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랑 끝 전술’ 먹히니 북한은 ‘흐뭇’ 남한은 ‘곤혹’
  • 고유환 (동국대 북한학과 교수) (sisa@sisapress.com)
  • 승인 2008.10.21 1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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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테러지원국 해제’, 한반도에 어떤 영향 미칠까

▲ 이명박(맨 왼쪽) 정부는 대북 정책의 철학과 원칙을 재정립해야 한다. 가운데는 부시 미국 대통령, 오른쪽은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 ⓒ연합뉴스

북한의 ‘벼랑 끝 전술’이 이번에도 통한 것일까?  지난 8월26일 핵불능화 중단 조치 이후 위기 수위를 높여온 북한에 미국이 큰 선물을 주었다. 북핵 해결의 ‘중대 기로’에서 미국 국무부가 지난 10월11일 북한을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해제했다. 부시 대통령의 임기를 고려할 때 미국은 폐쇄→불능화→폐기로 이어지는 3단계 북핵 해법의 중간 결산을 위해서는 테러지원국 해제가 불가피하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북한과 미국이 쟁점이었던 검증 수단과 방안에 극적으로 합의함으로써 테러지원국 해제가 이루어졌다. 플루토늄을 기반으로 한 프로그램을 우선적으로 검증하고 우라늄 농축(UEP)과 핵확산 활동은 분리해 순차적으로 검증한다는 데 합의했다. 샘플링과 실증적으로 규명해내는 과학적인 절차의 이용에 관해서도 합의를 보았고, 신고되지 않은 시설에 대해서는 상호 동의에 의해 접근한다는 데 의견을 일치했다. 이러한 합의는 북·미 양국이 요구 사항을 절충하는 이익의 조화점을 찾았기 때문이다. 북한은 UEP와 핵확산에 대해서는 강력히 부인해왔는데 이를 검증한다는 것으로 양보했고, 미국은 특별사찰에 준하는 샘플 채취와 불시 방문, 미신고 시설에 대한 검증 허용 등을 요구했다가 상호동의에 의해 접근한다는 쪽으로 양보했다.

이렇게 양국이 서로 양보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시간에 쫓기기 때문이다. 부시 대통령은 임기 내 외교적 업적을 남겨야 하고, 김정일 위원장은 조속히 북·미 간 적대 관계를 해소하고 경제를 재건해야 하는 상황이다. 이라크 전쟁의 수렁에 빠진 부시 대통령으로서는 북핵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경우 재임 중 북한 핵실험과 핵확산을 막지 못한 오명을 쓰고 퇴임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부시 대통령은 국내외의 일부 반발에도 불구하고 테러지원국 해제 조치를 단행한 것이다.

김정일, 핵 문제 갈등 속 경제 재건 선택한 듯

▲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북한 인민군 제821 부대를 시찰하고 있다. ⓒ연합뉴스

김정일 위원장으로서도 20여 년간 끌어온 핵문제 해결의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미국이 요구한 검증 체계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북한은 불능화 조치와 테러지원국 명단 삭제를 교환해 경제 재건을 본격화하느냐, 아니면 주변 국가와 핵문제를 둘러싼 갈등을 지속하느냐의 갈림길에서 경제 재건을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김정일 위원장으로서는 부시 대통령 임기 내에 핵문제의 가닥을 잡고 경제를 재건해야 후계 체제를 안정적으로 구축할 수 있다는 판단을 했을 것이다.

이로써 북한은 오랜 숙원 하나를 해결했다. 테러지원국 해제에도 불구하고 북한이 얻을 이익이 많지 않다고 하지만, 북·미  적대 관계 해소와 관계 개선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상징적 의미는 매우 크다. 테러지원국 해제로 김정일 위원장의 리더십은 강화될 것이다. 김위원장은 테러지원국 해제를 계기로 핵실험 등 초강수에 밀려 미국이 ‘굴복’했다고 선전하면서 지도력을 강화할 것이다.

