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은 ‘체육’을 좋아해
  • 정락인 (freedom@sisapress.com)
  • 승인 2009.02.24 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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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체육회장, 정권 실세들 줄줄이 역임…선거 때마다 파벌 싸움으로 비난받아

▲ 대한체육회 회장 선거에서 50명의 대의원들이 투표하고 있다. ⓒ시사저널 박은숙

국내 체육계의 권력 지형도가 급변하고 있다. 한국 체육의 총사령관 격인 대한체육회장에 박용성 두산그룹 회장(69)이 당선되면서 체육계는 새 판짜기가 불가피해졌다. 박회장은 박상하 국제정구연맹 회장, 이상철 전 한국체육대학 총장과 초접전을 벌인 끝에 신승을 거두었다. 현재 대한체육회는 연세대-고려대-용인대-한국체대 출신들이 ‘4강 파벌’을 구축하고 있다. 이번 체육회장 선거에서는 8명의 후보 중 3명(이상철, 유준상, 장경우)이 고려대 출신이었다. 체육단체 특성상 연·고대를 제외하면 용인대와 한국체대가 양대 축이다.

▲ 축하 인사를 받고 있는 박용성 회장. ⓒ시사저널 박은숙

박회장은 서울대 경제학과 출신이지만 그의 당선에는 용인대 총장이자 대한유도회장인 김정행씨의 헌신적인 지원이 있었다. 김총장도 한때 회장 선거 출마가 유력했으나 박회장 지지로 선회했다. 박회장이 체육회장 출마를 결심하게 된 배경에도 김총장의 끈질긴 설득이 있었다고 한다. 이번 선거에서 김총장은 일찌감치 박회장에 대한 지지를 공개적으로 선언하고 사실상 선거대책본부장 역할을 맡았다. 향후 박용성 회장 체제 하에서 김총장의 역할이 어느 정도 될지 짐작되는 부분이다.

현재 박회장은 대한체육회장 외에도 두산그룹 회장과 중앙대 총장을 겸직하고 있다. 물리적으로 대한체육회에 전념하는 데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선거 기간 중에도 상대 후보들이 이 문제를 적극 부각시켜 박회장 깎아내리기를 시도하는 일이 있었다. 또, 박회장이 대한유도회장과 IOC 위원을 역임했으나 대한체육회 사정에는 아무래도 김총장이 훤하다. 결국, 대한체육회 내의 힘의 균형이 김총장에게 쏠릴 수밖에 없는 구조이다. 김총장은 또 이명박 대통령과 고향이 같은 포항이다.

박회장은 당선 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향후 대한체육회의 외교력 강화, 선진화, 재정 자립을 약속했다. 외교는 박회장이 맡고, 내부 운영은 대한체육회 부회장을 겸직하고 있는 김정행 총장에게 맡길 수도 있다.

이병수 체육시민연대 사무차장은 “박용성 회장 당선은 기대 반 우려 반이다. 오랫동안 체육계에 있었고, 국제적인 감각도 있다. 하지만 체육회에 얼마나 전념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아무래도 김정행 총장이 상당한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이는데 밀실 행정이 되는 것은 아닌지 염려된다”라고 말했다.

현재 대한체육회 산하 아마추어 스포츠 가맹 단체는 55개이다. 이 중 투표권 행사를 하지 못한 씨름협회, 카누연맹, 핸드볼협회 등을 제외한 50개 단체의 회장과 부회장이 투표에 참여했다. 이번 선거에서 박회장을 지지한 단체는 26곳이다. 이들 단체장 중 상당수가 김정행 대한유도회장과 각별한 친분을 맺고 있다.

무보수 명예직이지만 권한은 막강

▲ 강승규 대한야구협회 회장(왼쪽)과 유준상 인라인롤러연맹 회장(오른쪽). ⓒ시사저널 박은숙(왼쪽), 시사저널 이종현(오른쪽)

그렇다면 대한체육회장은 어떤 자리이기에 너도나도 탐내는 것일까. 대한체육회장 자리는 외형상으로는 명예직에 가깝다. 월 판공비 3백만원 정도 이외에는 아무런 보수를 받지 않는다. 이에 반해 권한은 막강하다. 55개 가맹 경기단체를 총괄하고, 16개 시도 지부와 해외 지부를 이끌게 된다. 대한올림픽위원회(KOC) 위원장을 겸임하면서 국내 올림픽 관련 업무도 총괄한다. 연간 1천3백억원에 달하는 대한체육회 예산을 집행하고, 체육회 이사와 KOC 위원에 대한 선임권도 갖는다. 대한체육회 사무처 그리고 태릉선수촌 임직원의 인사권까지 행사하는 명실상부한 ‘체육계의 대통령’이다.

