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심’ 없는 사회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
  • 감명국 (kham@sisapress.com)
  • 승인 2009.06.16 1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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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가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이후 갈등과 분열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동력을 잃어가고 있다. 보수와 진보는 양극단으로 갈려서 한 치도 물러서지 않는 혈전을 벌여가며 대한민국을 혼돈으로 몰아넣고 있다. 이

이명준. 그는 해방 직후 타락하고 부조리한 남한 사회에 환멸을 느끼고, 월북한다. 하지만 북한 역시 이데올로기와 허위로만 가득 차 있음을 발견하고 절망한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인민군 장교가 된 이명준은 전쟁포로가 된다. 포로 석방 과정에서 그는 남한도 북한도 아닌 ‘중립국’을 선택한다. 인도로 가는 배 위에서 그는 뛰어내려 자살한다.

최인훈의 소설 <광장>은 ‘밀실’과 ‘광장’이라는 두 상징적 요소를 대비시키고 있다. 주인공은 남한에서 내면의 밀실 세계에 빠져든 채 광장을 꿈꿨다. 하지만 북한에서 발견한 광장은 개인의 삶이 말살된 허상이었다. 최인훈은 광장을 사회적 삶의 공간, 밀실을 개인의 내면적 삶의 공간으로 설정하고 있다. 작가는 “인간의 삶은 두 공간 모두를 필요로 한다. 한쪽만으로 내몰려서는 살 수 없다”라고 말한다.   

‘광장’이 다시 대한민국의 화두로 등장했다. “광장을 열어라”라는 저항의 외침과 “무조건 열 수는 없다”라는 거부의 몸짓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다. 한쪽은 자신을 진보라 부르고, 다른 한쪽은 보수로 이름 붙인다. 하지만 “이 땅에 진정한 진보와 보수가 있는가”라는 의문의 소리만 점점 더 높아지고 있다. 60년 전의 이명준이 지금 서울시청 앞 광장에 서 있다면 무어라 말할까. “왜 한사코 광장만 고집하느냐”라고 할지도 모르고, “왜 무조건 광장을 막으려만 드느냐”라고 할지도 모를 일이다.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에서 우파와 좌파의 대립은 겨우 50년 남짓. 수천만 년을 흐르고 있는 한강에 비하면 물 한 방울 가치도 안 되는 논쟁에 우리 사회가 함몰되어 있다. 이 사회가 지금 후퇴하고 있다.’ 최근 한 신문의 칼럼에 소개된 글이다. 시계가 거꾸로 돌아가는 대한민국의 현 자화상이다.

“정당이 통합은커녕 갈등 더 부추겨”

극심한 혼돈이다. 정치는 실종되었고, 대화와 타협은 사라졌다. 대립과 불신만 반복되고 있다. 어느 정도 예견된 바였다. 6월 정국은 가뜩이나 화약고를 안은 뇌관이었다. 여론조사 기관 ‘리얼미터’가 지난 5월29일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59.8%가 ‘노무현 전 대통령 장례 이후 이념 분열 심화가 우려된다’라고 답했다.  
지난 6월10일 민주당을 비롯한 야 4당이 국회를 나와서 광장으로 향했다. 이들은 시민단체들과 함께 ‘6·10 범국민대회’를 주도했다. 현장에서의 호응에 한껏 고무된 표정이었다. 정세균 민주당 대표는 11일 “우리는 1박2일간의 서울광장 농성과 6·10 범국민대회를 통해 국민 여러분의 기대와 바람이 무엇인지 온몸으로 느꼈다. 국민의 아픔과 고통이 있는 현장에서 늘 함께하겠다”라고 밝혔다.

하지만 민주당의 고민도 깊다. 여전히 ‘기회주의적’이라는 비판적 시각이 가시지 않는다. 생각보다 6·10 대회의 후폭풍이 강하지 않다는 점도 한 부분이다. 이미 내부에서도 “국회로 들어가야 한다”라는 목소리가 강하다.

민주당이 갑자기 ‘친노 정신 계승’을 소리 높여 외치고 나서자, 친노 진영에서도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고 있다. 친노 진영의 좌장 격으로 통하는 한 고위 인사는 “(노 전 대통령 서거가) 좋은 일도 아닌데 그것을 기화로 정치적으로 이용하려 드는 무리들이 많다. 바람직하지 않다”라며 우회적으로 민주당을 못마땅해하는 심기를 표출하기도 했다.

눈치만 보던 한나라당 또한 이런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지난 5월 말 조문 정국 당시에는 “지금은 입 다물고 있는 것이 상책이다”라며 일제히 약속이나 한 듯 바짝 엎드려 있던 여당이 서서히 반격에 나서기 시작했다. 광장에 대한 국민들의 호응이 의외로 강하지 않다는 판단이 선 것이다. 박희태 대표는 6월11일 의총에서 “어제 시청 앞 광장에서 민주당을 비롯한 몇몇 야당이 정치 굿판을 했지만 아무런 국민적 호응을 받지 못하고 끝났다. 왜 국민들이 외면을 했겠나. 국민이 당면한 것은 심각한 경제난이다. 이것을 무시한 정치 놀음에 어떤 국민이 동조를 하겠나”라고 밝혔다. 전에 없던 강성 발언이었다. 그가 “길거리를 방황하는 것은 자멸의 길이다. 돌아오라”라고 소리치자 의총장에서는 박수가 터져나왔다.

