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 감정 상처 내는 엉터리 ‘감정’
  • 안성모 (asm@sisapress.com)
  • 승인 2008.12.09 0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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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청, 정부에 ‘비위 감정평가사’ 현황 제출 / 뇌물 공여·명의 신탁·뻥튀기 감정 등 각종 비리 드러나

ⓒ그림 최익견

부동산 가격을 조사·평가하는 감정평가를 둘러싼 잡음이 끊이지 않고 있다. 거액을 대출받기 위해 평가액을 부풀리는 ‘뻥튀기 감정’에서부터 감정평가사와 공기업 간부와의 ‘불법 돈 거래’까지 각종 비리가 사라지지 않고 있다. 지난 9월 홍 아무개씨를 비롯한 감정평가사 5명이 허위 감정평가서를 발급해주었다가 검찰에 구속되었다. 홍씨 등은 매입가가 31억여 원이던 경기도 의정부 상가 건물에 4배 이상 부풀린 평가서를 발급해주었고, 헐값에 미분양 상가를 인수한 건물주는 이를 근거로 은행 등에서 모두 2백57억원을 대출받았다.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식의 행태도 벌어졌다. 평가사 최 아무개씨는 2004년 5월 같은 법인 소속 동료들과 함께 수원시 광교 신도시 땅을 30억원에 샀다. 명의는 최씨의 친인척으로 했다. 2년 뒤인 2006년 이 땅은 택지개발지구로 수용되었고, 최씨는 매입가의 배가 넘는 65억원의 보상금을 받았다. 그런데 이 땅에 대한 보상액을 책정한 평가사는 다름 아닌 최씨의 형이었다. 공정성 여부를 떠나 부적절하다는 지적을 받았다.

사업 시행사인 경기도시공사도 ‘한몫’ 거들었다. 당시 기획조정실장이던 신 아무개씨는 감정평가 용역을 맡은 10여 개 감정평가법인과 사무용품 납품업자로부터 1억6천여 만원의 금품을 받은 혐의로 구속되었다. 신씨는 또, 받은 돈을 차명 계좌에 관리하면서 일부를 골프, 만찬, 해외 출장 비용 등의 명목으로 사장에게 상납한 것으로 드러났다.

경찰청이 국토해양부에 통보한 ‘비위 감정평가사 현황’에 따르면 뇌물 공여와 명의 신탁으로 적발된 평가사는 모두 44명에 이른다. 이들은 대형 법인에 소속되어 있으며, 한 법인 지사의 경우 10명의 평가사가 무더기로 비리 명단에 올랐다. 이번 수사가 인천 지역과 광교 신도시만을 대상으로 했다는 점에서 전국적인 감정평가 비리 실태는 더욱 심각할 것이라는 지적이다.

개인에게만 ‘솜방망이’ 처벌…법인에 책임 물어야 비리 근절 가능

지난 국정감사에서 현행 감정평가 제도의 문제점을 제기했던 한나라당 김성태 의원은 “경찰청이 이번에 통보한 비리 평가사 실태는 빙산의 일각으로 보고 있다”라고 밝혔다. 김의원은 “현재 구조로는 비리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양심적이고 선량한 평가사들 전체를 매도하고 싶지는 않지만, 정부의 허술한 관리·감독으로 인해 그동안 국민의 재산이 과연 공정하게 평가되었는지 의아심을 갖게 된다”라고 말했다.

비리가 적발되더라도 처벌은 솜방망이에 그치고, 그나마도 대부분 평가사 개인에게만 내려진다는 점이 문제로 거론된다. 법인에게 제대로 책임을 묻지 않아 비리 근절을 위한 관리·감독이 소홀하다는 것이다. 또 비리 전력이 있는 평가사가 소속된 법인들이 정부로부터 우수 감정평가업자로 선정된 상황도 이해하기 힘들다는 지적이다. 현재 일정 수 이상의 평가사를 보유하고 전국에 지점을 두는 등 요건을 갖추면 우수 평가법인으로 지정된다. 정부 산하 공기업인 한국감정원을 포함한 14개 대형 법인이 여기에 속해 있다.

정부에서 매년 실시하는 부동산 가격 공시 업무의 경우 이들 우수 평가법인만이 참여할 수 있다. 국토해양부가 한국감정평가협회에 법인별 평가사 추천을 의뢰하는 형식인데, 국토해양부가 최종 결정을 내리지만 실질적인 권한은 협회가 갖고 있다는 지적이다. 협회 산하 부동산공시위원회가 평가사를 배정하게 되는데, 위원회는 14개 우수 평가법인의 평가사 1명씩이 참여하고 있다. 그런 만큼 배정 기준 자체가 법인의 이익 반영에 치중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보상 평가 역시 이들 대형 법인들이 대부분 맡고 있다. 국토해양부 산하 공기업의 경우 수용 택지에 대한 용지 보상 감정평가를 소속 평가사의 비리가 드러난 법인에게 상당량 발주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김성태 의원이 각 공기업으로부터 제출받은 자료를 분석한 결과 토지공사, 도로공사, 수자원공사 세 곳이 민간 감정평가업자들에게 위임해 평가한 용지 보상금이 31조7천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집계되었다.