그동안 체육회장 자리는 그 자체가 권력을 상징했다. 역대 회장들이 하나같이 권력 실세들이거나 친정부 인사들이 자리를 꿰찬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역대 주요 회장을 보면 윤치호(9대), 조병옥(16대), 이기붕(17대), 이철승(18대), 박종규(25대), 노태우(28대), 김정길(35대) 씨 등이다. 전두환 정부 때는 정주영 전 현대그룹 명예회장(27대, 1982년 7월~1984년 10월)이 한때 대한체육회를 이끌기도 했다. 김운용 전 IOC 부위원장은 31대에서 33대까지 세 번 연속 연임하면서 무려 9년 동안이나 대한체육회장 자리에 있었다.

올해 선거는 그나마 정부의 입김이 덜한 편에 속했다.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장관은 일찌감치 “대한체육회장 선거에 개입하지 않겠다”라고 선을 그었다. 예전처럼 낙하산 인사는 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이것은 그동안 체육회장 선거에서 정부가 얼마나 깊이 관여했는지를 간접적으로 시사하는 대목이다.

대한체육회장 못지않게 주목해야 할 것이 가맹 경기단체장 선거이다. 전체 55개 중 절반이 넘는 32개 단체가 지난해 말부터 올해 2월 중순까지 개별적으로 단체장 선거를 치렀다.

▲ 임태희 배구협회 회장(왼쪽)과 홍준표 태권도협회 회장(오른쪽). ⓒ시사저널 이종현

오래전부터 대한체육회 산하 가맹 단체장들은 권력 지향형 속성이 강했다. 권력에 따라 춤을 춘 것이 사실이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여당 국회의원들이 단체장으로 대거 입성한 것도 이러한 속성과 무관하지 않다. 이에 대해 체육계 인사들은 “경기단체들이 여당 실세 단체장들을 선호하는 것은 방패막이나 보호막이 되어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형식적으로 선거를 치르지만 내부에서는 힘 있는 실세 회장이 와주기를 은근히 바라고 있다”라고 말한다.

현재 주요 체육단체장을 맡고 있는 국회의원은 6명인데, 한나라당이 4명, 민주당이 2명이다. 대한체육회 산하 가맹 단체장 가운데 홍준표 한나라당 원내대표는 지난해 6월에 태권도협회 회장에 취임했다. 같은 해 10월 임태희 한나라당 정책위의장은 배구협회 회장이 되었다. 강승규 한나라당 의원은 지난 1월 야구협회 회장에 당선되었다. 이종걸 민주당 의원은 지난 2월2일 실시된 농구협회 대의원 총회에서 가까스로 재선에 성공했다.

이밖에 체육단체장을 맡고 있는 국회의원을 보면, 공성진 한나라당 최고위원은 지난 2007년 10월에 열린 한국종합격투스포츠연맹 회장에 추대되었고, 강성종 민주당 의원이 경기도축구협회 회장을 맡고 있다. 유준상 한나라당 상임고문은 지난 1월에 인라인롤러연맹 회장에 취임했고, 최근에 치러진 대한체육회장 선거에 나섰다가 고배를 마셨다. 택견협회는 김학원 전 한나라당 원내대표를 회장으로 영입했다.

현역 국회의원 6명도 단체장 맡아

▲ 지난해 6월 당시 탁구협회 회장 탄핵을 둘러싸고 전·현직 국가대표 감독이 몸싸움을 벌이고 있다. ⓒ연합뉴스

체육단체장 정치인들의 행보는 아무래도 순탄치가 않다. 대표적인 곳이 야구협회와 농구협회이다. 야구협회는 강승규 신임 회장과 직원들이 극한 대립각을 세우고 있다. 당초 여당 국회의원이 와서 반겼던 야구협회가 왜 강승규 회장과 대립하게 되었을까. 그 불씨가 된 것이 강회장이 단행한 파행 인사이다.

