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 속에 예술혼이 꽃 피는 마을
  • 이재언 (미술평론가) ()
  • 승인 2008.10.28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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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파주시 헤이리에 수준 높은 전시들 대거 개막…자연 환경과 이상적인 조합 돋보여

     

▲ 경기도 파주시 헤이리에서 열리고 있는 전시들은 그곳 자연과 잘 어울린다. 왼쪽은 백중기의 , 오른쪽은 윤해남의 .

결실을 수확하기에 바쁜 경기도 파주 들녘을 지나 예술 공동체 헤이리에 가면 그곳은 또 다른 결실들로 풍성하다. 근래 다양한 예술 프로그램들이 계속 이어지면서 헤이리에는 수많은 예술가들이 혼신의 열정과 노고로 일군 창조의 결실들이 가득하다. 예술적 허기를 채울 수 있는 명소로 자리매김하게 되어 이제는 파주의 헤이리가 아니라 헤이리의 파주가 된 것이다. 초창기에는 예술성이 돋보이는 건축 작품만으로도 볼거리가 되어 건축적 관심의 투어가 많았다. 하지만 이제는 수준 높고 다채로운 전시들이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아지면서 세인들의 관심과 만족도가 좀더 높아졌다. 특히 환경 친화적으로 잘 조성된 이 마을길을 걷는 것부터가 이미 한 폭의 그림이다. 이제는 평일에도 수많은 예술 순례객들이 붐벼 전시장들마다 활기가 넘친다.

백중기의 <들, 꽃, 바람> 전(10월18일~11월16일 리앤박 갤러리)과 윤해남, 한정욱의 <가을-블루 블랙> 전(10월18일~11월5일 아트팩토리)은 헤이리의 자연 환경과 이상적인 조합으로 보인다. 자연을 노래한 작품들이라는 점에서 말이다.

강원도 영월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교편을 잡았다가 전업 작가로 전향해 자연을 노래하며 자연과 나눠온 생생한 교감 및 감흥들을 개성적인 선 굵은 필치로 화폭에 담아온 화가이다. 과거에는 거칠고 굵은 필치로 산이 있는 풍경을 그려왔다. 날마다 대하는 산하에 서린 강인하고도 질긴 생명력과 영감 및 에너지, 그리고 자연이 들려주는 감동적인 이야기들을 동기로 한, 티 없이 맑은 서정의 그림이 사람들의 눈과 마음을 사로잡은 바 있었다.

강렬한 필치 살아 있거나 생동감 넘쳐

▲ 터치아트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천성명의 개인전. 자아에 대한 성찰과 탐구를 담았다.

또한, 그 완강한 산비탈에 기어코 하얀 한 줄기 길을 내고 마는 삶에 충실한 존재로서의 자신이 그 일부를 이루면서도 함께 가야 할 자연 속에서의 정겨운 점경들은 관객과의 소통에 또 하나의 부록이자 선물이다.
작가의 근작들은 상당히 부드럽고 아기자기한 서정성의 그림으로 선회한다. 달빛 아래 펼쳐지는 화사한 들꽃들의 몽환적인 향연, 어디서 오는지를 알 수 없는 향기가 은은하게 퍼지는 듯한 아기자기하고도 싱그런 풍경, 숲 속의 정령처럼 자유롭게 오고 가는 바람결의 달콤한 속삭임, 눈부신 들꽃과 메밀꽃밭의 광채가 밤하늘을 수놓는 황홀한 밤….

이 모든 소재와 동기들은 상상력의 날개를 펼치며 해도 해도 끝없는 신화와 정담을 들려준다. 작가의 그 밤하늘은 그야말로 별자리들이 없어도, 달의 표정조차 감추어도 충분히 들뜰 만한 것이다.

예의 강렬한 필치가 여전히 살아 있으면서도 자연의 근원에 더 가까이 다가간 느낌의 표현이 주목된다. 선 굵은 필치에서 보여준 호방함과 대비되는 세필의 반복적이고도 리드믹한 질서로 구현되는 금잔디 이미지는 더욱 감미로운 음악을 또 하나 새로운 선물로 선보이고 있는 것이다. 억센 바위투성이의 산에 새겨진 굽이굽이 길이 이제는 아늑하고도 정겨운 이야기의 오솔길로 바뀐 것도 눈길을 끈다. 그렇다고 작가가 그러한 디테일을 위해 무언가 전체나 자기 고유의 미감 내지 자기만의 개성적 방법들을 희생하고 있지는 않다. 좀더 큰 화면의 작업은 어떻게 나올까 궁금하기는 하나, 덤덤해 보일 수도 있는 평범한 소재를 감칠 맛 나는 화면으로 전개해내는 감각만큼은 의심할 여지가 없어 보인다.

