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란한 기술로 거둔 ‘아름다운 승리’
  • 한준희 (KBS 축구해설위원) ()
  • 승인 2008.07.08 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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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의 유로 2008 우승 요인과 그 외 팀들의 표정

ⓒEPA


세계 축구팬들을 들끓게 했던 유로 2008이 스페인의 우승으로 막을 내렸다. 무려 44년간 계속된 ‘트로피 가뭄’으로부터 탈출한 스페인에게는 영원히 잊을 수 없는 2008년의 6월로 기록될 듯하다.

이전(제972호)에 언급했던 대로 스페인은 유로 2008의 ‘준비된 우승 후보’로 출발해, 결국에는 ‘자격 있는 우승팀’이 되었다. 적어도 필자가 보기에 스페인은 지난 2007/2008 시즌 유럽 각 리그에서 뛰어난 활약상을 펼쳐 보인 선수들을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는 팀이었다. 이케르 카시야스, 세르히오 라모스(이상 레알 마드리드), 페르난도 토레스(리버풀), 세스크 파브레가스(아스널), 마르코스 세나(비야레알), 안드레스 이니에스타, 샤비 에르난데스(이상 바르셀로나), 다니엘 구이사(마요르카)가 모두 최상급의 시즌을 보낸 주인공들. 소속팀 발렌시아의 총체적 난국과 맞물리며 굴곡을 겪기는 했지만 다비드 비야의 경기력 또한 그리 나쁜 것이 아니었다.

상대적으로, 이 ‘직전 시즌 경기력’의 관점에서 다른 우승 후보들인 독일, 이탈리아, 프랑스는 스페인만큼의 선수단을 갖고 있지 못했다. 크리스토프 메첼더(레알 마드리드), 미로슬라프 클로제(바이에른 뮌헨), 마르코 마테라치(인터밀란), 제나로 가투소(AC밀란), 티에리 앙리, 릴리앙 튀랑(이상 바르셀로나) 등이야말로 직전 시즌 나빴던 선수들의 대표 격이라 할 만하다. 결국 큰 대회에서 오래도록 정상을 밟아보지 못했다는 이른바 ‘징크스’의 관점을 제외하면, 스페인은 애당초 ‘가장 합리적인’ 우승 후보였던 셈이다. 그런데 징크스란 언젠가는 깨지기 마련 아닌가.

각 리그에서 뛰어나게 활약한 선수들 포진

스페인의 우승을 가능케 했던 요인들을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선수들 개개인이 보유한 기술. 체력과 힘에 많은 것을 의존하는 요즈음의 축구 풍토에서, 올망졸망한 선수들이 대거 포진한 스페인의 성공은 기술의 중요성을 새삼 일깨우는 계기로 작동할 전망이다. 볼 소유권을 지켜내는 능력, 빠르고 정확하게 볼을 이동시키는 능력, 정확한 마무리 솜씨에 이르기까지, 스페인 선수들의 기술적 측면은 그들보다 우월한 신체 능력을 지닌 상대를 당혹스럽게 하기에 충분했다. 한마디로 스페인은 ‘아름다운 축구가 궁극의 성공을 거둘 수 있음’과 ‘사이즈는 문제가 아닐 수 있음’을 잘 보여주었다.

둘째, 감독의 무결점 선택. 대회 직전까지도 여러 가지 비판에 시달렸던 루이스 아라고네스지만 이번 유로 2008에서 그가 취한 모든 선택은 실로 100%의 성공을 거두었다. 특히 샤비 알론소(리버풀)를 교체 멤버로 활용하는 대신 그 자리를 마르코스 세나에게 맡긴 판단이야말로 스페인의 우승을 가능케 한 핵심 동력이라 할 만하다(소속팀 발렌시아와의 관계가 틀어지며 시즌 후반부를 날려버린 다비드 알벨다가 대표팀에 승선하기 어려워진 것은 어쩌면 아라고네스의 행운이다). 세나야말로 스페인이 절실히 필요로 했던 ‘잃어버린 퍼즐 한 조각’이었기 때문이다. 클로드 마켈렐레(첼시)를 연상케 하는 능란한 수비-알론소가 지니지 못한 것-에다 알벨다에게는 찾아보기 어려운 고급스러운 볼 배급 및 발재간을 겸비한 세나는 첫 경기부터 마지막 결승전에 이르기까지 ‘세계 최고의 수비형 미드필더’라 평해도 좋을 만큼 빼어난 플레이를 펼쳤다. 스페인의 후방이 그 어느 때보다 안전해 보인 것은 세나의 활약에 힘입은 바 크다. 한편, 비야와 토레스의 분전에 더해 교체 멤버 파브레가스와 구이사의 활약은 지난 시즌 내내 논란을 불러일으킨 아라고네스의 ‘라울(레알 마드리드) 배제 정책’을 완벽하게 정당화시켰다.

