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취하고 고민 많은 ‘신세대 영웅’ 전성시대
  • 반도헌 (bani001@sisapress.com)
  • 승인 2008.08.05 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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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배트맨에 호평 … 핸콕ᆞ아이언맨 이어 ‘열풍’ 예고

도시의 범죄를 소탕하는 어둠의 기사 배트맨이 <다크 나이트>로 돌아왔다. <배트맨 비긴즈> 이후 3년만에 돌아온 배트맨은 미국 시장에서 무서운 기세로 박스오피스를 장악해나가고 있다. 지난7월18일 미국 전역에서 일제히 개봉해 10일만에 3억1천4백20만 달러를 벌어들였다.

역대 <배트맨> 시리즈는 한국에서 유독 고전을 면치 못했다. 어둡고 암울한 분위기의 배트맨은 한국 정서에 가장 어울리지 않는 영웅으로 인식되어왔다. 하지만 <다크 나이트>는 그간의 <배트맨> 시리즈와 다를 것이라고 보는이도 많다. 미국 흥행 소식이 날개를 달아준 데다 영화가 가지고 있는 힘이 한국 관객을 매료시킬 만하다는 설명이다. <다크 나이트>의 영화적 힘은 평론가의 평가에서도 잘 드러난다.

영화평론가 이동진씨는 “촬영과 편집에서 시나리오와 연기까지 크리스토퍼 놀란이 감독한<다크 나이트>는 한 영화를 이루는 모든 요소가 훌륭하다. 심지어 그간 블록버스터 매너리즘에 빠진 듯했던 한스 짐머의 음악까지 좋다”라고 말했으며, 영화평론가 김봉석씨는 “팀 버튼의 <배트맨>이 그랬듯이, 크리스토퍼 놀란의<다크 나이트>는 이후 모든 슈퍼히어로 영화의 지침서가 될 것이다. 액션, 캐릭터, 스토리, 철학 모든 점에서 탁월하다”라고 극찬했다. 그렇다고 <다크 나이트>가 평론가들만 만족시키는 영화는 아니다. IMDB 평점에서도 역대 최고를 기록하고 있을 정도로, 블록버스터의 미덕인재미의 측면에서도 훌륭한 평가를 받고 있다.

<아이언맨> <핸콕>에서 <다크 나이트>까지올 여름의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에는 어김없이 슈퍼히어로물이 많이 포진되었다. 이들 작품은 흥행으로 이어져 할리우드의 판단이 나쁘지 않았음을 증명하고 있다.

<핸콕>, 기존 슈퍼히어로의 전형 뒤틀어 ‘눈길’

이들 2008년의 슈퍼히어로 3인방은 각기 다른 개성으로 관객에게 다가왔다. <아이언맨>의 토니 스타크는 천재적인 공학자이자 무기업자로 자신이 만든 무기가 어떻게 쓰이는지를 직접 확인하고는 영웅으로 거듭나는 인물이다.

영화에서의 토니 스타크는 억만장자인 데다가 초인적인 능력 없이 첨단 장비만을 통해 영웅이 된다는 점에서 배트맨과 닮아 있지만 선악의 경계에서 명백히 선 쪽에 위치해 있다는 점이 다르다. 토니 스타크라는 인물이 말해주듯<아이언맨>은 철학적 갈등을 온전히 배제하고 엔터테인먼트에 집중한 오락영화다. <핸콕>은 기존의 슈퍼히어로들에 대한 스테레오 타입을 완전히 뒤틀어버린 신세대 영웅이다. 영웅으로서의 사명감도 없고, 알콜 중독에다가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확대시켜버리는 엉뚱한 영웅의 모습이 신선한 쾌감을 던져주었다. 시민들도 그를 영웅이 아닌 사고뭉치로 여긴다. 히어로의 상징인 쫄쫄이 유니폼을 입으면서 선한 영웅으로 거듭나는 후반부 전개로 힘을 잃지만 전반부의 재기 발랄함이 후반부의 전형성을 상쇄한다.

<다크 나이트>의 배트맨은 자신의 정체성과 사회에서의 역할에 혼란을 겪는 반영웅이다. 그는 고담 시의 평화를 위해 평화적이지 못한 방법을 쓰는 자신의 행동에 대한 질문을 끝없이 던지며 법 테두리 안에서의 영웅인 ‘화이트 나이트’ 하비 덴트 검사에게 자신의 임무를 넘겨주려 한다. 세 편 모두 기존의 완벽한 바른생활 영웅상과는 거리가 멀다.