윤해남과 한정욱의 조합 역시 자연을 화두로 하고 있다. 두 작가는 보길도(해남)와 파주 초야에 은둔하듯 묻혀 작업을 하고 있다.

윤해남에게 자연은 변화무쌍한 표정의 모습으로 등장하고 있다. 수묵과도 같은 유현한 흑백 무채색의 풍경에서부터 현란하기까지 한 생동감 넘치는, 자연의 광채와 다채로운 보색 대비가 화사하게 전개되는 배색의 인상주의적인 양식에까지 다양하고 그 변화가 예측하기 어렵다. 바로 이러한 양상의 자연이라는 실체는 고정된 모습이기보다는 헤라클레이토스가 지적했듯 언제나 유전과 갈등을 반복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는 듯하다. 출작품들이 모두 <씻김의 대지(Showering Gaia)> 연작이다.

이러한 일련의 의인화 양상은 자연에 대한 물활론적인 태도와도 연관되는 것으로 보인다. 자연에 대해 진지하게, 그리고 그 본질의 면면들을 사유하고 관조하는 태도가 엿보인다. 자연은 기계적으로 영감을 베푸는 것이 아니라 진지한 모색과 성찰을 통해 선물처럼 주어진다는 것이다. 우리 인간과의 관계에서, 아니 우리의 입장에서 보는 대지도 인간처럼 씻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위기의 자연을 위해 성대한 제례를 행해야 하는지도 모를 상황을 시사하고 있는 명제가 비장하다.

윤해남이 자연에 투신하는 가운데 성찰을 중시하는 작가라면, 한정욱은 자신의 그림 자체가 바로 자연이 되도록 하는 충동과 속내를 비치고 있다는 점에서 다르다. 오랜 기간 산행을 하며 자연과의 산상 교감을 통해 도달한 작업이 바로 실제 지명에서 따온 명제 <숨은 골> 연작이다. 이는 대상에 대한 재현이나 표현이라는 차원보다는 화폭에 또 하나의 자연을 구현하는 차원이라 말하는 것이 더 좋을 것 같다. 어렴풋이 지각되는 화폭의 이미지는 산맥을 부감법으로 그린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들은 본질적으로 재현에 대한 의지를 앞세운 것이 아니라 그림다운 것, 나아가 자연의 외관이 아닌 본질적 생명력을 반영한 결과로서의 연작이다. 그리하여 붓을 사용하기보다는 손가락만으로 격렬한 몸짓을 했으며, 캔버스는 오로지 행위와 안료의 집적으로서만 말하고, 자연과는 어딘지 모르게 어색한 관계로 돌아선 표현이라는 상투적인 의지보다는 모든 물리적 조건들이 오로지 스스로 발화 행위를 하게 하는 작업인 것이다. 

‘상처받은 자아’ 그린 천성명 전에도 호응

한편, 자아에 대한 지독한 자학적 성찰과 탐구를 해오고 있는 천성명의 개인전(10월10일~11월16일 터치아트갤러리)도 내용이 있는 전시로서 관객의 호응을 얻고 있다. 이미 ‘상처 받은 자아’를 소재로 한 작품으로 널리 알려진 작가의 이미지들은 자아의 무의식과 의식을 넘나들며 탐구해온 진지한 존재론적 성찰과 고백의 결정체이다. 거울을 바라보며 정체성에 대한 고뇌를 하는 인물상, 가해자이면서도 피해자가 되는 샴쌍둥이, 들개들에 쫓겨 두려움에 떨고 있는 모습 등이 그렇게 친숙하고 정겨운 모습은 아니다.

하지만 작가는 특유의 감각으로 극단적인 실존적 상황에 대해서도 별 저항 없이 수용하게 하는 힘을 보이고 있다. 무엇보다 작가가 갤러리 공간을 적절히 해석하고, 아울러 유기적이고도 입체적으로 연출한 내용에 힘입은 바 크다. 사실 작가의 핏기가 없는 회색조 조각상이나 심한 상처투성이의 모습들이 결코 유쾌한 것은 아님에도 전시장 입구 지붕에까지 나와 친절하게 영접하고 있는 작품들의 섬세한 연출은 관객의 경험과 호흡을 자연스럽게 흡입해낸다. 물론 그러한 배려가 아니더라도 전시장을 나서면서 오히려 감정의 침잠을 경험하게 된다. 어떤 면에서는 그것이 바로 우리 자신의 상처 받은 모습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모종의 카타르시스를 경험해서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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