그동안 북한은 밖으로 나오려 해도 밖에서 자물쇠가 채워져 있어 나올 수 없다고 주장해왔다. 북한은 테러지원국의 명단에서 벗어남으로써 국제 사회의 책임 있는 일원으로 진입할 수 있는 자격을 얻었다. 북한이 테러지원국 명단에 올라 있을 때는 미국의 각종 국내법 규제에 따라 정상적인 국가 활동을 할 수 없었다. 북한은 1987년 대한항공기 폭파 사건 이후 1988년부터 테러지원국 명단에 올랐다. 북한은 공산 국가로서 미국의 적성국교역금지법에 의한 규제를 받는 가운데 테러지원국으로  20여 년간 이중의 제재를 받았다.

북한의 테러지원국 해제는 북·미 관계 정상화와 북한의 자본주의 세계 경제 체제 편입을 위한 첫걸음이라는 데 의미가 크다. 북한은 북·미 핵협상 과정에서 적성국교역법 적용과 테러지원국 지정을 ‘대북 적대시 정책’의 상징으로 들며 줄기차게 제재를 풀라고 요구해왔다. 이런 상황에서 지난 6월26일 적성국교역법 적용 종료에 이어 테러지원국 해제가 이루어져 북·미 적대 관계 해소와 관련한 북한의 숙원 과제가 하나씩 풀려나가는 것이다.

북한은 테러지원국 명단에 오른 다음부터 △국제통화기금(IMF)·세계은행(IBRD)·아시아개발은행(ADB) 같은 국제금융기구 가입과 차관 제공 금지 △최혜국 대우, 정상교역 관계 등 무역 특혜 부여 금지 △대외 원조 제한 또는 금지 △미국 수출입은행의 자금 지원 금지 △군사용으로도 쓸 수 있는 물품 수출 통제 같은 제재를 받아왔다. 북한이 경제 재건을 위해 세계 경제에 편입하려면 국제통화기금·세계은행 등 국제금융기구에 가입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테러지원국 해제가 필수 전제 조건이다. 북한이 국제금융기구에 가입해서 국제 사회의 일원으로 인정받아야만 의미 있고 규모가 큰 국제 민간 투자가 유입될 수 있다.

그러나 북한이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해제되었다고 해서 미국의 대북 경제 제재가 모두 풀린 것은 아니다. 대북 제재가 수출관리법 등 국내법과 유엔 안보리의 대북 제재 결의안에 따라 복합적으로 중복 적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 국무부는 테러지원국 해제 발표와 동시에, △핵확산 활동 △인권 침해 △공산주의 국가 △2006년 10월 북핵 실험 등의 근거를 들면서 모두 19건의 제재가 남아 있다고 밝혔다. 예를 들어 북한은 공산 국가이기 때문에 인도적 지원 이외에 다른 지원을 받을 수 없으며, 수출입은행법에서는 거래 금지 대상 국가로 지정되어 있다. 따라서 이번 조치는 국제 투자 유치 등 당장의 실질적 혜택보다는 상징적 의미가 크다고 볼 수 있다.

국경을 초월한 세계적 단위의 노동 분업이 이루어지는 글로벌 시대에 자본주의 세계 경제로부터의 고립은 생존을 어렵게 한다. 북한은 이제 밖으로부터의 자물쇠가 풀렸으니 안에 있는 자물쇠를 풀고 세계로 나와 정상 국가의 일원이 되어야 한다.

