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탕’에서 ‘냉탕’으로 간 거물
  • 감명국 (kham@sisapress.com)
  • 승인 2008.12.01 1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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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대근 전 농협 회장, 막강 권력 휘두르다 끝내 구속…비자금 조성 등 비리 줄줄이 드러날 듯

▲ 농협 노조원들이 서울 중앙회 앞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다. ⓒ연합뉴스

2006년 12월 말 농협중앙회 노조는 새해 들어 신문에 게재할 광고 문안을 작성했다. ‘정대근 회장은 즉각 퇴진하라!’라는 제목이었다. 노조는 이 문안을 신문에 게재하기에 앞서 2007년 1월2일 내부 사이트 게시판에 올렸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이 게시판은 그 이튿날 바로 삭제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농협중앙회 회장이었던 정대근 전 회장은 검찰에 의해 기소된 상태였다.

그는 농협 소유의 양재동 하나로마트 부지 2백58평을 현대자동차에게 66억2천만원에 매각하는 대가로 3억원을 수뢰한 혐의로 2006년 5월 구속 기소되었다. 정 전 회장은 수뢰 혐의를 모두 인정했다. 그는 같은 해 8월 병보석으로 풀려나왔다. 하지만 구속 수감이 어려울 정도로 건강이 악화되어 석방했다는 법원의 주장과는 달리 그는 왕성한 외부 활동을 펼치며 사실상 농협회장직을 수행하고 있었다.

농협 노조와 농민단체들은 “정회장이 병보석으로 나온 상황에서 자신의 최측근을 활용해 다시 전횡을 일삼으며 자신의 치부를 감추려는 행태를 보이고 있다”라고 반발했다. <시사저널>이 입수한 당시 광고 문안을 보면 ‘여러 곳의 차명 부동산 보유설, 정권 실세에 농협 자회사인 휴켐스 저가 매각 등 정대근 회장을 둘러싼 각종 의혹을 철저히 수사할 것을 검찰에 촉구한다’라는 내용이 들어 있다.

검찰 수사 촉구하던 노조 갑자기 ‘발뺌’

하지만 당시 강경하던 노조의 입장은 갑자기 확 바뀌었고, 서울 충정로 농협중앙회 주변은 조용했다. 더 이해하기 힘든 일이 계속 벌어지기도 했다. 2007년 2월 법원이 1심에서 정 전 회장에게 무죄를 선고한 것이다. ‘농협 임직원을 공무원으로 볼 수 없다’는 논지였다. 따라서 그런 정 전 회장을 공무원으로 보고 뇌물죄를 적용해 기소한 검찰의 판단이 잘못되었다는 것이었다. 당시 법원의 요구는 ‘정회장이 공무원이 아닌 만큼 뇌물죄 대신 수재죄(금융 기관의 임직원에 해당하는 죄)를 적용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검찰은 “시행령이나 역대 판례를 보더라도 농협 회장은 공무원이 맞다”라며 반발했다. 당시 이 판결을 두고 법조계에서도 논란이 많았다.

“거액의 돈을 수뢰한 사실을 본인이 스스로 인정했는데도 죄의 적용을 놓고 법원과 검찰이 입장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주요 범죄인을 무죄 선고한 것은 도저히 납득하기 어렵다”라는 반응이 많았다.

농협 주변에서는 “역시 정회장의 파워가 대단하다”라는 감탄사가 터져나오기도 했다. 이미 정 전 회장이 주변에 강한 자신감을 표했는데 그것이 실제로 들어맞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상황은 또 급반전된다. 2007년 7월 법원은 2심에서 정 전 회장에게 뇌물죄를 적용해 법정 구속했다.

‘특가법과 농협법 등은, 정부가 실질적인 지배를 하지 않더라도 지도·감독을 하는 기관은 정부 관리 기업체이며, 이 기업체의 임직원은 준공무원으로 보고 있는 만큼 농협도 이에 해당한다고 봐야 한다’라며 1심의 판결을 뒤집은 것이다. 어떻게 이런 반전에 반전이 이루어지게 된 것일까. 농협 주변에서는 당시 정 전 회장과 정치권 그리고 노조 사이에 여러 가지 알려지지 않은 뒷이야기가 있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우선 상황을 다시 2006년 12월로 되돌려보자. 당시 병보석으로 풀려난 정 전 회장은 연말 내부 인사를 단행했다. 노조는 ‘회장이 자신의 안위를 위해 정치권에 휘둘리는 인사 행태를 극명하게 보여주었다’라며 강력히 반발했다.

1월2일 연이어 사이트 게시판에 광고 문안과 성명서가 올랐고, 거기서 노조가 정 전 회장의 아킬레스건인 ‘비자금 조성설’과 ‘휴켐스 저가 매각설’ 등을 본격적으로 문제 삼으려 하자 협상을 제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 노조측은 게시판에 정 전 회장의 퇴진을 요구하는 광고 문안을 올리면서 동시에 이 문안을 일간지에 일제히 게재하고 곧바로 검찰에 휴켐스 저가 매각 의혹에 대해 고발할 계획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여기서 당시 농협 내부 직원이었던 한 관계자는 “당시 정회장이 긴급하게 노조측과 협상에 나섰다. 정회장은 내부 직원들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 2007년에 총 3백%라는 사상 유례없는 특별상여금을 지급했다”라고 밝혔다. 노조측이 사실상 상여금을 받는 조건으로 정 전 회장의 비리 의혹을 문제 삼지 않기로 동의해주었다는 증언이었다.

