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장의 유혹’이 넘치는 사회
  • 반도헌 (bani001@sisapress.com)
  • 승인 2009.03.16 2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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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장 드라마 <아내의 유혹> <꽃보다 남자>에 열광하는 세상, 시청자들은 ‘욕의 이중창’으로 답답함을 해소하려 한다.

 ‘막장’이 대세이다. 요즘 TV를 틀면 막장 코드를 가득 담고 있는 막장 프로그램이 넘쳐난다. 여기저기서 고성에 막말, 몸싸움이 예삿일처럼 등장한다. 거친 말만 난무하는 것이 아니라 동료와 주변 사람의 치부를 들추어내는 일도 서슴지 않는 등 극단적인 자극이 별 이유없이 계속 이어진다. 케이블TV 프로그램들만 그렇다면 모르겠지만 최근에 막장을 주도하는 것은 지상파 방송이다. 지상파 TV의 드라마와 예능 프로그램에서 보여주고 있는 소재와 표현 수위는 심각한 수준이다. 오죽하면 조관일 대한석탄공사 사장이 이 프로그램들에 ‘막장’이라는 표현을 쓰지 말 것을 언론에 요청하기까지 했을까. 광산에서 제일 안쪽에 있는 지하의 끝부분을 뜻하는 ‘막장’이라는 말이 좋지 않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 데 대한 항의 표시이다. 하지만 이미 ‘막장’이라 불리고 있는 것을 억지로 다른 표현으로 바꾸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막장 프로그램의 위력은 시청률에서 확인된다. 시청자들은 ‘막장’이라고 부르면서도 이런 프로그램에 더 열광한다. 아줌마들이 눈을 떼지 못하는 SBS <아내의 유혹>은 국민 드라마의 기준이라는 시청률 40%를 넘어섰다. <아내의 유혹>이 방영되는 시간이면 식당이나 공공 장소에 놓여 있는 TV는 으레 <아내의 유혹>에 고정되어 있다. 집안에서 벌어지는 리모컨 전쟁에서도 대부분 아내들이 승리한다. 월드베이스볼클래식도 <아내의 유혹>에는 패퇴했다. 한국과 일본의 2차전이 열렸던 지난 3월9일 <아내의 유혹>은 33.9%의 평균 시청률을 기록하며 각각 9.4%와 8.3%를 기록한 MBC와 KBS의 야구 중계를 가뿐히 눌렀다.

왜 사람들은 막장에 열광할까. 최근의 막장 흐름은 현실과 떼어놓을 수 없다. 자극의 방식과 강도가 거칠고 세졌다고 해서 ‘막장’이라는 말이 나왔다고 하지만 요즘의 현실은 픽션의 자극과 강도보다 훨씬 더 세다. 연쇄 살인마의 살인 장면을 친절하게 두 번 세 번 반복적으로 카메라에 담아 폭력의 자극을 한껏 키운 <추격자>의 살인마는 강호순의 등장으로 현실보다 못했던 것으로 판정났다. 버라이어티쇼에서 욕설을 뱉고 동료에 대한 험담을 늘어놓는 행동도 방송 카메라 앞에서 경기 중 심판에게 거침없이 손으로 쌍욕(주먹감자)을 날리고 총 쏘는 시늉을 한 유명 축구선수의 활약상과는 비교가 안 된다. 국회의 여야 간 대치 상황에서 목 조르기를 하고 테러당했다고 병원으로 직행하는 국회의원들의 활약상은 육체의 폭력성을 한껏 키운 이종격투기보다 더 드라마틱하게 느껴지는 것이 요즘 세태이다.

이런 현실의 자극성이나 의외성에 비하면 방송 프로그램이 담고 있는 자극은 강도가 약한 셈이다. 2000년대 초까지 대중문화를 지배했던 코드 중 하나가 ‘엽기’였다. 엽기 코드에는 코믹한 상황 비틀기가 담겨 있었다. ‘엽기’라는 말을 유행시킨 영화 <엽기적인 그녀>는 기본적으로 코미디였다. 하지만 엽기보다 자극이 세진 ‘막장’ 콘텐츠에서는 엽기의 코믹 코드는 사라지고 공격성은 배가 되었다. 

“이게 어찌 대한민국에서 나올 수 있는 드라마인가”

‘막장’ 코드는 이를 비틀면서 가지고 노는 네티즌이 냉소적인 유머로 2차 가공을 하면서 폭발력이 증강된다. 유명 커뮤니티 사이트인 ‘디시인사이드’는 막장 프로그램과 막장 사회 현실을 꼬집는 패러디물로 호황을 누리고 있다. 패러디는 웃음을 주기 위한 수단이기도 하지만 대상에 대한 조롱이기도 하다. 