도로공사의 경우 지난 5년 간 총 43건의 도로별 토지 보상 감정평가를 시행하면서 11개 법인에 전체 감정평가액의 60%에 이르는 약 1조4천억원의 감정평가를 수행하게 했고, 토지공사도 지난 6년간 총 61건의 지구별 토지 보상 감정평가를 시행하면서 역시 11개 법인들에게 전체 평가액의 67%인 약 30조원의 감정평가 용역을 주었다.

▲ 광교 신도시의 첫 분양 아파트 ‘울트라참누리’ 청약 접수장에서 청약자들이 접수를 하고 있다. ⓒ뉴시스

이 과정에서 평가사가 용역 수주의 대가로 공기업 간부에게 뇌물을 제공하는 일은 일종의 관행이 되었다. 지난 8월에는 주택공사, 토지공사, 인천도시개발공사 등 공기업에서 근무하던 간부들이 무더기로 입건되었다. 인천시 영종지구와 김포 양촌지구 등 신도시 토지보상 때 감정평가 발주 대가로 적게는 100만원에서 많게는 3천5백만원까지 금품과 향응을 제공받은 혐의이다. 용역을 딴 평가사들은 이들에게 감정평가 수수료의 15~20%를 리베이트 명목으로 건넨 것으로 조사되었다.

해당 공기업에서도 이같은 문제점을 인식하고 감정평가업자 선정 기준에 대한 개선책을 내놓고 있다. 토지공사와 도로공사는 전자심사제 도입, 주택공사와 철도시설공단은 본사 선정위원회 심사·선정, 수자원공사는 제안서 심사와 추첨 선정 등을 제시했다. 국토해양부도 평가업자 선정 제도 개선방안에 대한 연구를 용역 의뢰 중이다.

국회에서는 김성태 의원과 민주당 김성순 의원이 각각 관련 법 개정을 추진 중이다. 개정안의 핵심은 정부의 역할 강화에 있다. 각종 감사를 통해 국가의 통제를 받고 있는 공기업에 공시 업무를 맡기는 방안이다. 한국감정원이 직접 업무를 담당하거나 민간 위탁 권한을 갖도록 하면 평가사에 대한 관리·감독 책임을 분명히 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평가업자 관리·감독 업무를 공기업에 이관하는 방안도

▲ ※ (주)한국감정원은 「부동산 가격 조사·평가를 위한 감정평가업자 선정 기준」 제3조 제4항의 단서 조항에 의거 우수 감정평가업자로 봄.

김성태 의원은 “국민은 부동산 공시지가를 매기는 업무나 신도시 개발 때 토지 보상액을 평가하는 업무를 당연히 정부가 하는 줄 알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민간업체인 감정평가법인들로 구성된 한국감정평가협회에다가 그 일을 맡겨놓고 있다”라고 설명한 후 “업체 자율성과 업무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국민의 재산을 평가하는 업무가 얼마나 중요하며, 또 국민의 혈세로 토지를 보상해주고 있지 않은가”라며 정부 역할 강화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금품 제공 등 비리 행위와 관련해서는 평가사는 물론 법인도 징계 처분할 수 있도록 규정을 강화하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 평가사의 자격 취소 대상을 확대하고 뇌물 공여에 대한 행정 처분 규정을 마련하는 한편, 소속 평가사가 뇌물죄를 범할 경우 법인에 대해서도 징계가 가능하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감정평가 업무집행 주체를 평가사에서 법인으로 변경하도록 하고 있다.

김의원은 “업계의 자정 노력도 중요하지만 정부가 관리·감독하는 방안이 나와야 한다. 지금까지 민간에 맡겼으니까 이번에는 공기업이 이 업무를 주관해보자는 것이다. 정부 입법이 쉽지 않은 만큼 의원 입법을 추진해 12월 임시 국회에서 개정안을 통과시키고 내년부터 적용이 가능하도록 할 것이다”라고 밝혔다.

이러한 법 개정 움직임에 협회와 평가사들은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업계의 실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공기업에게 특혜적 지위를 부여하는 부당한 입법이라는 것이다. 협회에 따르면 전국의 평가사 2천7백여 명 중 한국감정원 소속은 2백14명으로 약 7.9%에 불과하다. 결국 개정안에 따른 업무 수행을 위해서는 조직을 확대해야하는데 이는 정부의 공기업 선진화 방안과도 맞지 않다는 주장이다.

일부 평가사의 비리를 전체의 비리로 확대해석해 매도하고 있다는 불만의 목소리도 높다. 박봉욱 기획이사는 “비리를 저지른 데 따른 처벌 강화에는 공감하지만 업계 전체를 비리 집단으로 몰고 가서는 안 된다”라고 강조하면서 “협회에서도 지난해 8월 징계위원회를 신설해 감정평가의 신뢰성 향상을 도모하고 있고, 징계를 받은 평가사는 물론, 소속 법인에도 불이익 처분을 강화하고 있다”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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