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러나지 않게 깊었던‘50년 인연’
  • 신혁진 (불교포커스 기자) ()
  • 승인 2009.06.02 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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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 전 대통령과 불교 / 모친·부인은 독실한 신자…조계종은 49재 봉행등 추모에 앞장

▲ 5월24일 경남 합천 해인사 스님 3백50명이 봉하마을 분향소를 찾아 참배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한 다음 날인 5월24일은 전국의 각 사찰에서 법회가 열리는 음력 초하루였다. 조계종 총무원장 지관 스님은 조계사에서 열린 초하루법회에 참석해 법문을 하기에 앞서 “고인을 위해 기도하자”라고 청했다. 법회 후에는 조계사 마당에 마련된 분향소를 찾아 헌화·분향하고 곧바로 빈소가 차려졌던 김해 봉하마을로 향했다. 지관 스님은 전국의 교구본사 스님들과 함께 빈소를 찾아 향을 사르고 꽃을 올렸다. 그리고는 충격 때문에 사저 밖으로 나오지도 못하고 있는 권양숙 여사를 찾았다. 지관 스님은 권여사를 만난 자리에서 “용기를 잃지 말고 부처님께 기도하면서 살라”라고 위로하며 준비해간 염주를 손에 쥐어주었다.

조계종 산하 전국 100여 사찰에는 분향소가 마련되었다. 봉하마을 빈소에는 장의 기간에 매일 수백여 명의 스님들이 찾아와 고인의 극락왕생을 비는 불경을 외웠다. 해인사와 통도사, 쌍계사, 범어사 등 봉하마을 인근의 조계종 교구본사에서 적게는 100여 명, 많게는 4백여 명의 스님들이 빈소를 찾아 축원 기도를 했다. 고인의 장례가 끝난 후에는 조계사와 봉은사, 해인사, 월정사 등 수많은 사찰에서 49재가 거행되고 있다. 태고종은 종단 소속 3천여 사찰에서 49일 동안 아침과 저녁 예불에서 고인의 명복을 비는 기도를 봉행하고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과 불교와의 인연은 1960년 유년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경남 김해 진영읍에서 10리 정도 떨어진 산골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노 전 대통령. 그의 어머니 고 이순례 여사는, 이 땅의 어머니들이 그랬듯 부처님 전에 가족의 안녕을 기원했다. 노 전 대통령은 과거 불교계 인사들과 만난 자리에서 “어머니는 집에다 부처님을 모셔놓고 아침마다 염불을 하셨다”라고 기억했다. “종을 흔들면서 하셨는데 잠결에 염불소리를 듣곤 했다. 불교에 대해 아주 친숙하다”라고 말했다.

노 전 대통령은 고졸 출신에게 사법시험 응시 자격을 주는 ‘사법 및 행정요원 예비시험’을 통과한 뒤 김해시 장유면 대청리 장유암에 머무르며 사법고시를 준비했다. 장유암은 인도 아유타국에서 바다를 건너온 김수로왕의 부인인 허황옥의 동생 허보옥 스님이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작은 암자이다.

아침마다 아들을 위해 기도하던 어머니의 영정은 아버지 노판석씨와 함께 노 전 대통령이 뛰어내린 봉하마을 부엉이바위에서 불과 2백여 m 떨어진 봉화산 정토원에 모셔져 있다. 이제는 그 옆에 노 전 대통령의 유해와 위패가 자리했다.

노 전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개인적인 인연으로 이야기한다면 선진규 선생님(전 조계종 전국신도회장)이 고향의 형님이다”라고 했다. 또 “어릴 때 뒷산 조그만 암자인 화일사에 가서 놀았다”라고도 했다. 화일사는 봉화사라는 사찰명을 거쳐 지금은 봉화산 정토원이 되었다. 노 전 대통령은 퇴임 후 내려간 봉하마을 사저 인근의 정토원을 가끔 찾았다. 봉화산 정토원은 50년 전 선진규 원장 등 젊은 불교 신자 31명이 의기투합해 ‘호미를 든 관세음보살상’을 조성한 사찰이다. 선진규 원장은 당시 식목일을 맞아 정토원 주변에 나무를 심으러 왔던 노 전 대통령을 기억했다. 선진규 원장은 그런 인연으로 노무현 전 대통령이 퇴임하고 고향인 봉하마을로 돌아올 때 귀향 환영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정책에서는 일부 조화 못 이룬 경우도

노무현 전 대통령 재임 중 불교계와의 공식적인 마지막 만남은 퇴임 직전인 2007년 11월24일 해인사에서 봉행된 대비로전 낙성법회였다. 노 전 대통령은 당시 “오늘은 불교계뿐만 아니라 국가적으로도 대단히 뜻 깊은 날이다. 비로자나 부처님 복장 의식 때 투명하고 공정한 사회, 상생의 나라가 될 수 있기를 기원하는 발원문을 써넣었다”라고 말했다. 노 전 대통령은 또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큰 탈 없이 임기를 마무리할 수 있었던 것도 모두 부처님의 가피가 아닌가 생각한다”라고 덧붙였다.

