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어도 산 권력 ‘박정희’
  • 정락인 (freedom@sisapress.com)
  • 승인 2008.08.19 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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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이후 영향력/81%로 압도적 선두… 김대중 2위, 노무현 6위, 노태우 30위

대한민국 근·현대사를 지나오면서 숱한 인물들이 역사에 오르내렸다.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각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낸 인물들이다. 물론 그 인물 중에는 우리 역사에 암운을 드리운 사람도 적지 않다. 긍정과 부정을 떠나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인물들은 누구일까. <시사저널>은 ‘광복 이후 우리나라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을 다각도로 조사했다.

설문조사 결과 광복 이후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인물 1위(73.3%)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차지했다. 2위 김대중 전 대통령과는 무려 21% 포인트 차이가 났다. 분야별 응답자들 모두 박 전 대통령을 1순위로 꼽았다. 상위 10위권에는 역대 대통령 6명(박정희, 김대중, 이승만, 전두환, 노무현, 김영삼)이 이름을 올렸다. 국가 최고 지도자라는 상징성이 크게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 밖에 독립운동가 김구 선생, 정주영 전 현대그룹 회장, 김일성 북한 주석이 꼽혔다. 외국인 중에는 유일하게 더글러스 맥아더 전 유엔군 최고사령관이 9위(4.1%)에 들어 있다.

우리나라의 역대 대통령 가운데 박정희 전 대통령처럼 평가가 극명하게 엇갈리는 인물도 없다. 대한민국의 ‘빛과 그림자’를 한꺼번에 드리우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장 훌륭한 대통령이면서 가장 강력한 독재자이기도 하다. 박 전 대통령이 걸어온 길도 동전의 양면과 같다. 지금도 일부 국민은 박 전 대통령의 강력한 리더십에 대해 향수를 가지고 있다. 학계에서는 ‘박정희 대통령 연구’가 활발하게 펼쳐지고 있다. 국내외에서 출간된 박정희 전 대통령 관련 책이 6백여 권에 이를 정도다. 때문에 정치권에서는 가끔 “박정희 대통령은 죽었으나 살아 있다”라는 말이 회자된다.

▲ 부산의 한 직업훈련소를 시찰하고 있는 박정희 전 대통령(왼쪽). 아래는 1948년 4월22일 평양에서 개최된 남북 연석회의에서 만난 김구 선생과 김일성 주석. ⓒ연합뉴스

관료ᆞ언론인ᆞ정치인은 DJ, 교수ᆞ문화예술인은 이승만ᆞ김구

박 전 대통령의 장녀인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는 유력한 차기 대선 주자다. 5년 뒤에는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로 부녀 대통령이 탄생할 수도 있다. 박 전 대통령에 대한 국민의 신드롬과 향수는 박근혜 전 대표에게 후광이 되고 있다. 하지만 ‘독재자의 딸’이라는 주홍글씨가 정치 행보에 걸림돌로 작용하는 것도 사실이다.
2위(31.3%)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다. 김 전 대통령은 행정 관료, 언론인, 법조인, 정치인, 기업인, 금융인, 사회단체에서 2위로 꼽았다. 반면 교수와 문화예술인은 각각 이승만 전 대통령과 김구 선생을 2위에 올렸다. 김 전 대통령은 3위다.

한국 정치사에서 김 전 대통령처럼 파란만장한 인생을 산 사람도 드물다. 야당 대통령 후보에서 사형수가 되었다가 한국 정치 사상 최초로 정권 교체를 이루었다. 1997년 11월부터 시작된 국제통화기금(IMF) 관리 체제의 외환위기를 극복하는 구원투수가 되었다. 2000년 6월에는 평양을 방문해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나고 6·15 남북공동선언을 이끌어냈다. 그해 대한민국 최초로 노벨평화상을 탔다. 그러나 김 전 대통령은 재임 중 두 아들이 구속되는 비운을 겪었다. 김 전 대통령은 퇴임 후에도 정치권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어서 ‘막후 정치’라는 말이 나돈다.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 전 대통령이 3위(21.8%)로 꼽혔다. 이 전 대통령은 독립운동을 하다 광복 후 귀국해서 대통령까지 되었다. 그러나 독립운동가 출신이었지만 반민특위를 무력으로 해산하는 등 친일파를 비호했다.

이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도 엇갈린다. 진보 성향의 사람들은 ‘친일 청산을 좌절시킨 장본인’이라고 비하하고 있고, 우익 성향의 사람들은 ‘건국의 아버지’로 치켜세우고 있다. 대전에 있는 배재대학교에서는 이 전 대통령의 동상 제막을 놓고 20여 년간 교수와 학생, 졸업 동문들이 갈등을 빚고 있다. 이 대학은 지난 1987년부터 지금까지 두 번에 걸쳐 동상 제막식을 가졌으나 반대측에서 곧바로 철거했다. 지난 6월에는 세 번째로 동상 제막식을 가졌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이끌었던 백범 김구 선생이 4위(19.8%)다. 김구 선생은 한민족에게는 영원한 독립투사이자 광복의 아버지다. 한국인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 0순위이기도 하다. 김구 선생은 이념과 사상을 초월해 민족을 우선시했다. 민족을 위해 때로는 ‘반공’의 입장에 서기도 했고, ‘용공’도 사양하지 않았다. 이념과 사상 간의 대립이 극에 달하고 있는 오늘날 후손들이 ‘백범 사상’을 돌이켜 볼 때가 아닌가 싶다. 김구 선생은 소설로 다시 돌아왔다. 소설가 김별아씨는 최근 장편소설 <백범>(이룸 펴냄)을 출간했다. 김씨는 “위대한 애국자, 민족의 영웅 등 틀에 박힌 이미지를 걷어내고 백범의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데 치중했다”라고 집필 배경을 밝혔다.

