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네르바, 제2 절필 선언 “15년 동안 글 안 쓰겠다”
  • 김지영 (young@sisapress.com)
  • 승인 2009.02.10 0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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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성씨가 마침내 법정에 섰다. 검찰은 그가 진짜 미네르바인지 판별하기 위해 ‘경제 실력 테스트’까지 했다. <시사저널>이 입수한 검찰의 ‘피의자 신문 조서’를 공개한다.

▲ ‘미네르바’로 검찰 조사를 받고 있는 박대성씨가 얼굴을 손으로 가리며 검찰 차량에 탑승하고 있다. ⓒ시사저널 임영무

검찰이 지목한 ‘미네르바’ 박대성씨에 대한 공판 준비 절차가 지난 2월5일 서울중앙지법 519호 법정에서 열렸다. 이날 법정에 들어선 박씨는 비교적 건강해 보였다. 판사의 질문에도 전혀 위축되는 기색 없이 또박또박 답변했다. 박씨의 변호인단은 재판부에 박씨의 보석 허가를 요청했으나, 검찰은 부당성을 지적하며 이를 막고 나섰다. 향후 법정 공방이 치열할 것으로 예상된다.

<시사저널>은 박씨가 전기통신기본법 위반 혐의로 검찰에 긴급 체포된 지난 1월7일부터 1월19일까지 검찰에서 진술한 ‘피의자 신문 조서’ 이른바 검찰 진술서 전문(全文)을 단독 입수했다. 진술서에는 1월7일, 8일, 12일, 13일, 19일 닷새에 걸쳐 진행된 검찰의 신문 내용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진술서 전문은 모두 A4용지 100장 분량이다.

이 진술서에는 박씨가 진짜 미네르바인지 여부와 박씨가 지난해 7월30일 포털 사이트 다음 ‘아고라’ 경제토론방에 올렸던 글(‘드디어 외환보유고가 터지는구나’), 12월29일에 올렸던 글(‘대정부 긴급 공문 발송-1보’) 등이 허위사실을 유포한 것인지에 대한 검찰 조사 기록이 가감 없이 수록되어 있다. 월간 <신동아>의 2008년 12월호와 2009년 2월호에 실린 ‘미네르바 기고문과 미네르바 K씨 인터뷰 기사’에 대한 신문 내용도 담겨 있다. 진술서 군데군데 검찰과 박씨가 설전을 벌인 듯한 정황도 눈에 띄었다. 박씨는 특히 “앞으로 10~15년 동안 인터넷에서 글을 쓰지 않겠다”라고 ‘절필 선언’을 하기도 했다.  

‘미네르바 박대성’은 그동안 경제토론방에 올렸던 경제 동향과 전망들이 ‘주관적인 판단과 예측’이었다는 점을 자주 강조했다. 그러면서 “경각심을 고취시키기 위한 순수한 의도였다”라고 주장했다. 허위사실을 유포하거나, 공익을 해할 목적이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다음은 박씨의 진술 내용을 검찰의 신문 날짜와 상관없이 주제별로 재구성한 것이다. 검사와 박씨가 주고받은 문답은 신문 조서 내용 가운데 일부를 그대로 발췌하기도 했다.


▲ 검찰이 박대성씨를 조사한 내용이 담긴 ‘피의자 신문 조서’.

 “내가 진짜 ‘미네르바’다. 오로지 나 혼자 글을 작성했다”

박대성씨는 검찰에 체포된 첫날(1월7일) 서울중앙지검에서 이루어진 피의자 신문에서 “2008년 4월께부터 6월경까지 40~45편의 글을 다음 아고라 경제토론방에 게시했다. 그리고 2008년 7월께부터 본격적으로 글을 써서 같은 해 11월 절필 선언을 할 때까지 약 1백50편 이상의 글을 쓴 것 같다”라고 진술했다. (지난 1월19일 검찰의 5차 신문에서 박씨는 2008년 3월께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다고 진술을 번복했다.) 이에 검찰은 2008년 7월1일부터 10월31일까지 아고라 토론방에 게시된 2백28편의 인터넷 게시 글 목록을 박씨에 제시하고 열람하도록 했다. 다음은 검사와 박씨가 주고받은 신문 내용이다. 

