는 것에서부터 문제를 풀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KBS 노조 박승규 위원장은 “KBS가 멍들고 있는데 정사장은 마치 민주 투사인 것처럼 생각하고 있다. 그가 물러나야 해답이 나온다. 그때부터 KBS의 미래에 대한 논의가 시작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렇다고 박위원장이 ‘정연주 사퇴’를 압박하는 한나라당의 입장에 공감하는 것도 아니다. 그는 “정파적인 입장에서 KBS 문제에 개입하는 것에 강력히 대응할 것이다. 뉴라이트 등이 개입하는 것도 오히려 부작용을 낳을 것이다. 정권과 관련 있는 인사가 이른바 ‘낙하산’으로 사장직에 오는 것에 반대한다. 진보 단체들도 정사장이 마치 탄압받는 중심에 있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다. 보수·진보 양측에 다 문제가 있다”라고 강조했다.

박위원장은 또 “KBS에 대한 감사원 감사는 정치적인 표적 감사다”라고 규정했다. 5월30일에는 감사원 앞에서 이에 항의하는 집회도 열었다.

노동조합으로서는 사장도 퇴진시켜야 하고 외부의 압박에도 대응해야 하는 성격이 다른 이중의 전선 속에서 조합원을 결속시켜 싸워야 하는 어려운 국면을 맞았다. 6월 초 열리는 비상대책위원회에서 다양한 투쟁 방법을 논의할 계획이지만 박위원장은 “전면 투쟁을 하기는 어렵다”라고 현실을 진단했다. 최근 일부 노조 간부가 직을 버리고 현업에 복귀하는 등 분위기도 예전 같지 않다.

KBS PD협회, KBS 기자협회 등은 노조와 다른 축으로 움직인다. 이들은 정사장의 거취 문제보다는 ‘이명박 정권의 압박에 맞서 싸우는 것’이 더 중요한 당면 과제라고 본다. 특히 PD협회의 움직임이 활발하다. 5월29일 KBS 신관 5층 국제회의실에 모인 PD 100여 명은 “KBS 노조가 정연주 사장의 퇴임 문제에만 얽매여 현 정권이 KBS를 압박하는 것에 대응하는 일에는 손을 놓고 있다”라고 비판했다. 이들은 “KBS를 통제하기 위해 전방위 압박을 가하는 현 상황을 이명박 정부의 ‘공영방송 KBS 장악 기도’로 규정하고 강력히 규탄한다”라는 결의문을 채택했다.

양승동 KBS PD협회장은 “이명박 정권의 언론 통제가 노골화하고 있다. 특히 방송을 장악하려는 기도가 두드러진다. 정사장이 퇴진해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가 논의의 중심이 되어서는 안 된다. 중요한 문제에 집중하면 부차적인 문제는 자연히 풀릴 것이다. 노동조합이 제대로 가고 있는지에 대해 회의적이다”라고 말했다. 양회장은 대표성을 갖고 있는 노동조합에 여러 차례 문제를 제기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아 PD총회를 소집하는 등 독자적인 움직임을 강화할 수밖에 없다는 인식을 갖고 있다.

KBS 노조가 상급 단체인 언론노조는 물론 시민·사회 단체들과의 연대틀 없이 ‘독자 노선’을 걷는 가운데 PD협회 등을 중심으로 시민·사회 단체들과 연대를 모색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민주언론시민연합이 5월21일 “정사장을 퇴진시키려는 것 자체가 공영방송에 대한 독립성 훼손일 뿐 아니라 새 사장을 정권의 입맛에 맞는 사람으로 앉혀 KBS를 좌우하겠다는 발상이다”라고 비판하는 등 시민단체들의 움직임도 점차 빨라지고 있다.

5월22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이명박 정부의 공영방송 장악 시도,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라는 토론회에 참석한 MBC 박건식 PD는 “KBS가 무너지면 MBC도 급속도로 무너진다. KBS 사태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현 정권이 정사장을 퇴진시킨 뒤 입맛에 맞는 인사를 사장으로 앉혀 KBS를 장악한 뒤 KBS2와 MBC를 민영화하는, 공영방송 민영화와 신문·방송 겸영 허용으로 질주할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한나라당은 진작부터 이런 정책을 추진하겠다고 공언해왔다.


언론의 KBS 사태 보도ᆞ논설도 양분

4월22일 KBS 노조 박승규 위원장(왼쪽)이 집회를 주도하고 있다. KBS PD협회는 5월29일 총회를 열었다.

KBS를 바로미터로 보는 이런 시각은 친 정연주파나 반 정연주파나 마찬가지여서 앞으로도 싸움이 쉽게 잦아들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특히 대통령직인수위 자문위원을 지낸 구본홍 전 MBC 보도본부장이 YTN 사장이 되었고, 문화부 관계자가 언론재단 이사장에 대한 사퇴를 종용한 일, 포털 사이트 다음에 대해 국세청이 세무조사에 착수한 것, 양휘부 이명박 대선 후보 방송특보단장이 한국방송광고공사 사장 후보에 내정된 것 등이 겹쳐지면서 시민·사회 진영에서 ‘현 정권이 언론을 장악하려는 시도를 더 이상 두고 보아서는 안 된다’라는 흐름이 형성되는 것이 주목된다. 이것은 미국산 쇠고기 수입 문제와 맞물려 해결보다는 갈등이 더 커지는 쪽으로 작용할 것으로 예상된다.

조선일보가 5월30일자 사설에서 ‘KBS는 정연주 왕과 정연주 가신들의 사유물이란 말인가’라며 강도 높게 정사장 체제를 비판한 반면, 한겨레는 같은 날 사설에서 ‘현실화하기 시작한 정권의 방송 장악 기도’라는 제목으로 ‘정권의 언론 장악 기도를 외면하거나 방조한다면 언론의 생명인 공정성과 독립성은 지켜낼 수 없다’라고 강조하는 등 KBS를 둘러싼 언론 보도도 확연하게 갈렸다.

이처럼 ‘정연주 퇴진’에서 촉발된 KBS 사태는 이미 내부에서 해결할 수 있는 범주를 넘어서 권력과 방송이 한판 승부를 겨루는 상징적인 사건이 되었다. 정연주 사장은 끝까지 버티기 행보를 할 것으로 보인다. 감사원 감사 결과가 변수가 될 수 있지만 예단하기는 이르다. 외부로 비화한 KBS 사태는 어떤 식으로 결말이 나건 내부에 심각한 상처를 남길 것이 분명하다. 이것은 공영방송으로서 제 위상을 확보하는 길을 앞당길 수도 있지만, 그 반대일 수도 있다. 지금으로서는 후자일 가능성이 더 커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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