북한의 '통미 봉남'전략 지속될 가능성도

▲ 크리스토퍼 힐 미국 국무부 차관보가 외교부 청사에서 기자들과 만나 방북 결과를 설명하고 있다. ⓒ연합뉴스

북한에 대한 미국의 테러지원국 해제와 관련해서 우리 사회 일각에서는 대한항공기 폭파 사건에 대한 북한의 사과가 없었다는 것과 완전하고 철저한 핵검증에 합의하지 못했다는 점을 들어 불만을 나타내고 있다. 테러지원국 해제 이후에도 북한이 ‘통미(通美)·봉남(封南)’ 전략을 지속할 가능성에 대한 우려와 한·미 간 대북 공조가 잘 이루어질 것인지에 대한 우려도 제기되고 있다. 11월 미국 대선에서 어떤 후보가 당선되느냐에 따라 한·미 공조의 수위도 달라질 수 있는 전환기에 테러지원국 해제가 이루어짐으로써 한·미 당국 간에도 ‘정세관의 미묘한 차이’가 느껴진다. 우리 정부 당국자가 테러지원국 해제 이후 “(한·미) 양국 간 견고한 협력 관계가 지속되고 있다”라고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완전하고 정확한 검증 체계’가 마련되지 않은 데 대해서 불만을 제기하는 쪽도 있다. 이러한 기류를 반영해서 정부 당국자는 외교부가 미국의 발표 이후 ‘환영한다’는 논평을 내놓은 것에 대해 “이는 테러지원국 해제를 환영한다는 게 아니라 북한이 비핵화의 길로 나오게 된 것을 환영한다는 의미이다”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일본은 일본인 납북자 문제가 아직 해결되지 않은 상황에서 미국이 북한을 테러지원국 지정에서 해제한 데 대해 강하게 불만을 제기하고 있다. 부시 대통령은 북한을 테러지원국 지정에서 해제하기 전에 아소 총리에게 전화를 걸어 미국의 북한 테러지원국 지정 해제 방침에 대한 이해를 구했다. 당시 부시 대통령은 “미국은 일본인 납북 문제를 잊지 않을 것이며, 납북자 문제에 대한 일본의 입장을 강력 지지한다. 북한은 올여름 일본과 약속한 합의를 즉각 이행할 것을 촉구한다”라고 말했다.

미국 백악관은 10월14일 북한의 테러지원국 지정 해제와 관련해 북한측에 지난 1970~80년대 일본인 납북자 문제 해결을 위해 일본측과 협력할 것을 촉구했다.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고든 존드로 대변인은 브리핑을 통해 “우리(미국)는 일본과 북한이 이(납북자) 문제 해결을 위해 계속 협력하기를 원한다. 북한은 일본에 한 약속을 존중하고, 이 문제의 해결책을 제시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존드로 대변인은 아소 다로 일본 총리가 납북자 문제를 내세워 미국의 북한 테러지원국 지정 해제를 비판하면서 6자회담 차원의 대북 에너지 지원에 동참하지 않기로 발표한 뒤 이같이 밝혔다. 백악관의 이같은 언급은 일본 정부가 일본인 납북자 문제가 아직 해결되지 않은 상황에서 미국이 북한을 테러지원국 지정에서 해제한 데 대해 불만을 제기하고 있는 것을 달래기 위한 조치로 풀이된다.

반면 북한은 10월12일 외무성 대변인을 통해 미국이 테러지원국 명단 삭제 의무를 이행한 데 대해 환영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북한은 “10·3 합의의 완전한 이행을 전제로 해 핵시설 무력화 대상들에 대한 검증에 협력한다. 앞으로 10·3 합의의 이행이 완전히 마무리되는 것은 미국의 테러지원국 명단 삭제 조치가 실제적 효력을 발생하며 5자가 경제 보상을 완료하는 데 달려 있다”라고 주장했다. 또한 10월15일 조총련 기관지 <조선신보>는 핵검증에 대한 북한의 협력은 미국을 비롯한 6자회담에 참여하는 다섯 개 국가의 10·3 합의 이행 여부에 달려 있으며, 북한은 “5자의 행동을 면밀히 주시하고 의무 이행을 태만하거나 거부하는 데 대해 묵인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거듭 경제 보상의 중요성을 부각시켰다. 북한 입장을 대변하는 <조선신보>는 “행동 대 행동 원칙에 따르는 비핵화 과정은 검증과 감시를 전제로 한다. 조선의 핵 포기 과정과 더불어 미국을 비롯한 5자의 의무 이행도 검증과 감시를 받아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이어 “금후 실질적인 검증 작업이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는가 어떤가는 예단할 수 없다. 공은 미국을 비롯한 5자에게 넘어갔다”라고 덧붙였다.

 파국으로 치달을 수도 있었던 북핵 해결의 중대 국면에서 테러지원국 해제가 이루어짐으로써 2단계 불능화 문제를 매듭지을 수 있는 전기는 마련되었다. 하지만 경제 보상 문제와 검증 문제를 둘러싼 북한과 5자 간 지루한 협상이 다시 시작될 것이다.