박씨가 긴급 체포되고, 그의 나이(30세)와 학력(2년제 대학 졸업) 그리고 경제 분야 비전공자로 오로지 독학을 통해 해박한 경제 지식을 쌓았다는 점 등이 알려지면서 항간에서는 ‘진짜 미네르바가 맞느냐’를 놓고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그래서인지 검찰은 박씨가 ‘진짜 미네르바’인지 확인하기 위해 그의 경제 지식을 확인하는 조사도 병행했다. 일종의 경제 실력 테스트였던 셈이다. 이를테면, 박씨가 쓴 글들에 나와 있는 ‘토빈의 Q’, ‘BDI 운임지수’, ‘1998년 LTCM 사태’, ‘스프레드(spread)’, ‘역외 NDF 시장’, ‘트리클 다운(Trickle down)’ 등의 표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물었다. 박씨는 이에 대해 “ ‘토빈의 Q’의 의미는 지금 잘 기억나지 않는다”라고 했다. 하지만 ‘BDI 운임지수’나 ‘1998년 LTCM 사태’ 등 나머지 경제 표현에 대해서는 제법 소상하게 막힘없이 설명했다.

‘미네르바’는 지난해 9월10일 ‘결국 리먼브러더스를 쳐먹는구나’라는 제목의 글에서 리먼브러더스가 부도날 것으로 예측했고, 닷새 후인 9월15일 리먼브러더스는 결국, 파산했다. 미네르바의 예측이 적중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미네르바는 어떻게 그처럼 리먼브러더스의 파산을 예측했던 것일까. 항간의 큰 궁금증이기도 했다.


‘미네르바’라는 필명을 사용하게 된 까닭에 대해서는 “(미네르바는) 지혜의 여신으로 알고 있다. 서점에서 그리스 신화와 관련된 책을 보다가 미네르바의 뜻을 알게 되었고, 그것이 마음에 들어 필명으로 사용했다”라고 말했다.


 “<신동아>에 기고문 보내지도,   인터뷰하지도 않았다”

<신동아>는 지난 2008년 12월호에 ‘인터넷 경제 대통령 미네르바 절필 선언 후 최초 토로’라는 기고문을 게재한 바 있다. 이에 대해 박씨는 1월7일 신문에서 <신동아>에 기고문을 보낸 적도 없으며, 인터뷰를 하지도 않았다고 강하게 주장했다.


1월8일, 2차 신문에서도 계속 이어졌다.


이 부분과 관련해, 박씨는 1월13일 네 번째 신문에서 “(다음 사이트 직원으로부터) 두 번 전화가 와서 모두 거부했다. 사이트 관리자라고 했다. 첫 번째는 남자였던 것 같고, 두 번째는 여자였다”라고 밝혔다. 이는 1월8일 진술에서 ‘여직원으로부터 두 번 정도 전화를 받았다’라고 진술했던 것을 번복한 것이다.



박씨는 검찰에서 “그 기고문을 쓴 사람이 누구인지 정말 만나보고 싶다”라면서도 “내 글을 누군가 짜깁기한 것이다. 이 부분은 검사님께서 조사해 주시기 바란다”라고 요청했다.

<신동아>는 지난 2008년 12월호에 ‘미네르바’ 기고문을 게재한데 이어 지난 1월19일 발행된 2월호에서는 ‘<신동아> 기고 미네르바 7시간 심야 인터뷰’ 기사를 내보냈다. <신동아> 2월호에 실린 인터뷰 기사에는 ‘미네르바는 금융계 7인 그룹이며, 박대성은 우리와 무관하다’라고 적시되어 있다. 자신을 ‘미네르바 7인 그룹의 일원’이라고 밝힌 K씨는 <신동아>에서 “구속된 박대성씨는 전혀 모르는 사람이며, 모두 금융권 사람 7명으로 구성된 동호회가 미네르바라는 필명으로 5백건가량 글을 썼다”라고 주장했다.

<신동아> 2월호가 발행된 1월19일 진행된 검찰의 5차 신문에서도 이 부분이 가장 먼저 거론되었다.



“허위 사실 유포 혐의 인정할 수 없다”

박씨는 체포 첫날인 1월7일 검찰이 허위사실을 유포했다고 지목한 지난 12월29일 글 ‘대정부 긴급 공문 발송-1보’에 대해 조사를 받았다.