▲ 정주영 전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최근 현대중공업 광고에 등장해 주목을 받았다. ⓒ시사저널 황문성

정주영, 기업인으로 유일하게 10위권에

현대그룹의 창업자인 정주영 전 현대그룹 명예 회장이 5위(9.5%)를 차지했다. 정 전 회장은 현대그룹을 이끌며 국가 산업의 기틀을 만드는 견인차 역할을 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지시를 받고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한 것도 정 전 회장이다. 그는 1987년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후에는 통일국민당을 창당하며 대권에 도전했으나 실패했다. 그 뒤에는 남과 북을 오가며 ‘통일 전도사’ 역할에 매진했다. 1998년 6월16일에는 ‘통일소’라고 불린 소 5백 마리와 함께 판문점을 넘기도 했다. ‘금강산 관광’을 성사시킨 것도 정 전 회장이다.

정 전 회장은 최근 현대중공업 광고에 등장해 세간의 관심을 끌었다. 현대중공업은 조선소 설립 당시 5만분의 1 지도로 선박을 수주했던 일화를 직접 정 전 회장의 육성으로 들려주었다. 경제가 곤두박질친 상황에서 정 전 회장의 메시지는 상당한 울림을 주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6위(9.4%)에 올랐다. 역대 대통령 중 유일하게 비난을 가장 많이 받는 대통령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서거한 후 혼란한 틈을 이용해 12·12 쿠데타로 정권을 잡았다. 5·18 광주 민주화 항쟁을 강제로 진압하면서 수많은 사상자를 내기도 했다. 1987년 대통령에서 물러난 뒤 백담사에서 은둔 생활을 했고, 1996년 12·12 및 5·18 사건 등으로 구속되었다.전 전 대통령은 재임 중 거액의 비자금 조성 혐의로 2천2백5억원의 추징금을 선고받았으나 현재 5백30여 억원밖에 추징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전 재산이 ‘예금 29만원’이라고 말했다가 여론의 호된 뭇매를 맞았다. 29만원밖에 없다던 전 전 대통령은 여전히 호화 생활을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병철ᆞ이건희 부자 나란히 순위에 올라

지난 2월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노무현 전 대통령이 7위(8.6%)다. 노 전 대통령은 전직 대통령 최초로 고향인 김해 봉하마을로 낙향했다. 노 전 대통령은 퇴임 후에 더욱 인기를 끌고 있다. 슬리퍼를 신고 마을 슈퍼에서 담배 피우는 모습, 카우보이 모자를 쓴 채 손녀들을 자전거에 태우고 마을을 누비는 모습, 썰매를 타다 넘어지는 모습 등이 공개되면서 신선함을 주었다. 네티즌들은 노 전 대통령에게 ‘노간지(폼나는 노대통령)’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노 전 대통령은 국가기록물 유출과 관련해 현 정부와 갈등을 빚고 있다. 대통령 재임 중에는 헌정 사상 최초로 국회에서 탄핵되는 일도 있었다.

북한 김일성 주석이 8위(5.2%)에 꼽혔다. 김주석은 1948년 9월9일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수립했다. 마르크스-레닌주의에 입각한 공산 혁명을 추진하고, 1950년 한국전쟁을 일으켰다. 김주석이 사망한 후에는 아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자리를 잇고 있다.

가끔 튀는 발언으로 화제를 일으키는 김영삼 전 대통령이 10위(3.8%)다. 김 전 대통령은 김대중 전 대통령과는 영원한 동지이자 라이벌 관계다. 한때 민주화추진협의회 공동의장직을 맡기도 했으나, 1990년 이른바 3당 합당을 하면서 완전히 틀어졌다. 1992년 12월 제14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문민정부를 출범시켰다.

▲ 1996년 12ᆞ12 쿠데타와 5ᆞ18 사건으로 구속된 전두환 전 대통령(왼쪽). 오른쪽은 청와대에서 회동한 김대중ᆞ김영삼 전 대통령. ⓒ연합뉴스

김영삼 정부는 금융실명제와 부동산 실명 거래 등 경제 개혁 정책을 실시했으나, IMF 체제를 불러오면서 국민에게 큰 고통을 안겨주었다. 김 전 대통령의 차남 현철씨는 ‘소통령’으로 통하며 각종 공직 인사를 좌지우지한 것으로 알려졌다. 현철씨는 한보그룹 특혜 대출 비리 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되기도 했다.