조만간 6자회담이 열리게 되면 북·미 협상 결과를 추인하고 2단계 불능화 문제를 어떻게 마무리하고 3단계 핵폐기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지 큰그림을 그리려 할 것이다. 부시 대통령의 임기를 고려한다면 3단계 문제는 미국의 다음 정부에게 숙제로 넘겨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10년 전 '냉전 패러다임'으로 되돌아가선 안돼

▲ 동해선 남북 출입사무소 출경 게이트. ⓒ연합뉴스


 문제는 테러지원국 해제 이후의 남북 관계이다.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남북 관계는 교착 국면에 빠져 있다. ‘비핵·개방 3000’의 관점에서 보면 비핵 부문에 진전이 있었기 때문에 남북 관계를 진전시킬 수 있는 여건은 마련되었다. 하지만 북한이 대화의 전제조건으로 제시하고 있는 6·15 공동선언과 10·4 선언에 대한 이행 의지를 밝히는 문제, 금강산 관광객 피격 사건 해결, 북측의 지원 요청이 있어야 대북 인도적 지원을 할 수 있다는 기존 입장의 고수 여부 등 이명박 정부가 전향적인 대북정책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해결해야 할 과제가 많다.

북핵 해결 과정에서 한국 정부가 적극적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남북 관계가 원상 회복되어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대북 정책에서 과감한 정책 전환이 필요하다. 전통적 지지층의 반발 등을 의식해 기존의 대북 강경 노선을 고수할 경우 북핵 해결에서 우리 정부의 영향력은 축소되고 북한의 남한 당국 배제 정책은 지속될 것이다. 북한은 남북 갈등을 지속하는 것이 북·미 관계와 북·일 관계 개선에 유리하다고 판단하면 이른바 ‘통미(通美)·봉남(封南)·접일(日)’을 할 것이다. 주변 강대국들은 남북 화해가 진전되는 것보다는 남북 갈등 구조를 활용해서 한반도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할 가능성이 크다. 남북 관계를 단순히 남과 북의 문제로 단선적으로 볼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명박 정부가 핵문제를 해결하고 남북 화해 협력을 진전시키려면 대북 정책을 좀더 정교화해야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6·15 공동선언과 10·4 선언에 대한 분명한 이행 의지를 밝히고 정권 출범 이후 교착된 남북 관계를 풀어야 한다. 두 선언에 대한 인정과 이행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하는 것은 대화 상대를 인정한다는 의미가 있다. 대화 상대를 부정하면서 상생과 공영을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또, 한·미 관계 우선론에서 벗어나 남북 관계와 한·미 관계를 병행 발전시키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한·미 동맹을 강조해왔지만 끝나는 부시 행정부와 시작하는 이명박 정부의 한반도 정세 인식의 차이로 ‘쇠고기 파동’과 테러지원국 해제 과정에서 확인한 것처럼 한·미 관계도 매끄럽지 못했고, 대북 정책 공조도 이루어지지 못했다. 부시 행정부가 대북 식량 지원을 재개한 반면 이명박 정부는 지원을 중단한 것이 한·미의 한반도 정세관 차이에서 오는 대북 정책 차이의 상징적 사례라고 할 수 있다.

표방한 대북 정책 기조와 실제 추진하고 있는 정책이 표리부동해야 신뢰를 쌓을 수 있다. 이명박 정부는 대북 정책의 원칙과 철학을 재정립하고 일관성을 유지해야 한다.

대북 정책의 원칙과 철학이 정립되어 있지 않으면 금강산 관광객 피격 사건 같은 위기가 생길 때 적절히 대처하지 못하는 등 문제를 노출할 수 있다. ‘근본 현안’과 ‘국지적 사건’을 구분하지 못하고 사안별로 맞대응할 경우 큰 흐름의 줄기를 놓칠 수 있다. 이명박 정부는 북핵 해결의 중대 국면에서 남북 관계 재정립을 시도하면서 북핵 해결의 주도적 역할을 상실했다. 금강산 피격 사건을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에 들고나가 북핵 해결의 집중력을 떨어뜨렸다.

이에 이명박 정부의 대북 정책이 10년 전 ‘냉전 패러다임’으로 되돌아갔다는 비판론도 제기되고 있다. 진정한 상생 공영과 실용주의 대북 정책을 구체화하려면 지난 10년간의 대북 정책 전반을 재검토해서 화해 협력 정책을 창조적으로 계승해나가야 할 것이다. 상대를 부정하는 데서 자기 정체성을 찾는 것은 냉전 패러다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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