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 싸움터 된 어린이 배움터
  • 김회권 (judge003@sisapress.com)
  • 승인 2009.03.16 2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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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영재단과 어린이회관 수난의 역사

▲ 1977년 12월20일 박정희 전 대통령이 자녀들과 함께 고 육영수 여사의 동상을 제막하고 있다(왼쪽). 오른쪽은 1977년 12월21일 어린이회관에서 열린 전국 모범여성 표창식에 참석한 박근혜씨(사진 왼쪽). ⓒ연합뉴스

어린이회관은 1970년 7월에 서울 남산에서 개관했다가 1975년 광진구 능동 현재의 터로 이사했다. 어린이회관의 운영을 맡고 있는 육영재단은 1969년 4월에 설립되었다. 1천만원의 출연금을 바탕으로 육영수 여사가 직접 재단 설립에 참여했고 재단 운영에도 직접 나섰다.

어린이회관은 ‘과학’과 관련한 각종 전시물과 강좌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천체·공작·실험 등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이 연중 실시되었다. 특히 방학이 되면 부모의 손을 잡고 방문하는 아이들로 가득 찼다. 민주당 백원우 의원실의 자료에 따르면 설립 후 열흘 만에 육영재단의 재산은 2억6천여 만원으로 26배가 늘어났다. 기부금, 찬조금, 정부보조금, 지방자치단체보조금 등이 줄줄이 들어왔다. 힘센 재단이 운영하는 어린이회관은 1970~80년대 초등학교를 다닌 사람들에게는 일종의 성지 순례 코스였다. 육영재단은 이때만 해도 대표적인 공익 재단으로 자리매김했다.

육영재단 때문에 벌어지는 갈등은 항상 어린이회관에서 벌어진다. 현재도 박근령씨와 박지만씨가 대립 중이다. 하지만 어린이회관이 아이들의 놀이터에서 어른들의 싸움터로 바뀐 경우는 과거에도 더러 있었다. 지금은 뒤로 물러나 있지만 과거에는 박근혜 전 대표도 육영재단을 둘러싼 갈등의 중심에 있었다. 박 전 대표는 1982년 10월27일 육영재단 이사장에 취임했다가 1990년 11월 갑작스레 물러났다. 당시 어린이회관은 박 전 대표를 지지하는 근화봉사단과 박근령씨를 지지하는 숭모회 회원들 사이의 충돌로 시끄러웠다. 숭모회측은 “큰 규모로 성장한 육영재단을 전횡해온 최태민 고문과 박근혜 이사장은 즉시 퇴진하고 근령씨를 추대하라”라고 요구했다.

당시 근령씨측이 반발한 이유를 놓고 ‘자매간의 재산 다툼’ ‘측근끼리의 자리 싸움’ ‘외부 세력의 압력’ ‘최태민 고문의 축출’ 등의 이야기가 떠돌았다. 싸움의 한복판에는 자매보다 주위의 측근들이 자리 잡은 모양새였다. 당시 숭모회측이 박 전 대표를 찾아가 “우리가 원하는 것은 최씨의 퇴진뿐이다”라고 말했다는 이야기가 나온 것으로 보면 최고문에 대한 반발이 크게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헌재까지 간 교육청과의 분쟁

박 전 대표가 이사장직에서 물러난 뒤 그 자리는 근령씨가 물려받았다. 하지만 육영재단은 잊을 만하면 사건이 터지면서 몸살을 앓았다. 불과 4년 뒤인 1994년 7월, 재단 직원들이 박근령씨가 이사장에 취임하면서 함께 온 재단 고위 인사 다섯 명의 퇴진을 요구하면서 갈등이 불거졌다. 직원들은 “박근혜 이사장 시절 최태민 고문이 전횡을 일삼다 물러난 뒤 인물만 박근령 이사장으로 바뀌었을 뿐 똑같은 일이 되풀이되고 있다”라고 주장했다. 재단은 16명의 직원을 업무 방해와 명예훼손 등의 혐의로 경찰에 고소했지만 이틀이 지난 뒤 취하했다. 대신 직원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두 명의 간부 직원을 해임하며 사태를 진정시켰다.