셋째, 그 어느 팀 못지않은 단결력. 예상되었던 바대로, 지금의 스페인 대표팀은 지역감정에 의해 ‘모래알’이 되곤 했던 옛 시대의 스페인과는 판이한 모습을 보였다. 물론 카탈루냐의 샤비, 바스크의 알론소, 안달루시아의 라모스 등이 주장 카시야스와 정확하게 똑같은 마음으로 스페인 국기를 향해 경의를 표하기란 여전히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이 신세대 선수들은 그 불편한 마음을 그라운드로 이어가지 않았다. 우승컵을 향한 열정에 있어 스페인 선수들은 완벽하게 ‘하나’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터키ᆞ러시아ᆞ크로아티아도 결과에 만족

감격의 우승을 차지한 팀은 스페인이지만, 스페인 이상으로 찬사받아 마땅한 이들이 있다면 첫손에 꼽힐 팀은 역시 터키다. 파티흐 테림의 터키는 첫 경기를 제외한 모든 경기들(스위스전, 체코전, 크로아티아전, 독일전)을 축구라는 스포츠에서 가능한 최고의 드라마로 써내려갔는데, 그들의 유로 2008을 영화화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터키 전사들의 결코 포기하지 않는 투혼은 이번 대회 전체를 통틀어 가장 강렬한 인상을 남긴 요소였음에 틀림이 없다. 얼마 후 시작될 2010 남아공월드컵 유럽 지역 예선에서 스페인과 터키가 한 조에 속해 있다는 사실이 벌써부터 구미를 당긴다. ‘토너먼트의 신화’ 거스 히딩크 또한 다시 한 번 세계 축구계를 들썩이게 하며 자신의 능력을 과시했다. 히딩크가 이끄는 러시아는 첫 경기 스페인에 당한 대패에도 불구하고 그리스와 스웨덴을 연파한 후 8강에서는 히딩크의 모국 네덜란드를 연장 승부 끝에 3 대 1로 따돌리며 파란의 주인공이 되었다. 특히 네덜란드가 바로 그 경기 전까지 대회 최고의 경기력을 펼쳐 보인 팀이었기에 충격파는 더욱 컸다. 제니트의 UEFA컵 스타 안드레이 아르샤빈 또한 러시아의 영웅으로 주목받으며 자신의 몸값을 상승시켰다.

8강전 ‘터키 드라마’의 희생양이 되기는 했으나, 떠오르는 명장 슬라벤 빌리치의 크로아티아도 조별 리그에서 독일을 꺾는 등 충분히 성공적인 대회를 치렀다. 간판 골잡이 에두아르도 다 실바(아스널)의 공백 속에서도 크로아티아는 그들이 여전히 훌륭한 팀임을 증명했다.

‘준우승의 사나이’ 미하엘 발락(첼시)과 더불어 준우승을 차지한 독일에게는 3% 부족한 대회였다는 생각이다. 준우승이라는 결과물 자체는 나쁘지 않은 것이나, 기대했던 스트라이커 마리오 고메스(슈투트가르트)가 극도로 부진하면서 대회 도중 포메이션을 바꿀 수밖에 없었고, 전반적으로 포백 라인이 너무 불안했다. 신체 조건의 뚜렷한 우세에도 결과 면에서나 내용 면에서나 스페인에 밀렸다는 사실 또한 독일 축구의 반성을 요하는 측면이다.

‘조별 리그 최고의 팀’으로 군림하며 전세계 축구팬들을 매혹시켰던 네덜란드는 어쩌면 너무 일찍 힘을 다 써버렸다. 강력 우승 후보들인 이탈리아, 프랑스를 상대로 연거푸 역사에 길이 남을 대승을 거둔 네덜란드는 ‘새로운 토탈 풋볼(total football) 시대의 개막’이라는 격찬을 받기도 했으나, 대회 개막 전부터 불안했던 수비력의 한계에 발목이 잡혔다. ‘좋은 날’에는 그 어떠한 팀도 파괴해버릴 수 있지만 ‘좋지 않은 날’에는 심각하게 무기력해 보이는 기복으로부터 탈출해야 하는 것도 오렌지 군단에게 남은 숙제다.

우승 후보에서 나락으로 떨어지며 ‘최악’을 면하기 위한 맞대결을 펼친 바 있는 이탈리아와 프랑스는 공교롭게도 비슷한 문제들로 인해 신음한 듀오다. 세대교체 실패와 감독의 선수 선발 및 기용에서의 문제들이 바로 그것.

노장 선수들에게 너무 많은 부분을 의존함으로써 실패를 자초한 팀은 또 있다. 스웨덴, 체코, 그리스와 같은 다크호스들의 추락 원인 또한 근본적으로 세대 교체의 실패로부터 찾을 수 있는 까닭이다. 반면 우승팀 스페인과 4강 신화의 러시아는 연령적으로도 ‘젊은 팀’이어서 2년 후 월드컵, 4년 후 유로에서의 밝은 전망을 낳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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