李처럼 박씨는 지난해 12월29일 글에 대해 ‘과장된 표현’이었다고 시인했다. 1월8일 두 번째 신문에서는 검찰이 허위사실 유포 혐의를 적용한 2008년 7월30일자 글 ‘드디어 외환보유고가 터지는구나’에 대한 집중 조사를 벌였다. 



법원은 지난 1월10일 박씨에 대한 구속영장을 발부했다. 그리고 1월12일 검찰의 3차 조사에서도 이에 대한 문답이 이어졌다. 이날 신문에서는 검찰과 박씨가 ‘외화 예산 환전 업무’에 대한 개념을 놓고 견해 차이를 보였다. 검찰은 기획재정부에서 재정 차관을 외국에 상환하거나, 방위사업청에서 외국에 무기 구입 대금을 지급할 때 필요한 달러를 기획재정부 외화자금과에서 외국환 평형기금의 외화 자산을 이용해 환전해주는 업무라고 판단했다. 이에 반해 박씨는 공무원들이 공무와 관련해 해외로 나갈 때 필요한 달러를 정부에서 지급해주는 정도의 의미로 이해하고 있었다. 다음 날 1월13일에도 검찰과 박씨의 상이한 견해 차이는 좁혀지지 않았다.



“인터넷상 거짓 이력은 흥미 유발용, 별다른 의미 없다”

검찰은 미네르바의 나이와 경력에 대해서도 문제 삼았다. 1월7일 신문 내용을 보자.



검찰은 1월8일 조사에서 ‘왜 피의자는 병원을 방문할 예정이거나 입원 중이거나 요양 중인 것처럼 글을 썼느냐’라고 박씨에 물었다. 그러자 박씨는 “독자들의 흥미를 돋우기 위해서 재미로 쓴 것이다”라고 답했다.
미네르바는 지난 1월5일 마지막 글 ‘마지막에 기댈 것은 결국 희망입니다’에서 자신에 대해 ‘현재 늙고 초라한 노인네이고, 한국전쟁이 종료된 1953년경 공중 폭격을 당해 폐허가 된 서울을 경험하였으며, 미국으로 가서 많은 고생을 해서 30대에 학위를 취득하였으며, 기업 인수·합병, 서브프라임 자산 설계, 일반 가계 대출 수익 모델링, 환율에 따른 주가 모델링 업무에 종사했다’라고 표현한 바 있다.

이에 대해서는 “작은 희망을 가져보자는 의미에서 그런 거짓말을 했다. 일종의 과시욕에 따른 비뚤어진 자아를 내보인 것 같다”라고 말했다. 30세인 박씨가 자신을 ‘노인네’ ‘늙은이’라고 표현한 것에 대해서는 “인터넷에서 흥미 유발용으로 그렇게 쓴 것일 뿐 별다른 의미는 없다”라고 언급했다.


 “예상치 못한 혼란 일으킨 점 반성, 앞으로도 인터넷에 글을 안 쓰겠다”

박씨는 지난해 11월13일 ‘이제 마음속에서 한국을 지운다’라는 제목의 글에서 ‘국가가 침묵을 명령했다’라며 절필을 선언한 바 있다.



박씨는 인터넷에 글을 작성하면서 사용했던 각종 통계와 도표, 인용 자료 등에 대해 “내가 스스로 통계청 홈페이지나 인터넷의 각종 경제 분석 사이트에서 수집한 것이다”라고 밝혔다.

 긴급 체포된 1월7일 첫 번째 심문을 마치면서,


지난해 11월에 이어 ‘제2의 절필 선언’을 했던 셈이다. 
박씨는 정당이나 정치 단체, 시민 단체 등에 가입한 적이 없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일각에서 나오는 ‘정당의 홈페이지에 접속해서 글을 게시한 적이 있다’라는 주장에 대해서는 “그런 적이 없다”라고 잘라 말했다. 