강회장은 야구협회장에 당선된 후 독단적으로 인사안을 발표했다. 이상현 사무처장을 대기발령하고 윤정현 총무·홍보이사를 사무처장으로 겸직 발령했으며, 새로 2명의 이사를 임명했다. 기존 체제를 허물고 자기 체제로 바꾸려고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인사가 너무 엉뚱했다. 사무처장으로 발령한 윤정현 이사가 협회 직원 정년 규정인 58세를 넘긴 만 61세였다. 나중에 강회장은 사무처장을 비상근으로 하겠다고 밝혔으나 직원들의 반발을 사고 있다. 강회장이 새로 임명한 기획이사와 국제이사도 결격 사유가 드러나자 면직시키는 촌극을 벌이기도 했다.

이에 분노한 직원들은 급기야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상현 전 사무처장을 비롯한 협회 직원 8명은 성명서에서 ‘강회장의 책임 있는 해명과 시정’을 촉구했다. 협회 대의원 16명도 파행 인사 철회 등을 요구하며 대의원총회 소집을 요구하는 등 파문이 확산되는 상황이다. 

이상현 전 사무처장은 “우리는 잘못된 인사를 철회하라는 것이지 회장 흔들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지금 아마야구는 프로에 위축되어 소외되어 있다. 야구협회가 강회장을 회장으로 선택한 것은 그가 가지고 있는 정치력을 발휘해서 아마야구가 활성화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야당 국회의원을 단체장으로 둔 단체는 바람 잘 날이 없다. 농구협회 회장 연임에 성공한 이종걸 민주당 의원이 숨을 돌릴 시간도 없이 외풍을 맞고 있다. 지난 2월2일 치러진 농구협회장 선거에서는 이종걸 회장이 결선투표 끝에 정봉섭 대학연맹 명예회장을 단 1표 차로 제치고 연임에 성공했다.

그러나 농구인 1백50명으로 구성된 ‘농구를 사랑하는 모임(이하 농사모)’은 최근 성명서를 발표하고 농구협회장 선거의 전면 무효화와 현 집행부의 퇴진을 주장하고 있다. 농사모는 “선거에 참여한 25명의 대의원 중 5명이 자격 없이 표결권을 행사했다. 전북과 대전, 인천 협회는 회장이 공석 중이어서 대의원으로 추천될 수 없어 정관에 따라 대의원 자격이 없다”라고 밝혔다. 이에 대해 농구협회는 2월19일 농사모의 주장을 일일이 반박하는 성명서를 냈다.

씨름협회와 카누연맹도 내분으로 인해 파행을 겪고 있다. 당초 카누연맹회장에는 스포츠토토 오일호 사장이 선출되었으나 일부 대의원이 ‘공정성을 담보해야 하는 스포츠토토 사장이 특정 단체 회장을 맡아서는 안 된다’라는 내용의 진정서를 대한체육회에 제출하면서 자격 논란이 일었고 결국, 사퇴했다.

씨름협회는 지난 1월23일 대의원총회에서 현 최창식 회장의 연임을 의결했지만, 다른 후보자의 자격을 인정하지 않은 점과 일방적인 의사 진행으로 논란이 되었다. 당시 출마 의사를 밝혔던 후보가 이의를 제기해 한국스포츠중재위원회로 넘어간 상태이다. 이러한 체육계의 파행적 운영은 선거 때마다 되풀이 되는 모습이다.

가맹 경기단체장 전체 분포를 보면 아직까지 정치인보다 경제인이 많다. 대한체육회 가맹 경기단체 중 40여 명에 이른다. 이처럼 경제인 단체장을 선호하는 것은 재정적인 지원에 대한 기대 때문이다. 올해 새로 단체장에 선출된 거물급 경제인으로는 핸드볼협회 최태원 SK그룹 회장, 펜싱연맹 손길승 SK텔레콤 고문, 탁구협회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 등이 있다.

우리나라 체육계의 고질적인 병폐는 파벌 문제이다. 위로는 체육계 원로들부터 아래로는 감독이나 선수들까지 파벌이 형성되어 있다. 단체장 선거 때마다 온갖 루머, 비방, 폭력 등이 난무하는 것도 파벌 간의 정파 싸움 때문이다. 출신 지역, 출신 학교, 종목, 감독 등으로 연결되는 체육계 파벌은 정치판을 능가한다. 체육계를 갉아먹는 좀벌레와 같다. 박용성 대한체육회장이나 단체장들이 가장 먼저 척결해야 할 것이 바로 파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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