육영재단의 ‘박근령 체제’가 흔들리기 시작한 것은 2001년부터이다. 교육청과의 갈등이 불거지고 곪은 부분이 겉으로 드러났다. 그해 서울 성동교육청은 육영재단에 대해 실태 조사를 벌였다. 육영재단은 교육청의 승인 없이 과학관 내 예식장에서 임대·수익 사업을 하는 등 여섯 건의 지적 사항이 적발되어 시정 조치를 받았다. 하지만 재단측이 이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자 성동교육청은 2001년 12월3일자로 박이사장과 이 아무개 이사에 대해 이사 취임 승인 취소 처분을 내렸다.

2002년 1월 박근령씨는 “지시 사항을 이행 중인데도 교육청이 이사장직을 취소한 것은 권한 남용이다”라고 주장하며 교육청의 처분을 취소하는 행정소송을 냈다. 같은 해 5월 행정법원은 “박씨가 이사장으로 재임하면서 교육청의 시정 지시 사항 중 대부분을 이행하지 못해 재단의 부실화를 초래한 데 비추어 교육청 처분은 가혹하다고 볼 수 없다”라며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박근령씨와 교육청과의 분쟁은 헌법재판소의 결정에 따라 일단락되었다. 2004년 7월 헌법재판소 전원재판부는 박씨가 ‘교육청의 권한 남용’이라며 항소심 재판부에 낸 위헌법률심판 제청 사건에서 “교육청이 특별한 기준 없이 막연히 대통령령에 의해 공익법인 이사장을 해임시키는 행위는 위헌이다”라고 결정을 내렸다. 헌법재판소의 위헌 결정에 따라 박근령씨의 이사장 복귀의 길이 열렸다. 하지만 같은 해 12월 법률이 개정되면서 성동교육청은 박씨의 이사장 취임 승인을 다시 취소했다.

컴퓨터는 구식, 홈페이지 업데이트도 안 돼

육영재단이 성동교육청의 감사 권한에 대한 불인정 소송을 이유로 감사를 거부하자 서울시교육청이 직접 2005년 10월 감사에 착수했다. 그러나 재단측에서 회계서류 등 감사 대상 문서를 제출하지 않아 제대로 된 감사가 이루어지지 못했다. 성동교육청의 감사가 일곱 번 무산된 뒤 벌어진 여덟 번째 감사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자 시교육청은 박이사장을 감사 기피 혐의로 검찰에 고발하기도 했다.

성동교육청과의 다툼은 여전히 진행되고 있다. 2007년 1월 성동교육청은 육영재단 이사 전원에 대해 이사 취임 승인 취소 처분을 내렸다. 그러자 재단의 이사진 전원은 박이사장의 취임 승인 취소 결정 취소 소송과는 별도로 교육청을 상대로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하지만 지난 2007년 8월 서울고등법원은 재단이 성동교육청을 상대로 제기한 이사장 승인 취소 처분 항소심에서 “박씨가 재단을 운영하면서 미승인 임대 사업 등을 한 사실이 인정되고 이에 대한 시정 지시를 따르지 않은 것은 이사장 승인 취소 사유에 해당한다”라며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그리고 2008년 5월 대법원의 확정 판결이 나면서 박근령씨는 이사장직에서 물러났다.

육영재단은 2000년 이후 받은 판결문만 서른 개가 훌쩍 넘는다. 건물의 불법 증축 등으로 1억원대의 이행 강제금을 구청에 내는 등 각종 송사에 휩쓸렸다. 부채도 1백76억원(2006년 결산보고서)에 달했다. 이사장직이 공식적으로 공석이 된 뒤부터 육영재단에 개입하려는 박지만씨측과 재단을 놓지 않으려는 박근령씨측의 갈등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육영재단의 홈페이지에는 2000년대 이후 연혁을 찾아볼 수 없다. 여전히 업데이트되지 않은 채 20세기에 머물러 있다. 최신식 시설을 자랑하던 어린이회관이 이제는 ‘아직도 286컴퓨터를 볼 수 있는 구식 건물’ 정도로 취급당하고 있다. 도처에서 증명되는 육영재단의 구태는 용역이 동원되고 폭력과 점거가 진행되는 등 싸움의 기술에서도 드러난다. 그 사이 어린이들의 놀이터는 점점 스산한 장소로 변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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