20위권에서는 삼성그룹 창업주인 이병철 전 삼성그룹 회장이 11위(3.7%)다. 김영삼 전 대통령과 1표 차이로 10위권 밖으로 밀렸다. 한국인 최초로 유엔 사무총장에 오른 반기문 총장이 12위(1.8%)이며, 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은 13위(1.6%)다. 삼성그룹 창업자와 전 회장이 20위권에 나란히 올라 있다. 인권운동가로 이름을 떨쳤던 함석헌 선생이 14위(1.0%)다. 함석헌 선생은 YWCA 위장 결혼식 사건에 연루되어 재판에 회부되기도 했다. 평생을 항일·반독재에 앞장섰다.

천주교 김수환 추기경과 독립운동가 여운형 선생이 나란히 15위(0.7%)를 차지했다. 이명박 대통령과 트루먼 전 미국 대통령은 17위(6%)다. 이대통령은 현직 대통령임에도 비교적 하위권 순위에 있다. 진보당 당수 죽산 조봉암 선생이 19위(0.5%)를 차지했다. 조선생은 일제 때 독립운동을 하다가 광복 후 진보당을 창당해 당수가 되었으나 1958년 1월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았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지난해 국가가 조선생의 독립운동을 인정하고 ‘독립유공자’로 인정해야 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정부는 조선생의 독립유공자 자격에 대한 심사를 유보하고 있는 상태다.

김종필 전 자유민주연합 총재, 독립운동가이자 국회의원을 지낸 해공 신익희 선생, 독립운동가 안창호 선생,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 노동운동가 전태일씨는 20위(0.4%)다. 박정희 대통령을 권총으로 사살한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 황우석 박사, 통일운동가 문익환 목사, <사상계>를 창간하고 신민당 국회의원을 지낸 장준하 선생, 미국 케네디 대통령이 나란히 25위(0.3%)다.

서태지ᆞ박원순ᆞ히딩크ᆞ이한열 등도 30위 안에 이름 올려

노태우 전 대통령은 30위(0.2%)에 머물렀다. 30위권에는 정승화 전 육군참모총장, 김두한 전 국회의원, 가수 서태지씨, 박원순 변호사, 이영희 한양대 석좌교수, 이회창 자유선진당 총재, 입적한 성철 스님, 독립운동가 윤봉길 의사, 루즈벨트 전 미국 대통령, 마오쩌둥 전 중국 국가주석,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 거스 히딩크 전 국가대표 축구팀 감독,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 학생운동가 이한열·박종철 씨가 포진해 있다. 가수 서태지씨는 문화예술·연예인 중 유일하게 30위권에 선정되었다.

이 밖에 순위에 오른 국내 생존 인물은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 장하준 고려대 교수, 장세동 전 안기부장, 권영길 민주노동당 국회의원, 김근태 전 열린우리당 의장, 정몽준 한나라당 최고위원, 정몽구 현대·기아차그룹 회장,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문선명 통일교 총재,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 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 김용갑 전 한나라당 의원, 시인 김지하씨, 작가 이문열씨, 함세웅 신부, 조석래 전경련 회장, KAL기 폭파사건의 범인 김현희씨 등이다. 외국인 중에서는 미국 마이크로스프트 창업주 빌게이츠 전 회장,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 등이 눈에 띈다.


▲ 맥아더 장군이 인천에 상륙하고 있다. ⓒ연합뉴스

더글러스 맥아더 전 유엔군 사령관은 우리나라 근·현대사에서 빠질 수 없는 인물이다. 한국 국민에게 ‘맥아더 장군’은 크게 두 가지로 각인된다. 하나는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라는 명언과 1950년 9월15일에 있었던 인천 상륙작전이다. 인천 상륙작전의 성공은 당시 북한군에 밀려 있던 전세를 역전시키고 서울을 탈환하는 계기가 되었다. 전쟁이 종료된 후 한국은 인천 자유공원에 맥아더 장군 동상을 세우고 전쟁 영웅으로 받들어왔다.

이런 가운데 지난 2005년 9월에는 맥아더 동상 철거를 놓고 진보·보수단체가 격하게 대립했다. 그 후 맥아더 동상이 있는 인천 자유공원에서는 매년 인천 상륙작전일을 전후해 맥아더 동상의 철거 찬반 집회가 이어졌다. 올해도 맥아더 동상 철거 논란이 재연될 조짐이다. 진보단체들은 맥아더 동상은 전쟁기념관 등으로 옮겨야 한다는 주장이다.

헨리 하이드 미국 공화당 하원의원은 지난 2005년 9월 당시 노무현 대통령에게 ‘맥아더 장군 동상을 철거하려면 미국으로 보내라’라는 서한을 보내기도 했다. 그는 “인천 상륙작전이 성공하지 않았다면 오늘의 한국은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라며 동상 철거에 대한 서운함을 표현했다. 인천 상륙작전이 있은지 올해로 58년이 되었지만 맥아더 장군은 한국의 진보ᆞ보수 세력 갈등의 한가운데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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