<배트맨>, 슈퍼히어로 영화의 진화에 일조

슈퍼히어로 영화가 꽃을 피운 것은 원작인‘그래픽 노블’의 힘과 슈퍼히어로를 영화로 재창조하며 계속해서 진화시킨 천재 감독들의 힘이크다. DC코믹스와 마블코믹스가 양대 산맥을 이루는 ‘그래픽 노블’은 캐릭터의 저작권이 회사에 있기 때문에 인물의 성격이 다양한 스토리 작가와 만화가의 변주를 통해 완성된다. 그러다 보니 캐릭터가 복합적인 성격으로 진화할수밖에 없다. 그래픽 노블이 만들어낸 캐릭터에 팀 버튼, 브라이언 싱어, 샘 레이미 등 재기발랄한 감독들의 상상력이 접목되면서 슈퍼히어로 영화는 여름을 맞이하는 주류 영화로 편입되었다. 팀 버튼은 <배트맨> 1, 2편에서 고딕적인 분위기의 무대 디자인과 표현주의적인 연출 세계를 보여주었고, 브라이언 싱어는<엑스맨>의 슈퍼히어로 집단에 마이너리티의 색깔을 덧씌워 흥행과 평단 양편에서 모두 찬사를 받았다. 샘 레이미는 쫄쫄이 옷을 벗으면 가난하고 평범한 인간으로 돌아가야 하는 피터 파커의 고민을 첨가해 블록버스터의 단순한 플롯을 피해갔다.

블록버스터와 어울리지 않을 것 같던 팀 버튼, 브라이언 싱어, 샘 레이미가 슈퍼히어로물을 진화시켰다면 역시나 블록버스터와 거리가있어 보이던 크리스토퍼 놀란은 <다크 나이트>로 슈퍼히어로 영화의 진화를 한단계 더 끌어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놀란은 이전 <배트맨> 시리즈 감독을 맡았던 팀 버튼의 회화적인 세계, 조엘 슈마허의 만화적인 세계에서 배트맨을 끄집어내어 현실 세계에 내려놓았다. <다크 나이트>의 고담 시는 더 이상 만화 속 디스토피아가 아니라 현실 속의 메트로폴리탄의 모습이다. 버드아이뷰 시점으로 내려다보는 마천루와 잘 정비된 거리의 외견은 깔끔하고 모던하다. 미디어에 민감하고 여론도 금방금방 바뀌는 고담 시 시민들도 우리네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들은 악당에 대한 불안감을 능력 없는 정부, 검찰, 경찰 심지어는 실질적으로 범죄를 소탕하고 있는 배트맨에게까지 돌린다. 이 점은 결국 ‘다크 나이트’로 남기로 한 배트맨의 마지막 선택에 영향을주는 장치로 사용되고 있지만, 여론과 진실의 간극에 대해 감독이 던지는 물음이기도 하다.

▲ 윌 스미스(왼쪽ᆞ)와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오른쪽ᆞ)는 개성 있는 영웅을 표현해냈다.

올 여름 블록버스터 중 <다크 나이트>가 대중에게 폭발적인 호응을 얻고 있는 것은 빠른스피드의 힘이다. 액션 시퀀스의 잘게 나눠진 편집점도 빠르거니와 내러티브를 구성하는 플롯의 전개도 꽤나 빠르다. 1백52분이라는 러닝타임 동안 이야기가 쉴 새 없이 전개된다. 긴시간을 빠르게 담아냈다는 것은 그만큼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다는 것이다. <다크 나이트>를 보는 관객은 이야기를 쫓아가는 것만으로도 지루함을 느낄 수 없다. IMAX 화면의 실험적 화면이 주는 시각적 쾌감은 덤이다. 이동진씨는 <다크 나이트>의 속도감을 “이영화의 진짜 스피드는 구조와 디테일 모두에서 대단한 탄력과 화술을 지닌 내러티브에서 나온다”라고 표현했다. <다크 나이트>는 배트맨의 영화가 아니라 조커의 영화이기도 하다. 조커를 연기한 히스 레저의 영화다. 크리스찬 베일, 게리 올드만, 아론 에크하트, 매기 질렌홀 등 다른 출연진도 평균 이상의 연기를 보여주지만 히스 레저의 연기는 압도적이다.

상대의 입에 칼을 들이대고 입가의 꿰맨 상처를 혀로 어루만지면서 매번 다른 사연을 늘어놓는 그의 모습은 등골이 오싹할 정도로 섬뜩한 공포감을 준다. 양극단에서 있는 배트맨과 조커를 이어주는 끈을 표현하는 “니가 나를 완성시켜”라는 조커의 대사는 히스 레저의 입을 통해서만 완성된다. 슈퍼히어로물을 만들어가는 일정한 공식들이 있다. 영웅들은 독성 물질에 노출되는 등의 특별한 일을 경험하면서 특수한 능력을 받고, 자신을 상징하는 유니폼이 있으며, 현실과 이상, 자신과 주변인들 사이에서 갈등한다. 이런 공식들은 슈퍼히어로물이 진화하면서 조금씩 변형되어왔다. 완성형이라 평가받는 <다크 나이트>가 앞으로 나올 슈퍼히어로물을 어떻게 바꾸어나갈지 지켜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 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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