중학 시절부터 경제 독학…재테크 한 적은 없어

박대성이 검찰에서 진술한 “나 박대성은…”
박대성씨는 1991년 서울 ㅊ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서울에 위치한 ㅇ중학교와 ㅎ공업고등학교를 다녔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1997년 경기도에 위치한 ㄷ공업전문대학에 입학해서 무선통신을 전공했다. 1998년 11월 육군에 입대해 강원도에서 복무했고, 2001년 1월 병장으로 만기 제대한 후 복학해서 2001년 7월쯤에 통신 중계기 제조업체인 ㅇ사에 입사했다. 박씨의 첫 직장 생활이었던 셈이다. 그곳에서 생산과 품질 관리 부서에서 6개월가량 근무하다가, 같은 해 12월 말에 그만두었다. 그리고 한두 달 정도 대학 입시를 준비하다가, 2002년 2월 말 대학을 졸업했다. 대학 졸업 직전인 2월 중순쯤에 휴대전화 안테나 설계와 생산 업체인 ㅅ커뮤니케이션에 다시 입사했다. 당시 그는 월평균 1백60만~1백80만원의 급여를 받았다고 밝혔다. 그곳에서 박씨는 1년 정도 근무하면서 검사와 설계, 테스트, 생산 제조 관리 등의 업무를 했으며, 2003년 1월에 퇴사했다.

그리고 같은 해 4월부터 2007년 6월까지 4년 정도 개인 인테리어 사업자 밑에서 사무실 인테리어 일을 배웠다고 진술했다. 당시에는 2백만원 정도를 월급으로 받았다고 한다. 그 이후부터 현재까지 그는 직업이 없다. 무직 상태에서 한때 중국어와 일본어를 배워 국제무역 일을 해보려고 했다가 그만두었으며, 국내에서 개인 물류와 관련된 일을 해보려고 생각하고 있던 중이었다고 했다.

박씨가 경제 분야 비전공자라는 이유로 한때 ‘진짜 미네르바가 맞느냐’는 의혹이 일기도 했는데, 이와 관련해 박씨는 “나는 중학교 때부터 나중에 대학에서 경영학이나 경제학을 전공해야겠다고 생각했고, 그 분야에 대해서 독학을 했다”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어떤 방법으로 독학을 했을까. 그는 “중·고등학교에 다닐 때부터 이론 경제학의 기초 단계부터 공부를 했다. 초창기에 읽은 책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책은 <맨큐의 경제학>(그레고리 맨큐 하버드 대학 교수 저술)이었다. 그후 여러 가지 이론 경제학 서적을 여러 차례 반복해 읽으면서 기초를 닦았다. 그 외에 회계와 마케팅, 주식, 외환, 부동산 등의 분야에 대한 독학을 계속하면서 공부 영역을 넓혀갔다.” 검찰은 서울 마포평생학습관 인터넷 홈페이지에서 박씨의 대출 현황을 조회해보았다. 그러자 2004년 5월9일부터 2007년 7월15일까지 모두 91권의 경제 관련 서적을 대출한 것으로 나타났다. 박씨는 최근에는 직접 도서관에서 책을 읽었다고 했다.

그의 아버지(64)와 어머니(53)는 현재 경기도 부천시 원미구에서 여관을 운영하고 있다. 그는 서울 창천동의 ㅅ빌라에서 여동생(23)과 함께 살았는데, 그의 여동생이 인도로 선교 활동을 떠나면서, 그가 검찰에 체포될 당시에는 혼자 지내고 있었다. 

‘인터넷 경제 대통령’으로 불렸지만, 정작 그는 예금이나 주식 등 유가 증권을 비롯해 다른 재산은 없다고 검찰에서 밝혔다. 박씨는 “주식을 구입해본 적도 없고, 증권 계좌를 개설해본 적도 없다. 수익증권이나 펀드에 가입한 사실도 없다. 일반적인 자유 예금만 했을 뿐, 정기예금이나 적금을 들어본 적은 없다”라고 말했다. 경제 이론에 해박했다 해도 직접 ‘재테크’를 시도했던 적은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또한, 직업이 없었기 때문에 변변한 수입도 없었다. 그렇다면 생활비를 어떻게 조달했을까. 이에 대해 박씨는 “그동안 모아둔 예금으로 생활을 했으나, 지금까지 모두 사용했기 때문에 이제는 다시 직장을 구하려고 생각하고 있다”라고 진술했다. 박씨의 재산으로는 여동생과 함께 살고 있는 7천만원 상당의 창천동 빌라가 있는데, 이 빌라는 아버지로부터 증여받은 것이다. 생활비로 사용하기 위해 이 빌라를 담보로 해 1천만원을 대출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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