요즘 패러디의 대세는 흠잡을 데 많은 막장 드라마이다. 시청률이 높을수록, 허점이 많을수록 패러디의 양이 많아지고 질도 올라간다. 인기 ‘막장 드라마’ <너는 내 운명>에서 연기자 박재정이 보여준 어설픈 연기는 드라마 장면 캡처와 패러디로 재포장되면서 그에게 ‘발호세’라는 별명을 안겨주었다. 현재 최고 인기 막장 드라마인 <아내의 유혹>은 ‘구느님’과 ‘명탐정 애리’를 낳았다. ‘구느님’은 구은재와 하느님의 합성어로 죽음도 비껴가는 전지전능함을, ‘명탐정 애리’는 적재적소에 나타나서 비밀스런 말을 엿듣거나 작은 단서로 기가 막히게 상황을 파악해내는 신애리의 놀라운(?) 능력을 조롱하는 말이다.

이런 프로그램의 시청자 게시판에는 당연히 시청자들의 성토가 이어진다. ID가 queer22인 네티즌은 <아내의 유혹> 홈페이지 게시판에 “이게 어찌 2009년 대한민국에서 나올 수 있는 드라마 플롯인가? 정말 쌍팔년도, 그것도 아니라 1960년대 김희갑·황정순 주연의 <꽃피는 팔도강산>도 이 드라마보다는 이야기의 개연성이 있고 이것보다는 현대적인 플롯이었다”라는 글을 남겼다. 하지만 이런 시청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아내의 유혹>을 빼놓지 않고 본다는 50대 여성 시청자 박 아무개씨는 “주인공이 통쾌하게 복수하는 장면에서 쾌감을 느낀다. 착하게만 복수하는 것이 아니라 더 통쾌하다”라고 말했다. 현실에서는 저질 프로그램을 흉보고 막장 프로그램의 주인공들을 욕하면서 열성적으로 시청하는 시청자를 찾아보는 것이 더 쉽다.  

막장 프로그램들이 득세하는 현상에 대해 ‘주최측’을 성토하는 목소리도 크다. 방송사와 제작진이 자극도가 높은 선정적인 프로그램들로 시청자들의 얄팍한 관심을 사려 한다는 지적이다. 하지만 대중의 관심과 인기의 지표라고 할 수 있는 시청률이 높다는 것은 제작자들만 막장 프로그램을 찍어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시청자도 막장 프로그램의 생산에 지대한 공헌을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제작진에게는 호감이던 비호감이든 시청률이 제품 생산의 바로미터인 셈이다. 지상파 방송사의 한 드라마 PD는 “우리도 울며 겨자 먹기로 가고 있다. 따뜻한 감성의 홈드라마는 시청률이 안 나오고 독한 드라마들이 성공을 하니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다. 예전에는 다루기 조심스러워 꽉 막힐 때 돌파구로나 사용했던 출생의 비밀, 네 남녀의 사각 멜로 구도 등을 이제는 기본으로 깔게 된다”라고 어려움을 토로했다. 제작자와 시청자 어느 한쪽의 문제로 돌리기보다는 하나의 현상으로 짚어볼 필요가 있다는 얘기이다.

막장 프로그램의 확산은 드라마에서 시작해 예능 프로그램의 동참으로 가속화되고 있다. 예능 프로그램의 막장은 출연자들의 막말 논쟁과 궤를 같이한다. KBS <상상플러스 시즌2>는 신정환의 욕설이 걸러지지 않아 방송통신심의위원회의 권고 조치를 받았고, <샴페인>은 다른 사람의 일을 자신의 에피소드처럼 이야기한 김예분과 자신에게 접근했던 남자 연예인의 실명을 공개한 김세아의 발언으로 문제가 되었다.

편집이 가능한 녹화방송의 특성상 막말 논란에 대해 출연자들의 자질만 문제 삼을 일은 아니다. 편집 과정에서 걸러내지 못한 제작진의 책임도 크다. 편집에 충분한 시간적 여유가 없고 방송 후 프레임 단위로 살피며 문제를 찾아내는 네티즌의 집요함을 감안하더라도 제작진에게는 전파를 타기 전에 이런 문제들을 잡아내야 할 책임이 있다.

최근 심야 시간대를 장식하는 예능 프로그램들의 포맷도 예능의 막장화를 부추기는 원인으로 꼽힌다. KBS의 <샴페인>, SBS의 <야심만만2>, MBC의 <놀러와> 등은 MC와 고정 패널, 게스트가 전달하는 개인사가 주가 되는 에피소드 발화를 중심으로 이끌어간다. 출연자들은 자신이 겪었던 흥미로운 일들, 주변 인물의 우스꽝스러운 일들을 돌아가며 이야기한다. 그러다 보니 여기 저기 출연이 겹치는 경우에는 똑같은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인터넷·라디오 등에서 이미 소개되었던 이야기들을 자신이나 주변에서 벌어진 일인 양 포장하기도 한다.