이에 대해 노조측은 “광고 문안과 성명서를 내부 게시판에 올렸다가 바로 삭제한 것은 맞다. 하지만 정회장측에서 노조의 요구 사항을 지키겠다는 약속을 해서 내린 것이지 상여금을 받는 조건으로 무마했다는 말은 전혀 터무니없다”라고 강력히 부인했다. 그러나 제보자측도 “확신할 만한 근거 자료를 모두 갖고 있다”라고 반박하고 있어 향후 이 문제는 논란이 계속될 전망이다. 

농촌사랑운동회원 부풀렸다 노대통령 진노

▲ 정대근 전 농협 회장이 하나로마트 부지 매각 과정에서 뇌물을 받은 혐의로 수감되고 있다. ⓒ연합뉴스

정 전 회장은 법원의 1심 판결에 의해 무죄가 선고되면서 농협 회장으로 복귀했다. 그러나 얼마 가지 못했다. 그는 5개월 만인 지난해 7월 2심에서 법정 구속되었다. 그 사이에 또 한 가지 흥미로운 일이 있었다는 것이 또 다른 농협 내부 관계자의 귀띔이다.

“정회장이 노무현 정부 들어 내세운 최대의 치적이 ‘농촌사랑운동’이었다. 일사일촌 맺기 운동 등 도시와 농촌 간의 상생 협력 구도를 만들었고 이는 정부 차원에서도 적극 나서 국무총리실과 전경련 등이 모두 동참했다. 노무현 대통령도 이에 대해 직접 축사를 하며 격려한 바 있다.

그런데 2007년 6월에 결정적인 비리가 포착되었다. 농협중앙회가 고객들의 명의를 불법으로 무단 도용해 ‘농촌사랑운동’ 회원으로 가입시키는 등 100만명 이상의 명단을 사실상 조작했다는 것이다. 당시 국가청렴위원회에서 이를 직접 확인하고, 경찰에 수사 의뢰하기도 했다. 이런 내용이 청와대에 보고되면서 당시 노대통령이 상당히 진노했다고 들었다. 대통령까지 속인 죄로 정회장이 완전히 ‘괘씸죄’에 걸려든 것이다. 그리고 한 달 만에 같은 사안을 갖고 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내렸던 것을 다시 유죄로 둔갑시키더라.”

‘농협 제국’의 제왕으로 절대적 카리스마를 행사했던 정 전 회장이 구속되고, 정권 교체기에 접어들면서 농협 비리에 대한 의혹도 좀더 구체성을 띠기 시작했다. 현재 검찰에서 본격 수사 중인 세종증권 인수 비리와 휴켐스 저가 매각 의혹은 실상 이때 이미 내부 고발자에 의해 제보가 다 된 상태였다. 대검 중수부는 지금의 수사 과정에 대해 “‘농협사랑지킴이’라는 단체에서 제보가 들어와 수사에 착수하게 되었다”라며 특별한 배경이 없음을 강조하고 있지만, 이미 지난 정권에서 불거진 내용들이었다. 제보자로 알려진 농협의 한 관계자는 “(노무현 정부) 당시 검찰에서 ‘현 정부에서는 수사하기 어렵다’라는 말을 직접적으로 하기도 했다”라고 전했다. 

실제 이를 뒷받침할 만한 구체적인 정황도 있다. 2006년 2월 불거진 농협중앙회교류센터 비자금 사건은 사실상 농협 비리의 첫 물꼬였다. 정 전 회장의 집안 인척으로 알려진 정 아무개씨가 대표로 있는 W사가 농협 하청업체로 숱한 공사를 도맡아했고, 그에 대한 대가로 공사 대금의 5%를 관행으로 상납했다는 의혹이었다. 당시 이 수사는 광주지검에서 내부 제보자의 진술에 따라 상당히 구체적으로 진행되었으나, 어쩐 일인지 유야무야되고 말았다.

농협 광주전남본부 노조의 한 관계자는 “당시 노무현 정권의 검찰에서 수사를 하다가 그냥 흐지부지 덮은 것으로 안다”라고 밝혔다.

최측근 비자금 조성 의혹도 불거져

그러나 이것이 오늘날 농협의 거대한 비리를 들추어내게 만든 기폭제 역할을 했다. 농협에서 매번 관행처럼 자행되어온 비자금 조성 비리 의혹이 끊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와중에 터진 것이 정 전 회장의 최측근이자 농협 2인자로 알려진 남경우 전 농협축산경제 대표의 거액 비자금 조성 의혹이었다.

농협 내부에서 제기되는 숱한 제보와 폭로가 노무현 정부의 국무총리실에까지 포착된 것으로 알려졌다. 국무총리실은 이 건을 경찰청에 수사 의뢰했다. 결국 남 전 대표는 지난 7월 구속되었다.

남씨의 구속 수사는 또 다른 파장을 몰고 왔다. 수사 과정에서 의문의 뭉칫돈이 발견된 것이다. 그가 운영하던 ㈜IFK 계좌에 50억원이 입금되었다. 세종증권 홍기욱 사장이 농협의 세종증권 인수 대가로 건넨 50억원이었다. 남씨의 계좌 추적 과정에서 세종증권 의혹이 백일하에 드러났다. 꼬리에 꼬리를 물듯 하나의 수사 과정에서 새로운 비리가 터져나오는 과정이 반복되고 있는 셈이다. 농협 주변에서는 휴켐스 비리도 곧 그 실체를 드러낼 것이라고 입을 모으고 있다. 농협의 비자금 조성과 세종증권 인수 의혹, 휴켐스 저가 매각 의혹이 모두 한 줄기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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