노 전 대통령은 그러나 자신의 종교색을 적극적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송기인 신부와의 인연으로 가톨릭 세례를 받기도 했지만, 정치인으로서 종교를 분명히 하는 것은 여러모로 부담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대신 부인 권양숙 여사는 자신의 불심(佛心)을 감추지 않았다. 권양숙 여사는 조계종 종정 법전 스님으로부터 ‘대덕화’라는 법명을 받기도 했다. 청와대 생활로 사찰을 찾지는 못했지만 때마다 사람을 보내 연등을 밝혔다. 권여사는 노 전 대통령 퇴임 직전인 2008년 2월22일 청와대를 떠나기에 앞서 봉은사에서 새벽 예불을 올리는 것으로 5년 동안의 청와대 생활을 정리했다. 권여사는 이날 며느리와 함께 봉은사를 찾아 108배를 올리고, 청와대 뒤편에 모셔진 불상의 불전함을 5년 만에 개봉했다면서 2백80만여 원이 든 시주금 봉투를 주지 명진 스님에게 전달했다. 권여사는 “청와대에 있어 봉은사를 찾지 못했다”라며 두 자녀 이름으로 등록되어 있는 인등 기도비 5년치를 납부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불교와의 인연은 ‘정책’에서는 조화를 이루지 못하기도 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2002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발표한 불교계 10대 공약을 통해 당시 큰 반발을 일으켰던 북한산 관통 외곽순환도로 및 천성산·금정산 관통 고속전철 건설에 대해 ‘전면 백지화와 대안 노선 검토’를 천명했다. 하지만 노무현 전 대통령은 공약을 내건 지 1년 만인 2003년 12월22일 해인사를 찾아 조계종 종정 법전 스님을 만나 “사패산 터널 문제에 대해 지난 대선 전에 불교계 입장을 듣고 공사를 백지화한다는 공약을 했는데, 대통령 되고 나서 보니 공사 진척이 많이 되어 그 부분(사패산 터널)만 남아 있더라. 그럼에도 공론 조사를 생각했는데, 참뜻이 전달 안 돼서 이행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런 어려운 사정이 있으니 좀 도와줬으면 좋겠다”라는 말로 공약을 뒤집었다.

그러나 이후 해인사 비로전 건립에 특별교부금을 지원하고 화재로 소실된 낙산사에 복원 성금을 기탁하는 등 불교계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너무 슬퍼하지 마라.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는가. 미안해하지 마라.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 운명이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남긴 짧은 유서의 한 대목이다. 삶과 죽음이 다르지 않다는 ‘생사일여(生死一如)’는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삶과 죽음을 초월한 듯한 글귀는 큰스님들이 열반하며 남기는 ‘임종게’를 연상케 한다. 조계종 총무원장 지관 스님은 만장 글귀를 직접 쓰면서 ‘心體本空寂 無來亦無去 天堂佛刹 逍遼自在’(심체본공적 무래역무거 천당불찰 소요자재)라고 적었다. ‘마음과 육신이 본래 공하고 오고 감이 없으니 극락이건 부처님의 품이건 여유롭게 거니시라’라고 답했다.

노 전 대통령이 유서에 남긴 ‘화장’도 불교식 장례법이다. 또, 노 전 대통령의 주검을 부산대병원에서 봉하마을로 이운해 염습, 성복제(염습 후 지내는 첫 제사), 입관하는 절차도 불교 고유의 작법(作法)에 따라 불교 상·장례 서비스를 제공하는 연화회가 진행했다. 입관식 때는 통도사 주지 정우 스님이 작법염불을 했고, 동국대 불교문화대학원 정진구 교수 등이 함께했다. 노 전 대통령의 봉하마을 분향소에 놓여 있던 위패도 ‘新圓寂(막 진리와 극락세계로 가신 분) 第十六代大統領 盧武鉉 靈駕’라고 불교식으로 적혀 있었다.

고인은 어디로 갔을까. 한 줌 재가 된 육신은 49일 후에는 ‘자연의 한 조각’으로 돌아가고 고인의 넋은 어디를 향해가든 국민의 가슴에 영원히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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