지상파보다 소재의 선정과 표현 수위에서 비교적 제약이 적은 케이블 프로그램들의 막장 행진은 더 두드러진다. 코미디TV <신해철의 데미지>, tvN <독고영재의 스캔들>에 이은 <스캔들 2.0> 등은 페이크 리얼리티라는 포맷 안에서 사생활의 영역을 선정적이고 과격한 행동을 통해 여과 없이 보여준다. 케이블TV의 과격한 실험들은 지상파로 재유입되고 있다. 케이블에서 성공을 거둔 동거 리얼리티 프로그램 <나는 펫> 시리즈는 지상파의 틀 안에서 MBC <우리 결혼했어요>로 재구성되었다. 김구라, 노홍철, 김나영 등 케이블TV와 인터넷에서 터를 닦은 연예인들은 거침없는 언어와 행동을 지상파 프로그램으로 전이시키고 있다. 과거에는 시청자도 지상파에서만큼은 언어와 표현 수위에 대한 나름의 기준을 가지고 있었지만 지금은 케이블 따라 가기로 바뀌고 있다.

▲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케이블TV 시리즈, 편, .

“우리가 보는 재미는 모든 독을 다 탄 것”

최근 예능 프로그램이 막장 신드롬을 더욱 확산시킨다지만 ‘막장 신드롬’의 주역은 역시 드라마이다. 그중에서도 현재 인기 절정에 있는 <아내의 유혹>은 막장드라마의 새로운 개념을 써나가고 있다.

하지만 이 드라마에는 ‘왜’와 ‘어떻게’가 빠져 있다. 스피디한 전개에만 열중하다 보니 등장 인물의 행위에 당위성을 부여하는 것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 과장된 캐릭터와 우연한 사건들이 시청자의 고개를 끄덕이게 하려면 당위성을 부여해야 한다. <아내의 유혹> 제작진은 이런 지적에 무감한 듯하다. 제작진은 죽은 줄 알았던 진짜 민소희(채영인 분)를 다시 등장시킬 것이라고 밝혔다. 죽음에서 살아 돌아오는 ‘환생 신공’이 한 드라마에 두 번씩이나 등장한다는 것은 막장 코드가 아니고서는 이해하기 힘든 구조이다. 

유독 막장이 통하지 않는 곳이 있다. 영화판이다. 거품이 많이 끼었던 영화 부흥기에 제작되었던 창고 영화들이 대방출되었던 지난해 막장 영화라고 불릴만한 작품들도 많이 개봉됐다. 하지만 <날라리 종부전>
<쉿! 그녀에겐 비밀이에요> <맨데이트 : 신이 주신 임무> <4요일> 등은 개봉하자마자 관객과 평단의 몰매를 맞으며 흥행에 실패했다. 물론 때늦은 개봉, 충분하지 못한 마케팅 등이 흥행 부진의 원인이겠지만 가장 큰 원인은 영화 자체였다. 영화판에서는 막장이 통하지 않고 있다.

작가들에게 막장 열풍은 새로운 과제를 던져주었다. <허준> <상도> <올인>을 쓴 히트제조기 최완규 작가는 최근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아내의 유혹>은 작가들 사이에서도 심각한 화두를 던져 준 드라마이다. 기존에 우리가 암묵적으로 지키고 있던 드라마 문법을 전부 파괴하고 있다. 재미가 있어 다음 회가 기다려진다. 하지만 그 재미는 탈 수 있는 모든 독을 다 타서 만들어진 재미 같다. 이제 다른 작가들은 그 놀라운 속도감에 길들여진 독자들에게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어야 하나 고민이 커졌다. 같은 작가 입장이라 ‘막장’이라 말하기는 뭣하지만 화두는 분명 던졌다”라고 말했다.

연기자들도 막장 드라마에 부담을 가지고 있기는 마찬가지이다. 지난 3월10일 MBC 새 주말드라마 <잘했군 잘했어> 제작발표회에서 김승수는 “예민한 부분이라 말하기 어렵지만 동료 선후배 연기자들이 모이면 ‘막장’이라는 것에 안타까움을 내비치기도 한다. 꼭 저렇게까지 해야만 하는가라는 아쉬움이 들기도 한다”라고 말했다.

어찌되었든 막장 신드롬은 이제 부정할 수 없는 하나의 현상이 되었다. 욕을 하는 사람도 많지만 그만큼 막장을 즐기는 사람도 많다. 막장 드라마 자체를 욕하면서 보고, 그 막장 드라마에 등장하는 막장 캐릭터에 대해서도 욕하는 ‘욕의 이중창’으로 막장 현실의 답답함을 해소하는 시청자도 있다.

결국, 대중은 비판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즐기고 있는 것이다. 연세대 심리학과의 황상민 교수는 “막장 드라마를 욕하는 것은 이성이고 보는 것은 감성이다.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현실, 맘속에 있어도 차마 표현하지 못하지만 저럴 것이라는 믿음을 확인하면서 공감대를 얻고 있는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시청자들은 픽션인 드라마, 그중에서도 비현실적이라는 막장 드라마에서도 현실과의 연결점을 찾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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