주성영 의원은 그동안 ‘금기’시 되던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에 대해 직접 창을 겨눴다. 그는 홈페이지에서 “일국의 최고 권력자를 지낸 사람이 가족들이 부정한 돈을 받은 게 부끄러워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라고 비판했다.

이에 대해 한나라당의 한 초선 의원은 “정치란 게 참…. 회의감이 밀려온다”라고 씁쓸해했다. 대화의 정치를 하자고 나서는 여당의 목소리라면 좀더 배려하고 설득하는 자세여야 한다는 것이 이 의원의 아쉬움이었다. 정당이 사회의 갈등을 흡수하고 통합하는 역할은커녕 오히려 싸움을 더 부추기고 이를 정략적으로 이용하려 든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거세다.

사회 갈등과 분열 양상은 지성의 전당인 학계에도 파고들고 있다. 서울대 교수 1백24명이 지난 3일 ‘이대통령은 사과하라’는 내용의 ‘시국선언문’을 발표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이를 시작으로 시국선언문 발표는 전국의 대학으로 번졌다. 종교단체와 문인단체, 시민단체뿐만 아니라, 대학 총학생회와 청소년단체까지 그 여파가 급속도로 이어졌다.

그러자 보수 성향인 ‘대한민국의 미래를 생각하는 교수들’ 모임 1백28명의 교수들이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있다는 시국선언에 동의할 수 없다”라며 반대 성명서를 냈다. 여기까지는 그래도 괜찮았다. 문제는 그 이후부터이다. 막말과 비방전이 사태의 본질을 왜곡시켰다.

이장무 서울대 총장이 “(교수 시국선언문이) 서울대 전체의 뜻은 아니라고 본다”라고 언급하자, 민주노동당은 “과연 친일파 후손다운 발언이다”라며 맹비난을 퍼부었다. 보수 단체 ‘반국가교육척결국민연합’의 이상진 상임대표는 시국선언에 대해 “민주주의 원칙도 모르는 인간들이 서울대 교수라니 참담할 뿐이다. 좌경화 교수들의 경거망동을 국민의 이름으로 규탄한다”라는 원색적 비난을 퍼붓기도 했다.

언론 역시 객관적이고 공정한 여론의 전달이라는 제기능을 상실한 채 서로 상대방에 대한 원색적인 비난에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는 거센 비판과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검찰 수사 내용을 함께 보도해놓고 다른 신문들에 대해서만 받아쓰기를 했다고 손가락질한다. 전직 대통령이 검찰 수사를 받고 있는데 사실 보도도 하지 말라는 것인가. 정말 ‘당신들이나 잘하라’는 말을 들려주고 싶다.’(동아일보 6월6일자 사설)

‘객관성을 결여한 악의적 기사와 논평 등이 넘쳐났다는 것이다. 이들에 대한 비판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지만, 지난해 촛불 시위 왜곡 보도로, 과거 일제 및 군사 정권과 야합해 세를 불린 그들의 정체가 일반 시민들에게 각인됐다. 문제는 이들에 대한 불신이 언론 일반에 대한 불신을 증폭시키는 점이다.’(한겨레 6월3일자 사설)

▲ 6·10 민주항쟁 22주년을 맞아 6월10일 서울광장에서 열린 범국민대회에서 시위대와 경찰이 몸싸움을 벌이고 있다. ⓒ시사저널 임영무

“여의도 정치를 속히 활성화해야 한다”

국내 유력 일간지의 최근 사설 내용이다. 이른바 ‘조·중·동’으로 불리는 보수 성향의 매체와 ‘한·경’으로 불리는 진보 성향의 매체는 지금 사회 정의와 비리에 대해 날카로운 펜을 휘두르는 대신, 상대방 매체를 흠집내기에 더 펜촉을 날카롭게 갈고 있는 모습이다.

급기야는 관훈클럽에서 지난 6월12일 ‘언론 내부 반목의 벽 허물기’라는 토론회를 갖기에 이르렀다. 여기에서 손태규 단국대 언론영상학부 교수는 “경쟁 언론사의 보도에 대한 왜곡되거나 편협한 시각에 기초한 분석과 악의적인 비판은 언론사와 기자들 사이의 불신과 대립을 격화시키고 독자나 시청자들의 언론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린다”라고 비판했다.

최근 ‘변절’ 논란에 휩싸인 작가 황석영씨를 두둔하는 발언을 하면서 진보 논객으로 알려진 진중권 중앙대 교수 등으로부터 공격을 당하기도 했던 김지하 시인은 현재 언론 인터뷰를 전면 거부하고 있다. 그는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언론이 자기 입맛에 맞게 센세이셔널리즘을 추구하고, 결국 그 욕은 인터뷰를 한 사람만 고스란히 먹게 되어 있다. 더 이상 말 않겠다”라며 언론에 대한 극도의 불신감을 표출했다.

지금의 극심한 사회적 갈등에 대해 이른바 ‘보수’라 자처하는 일부 인사들의 과격한 발언이 도를 넘었다는 지적이 많다. 이는 보수층 내부에서 더 강하게 지적되는 사항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 보수 성향의 전직 언론인은 “원래 과격하고 자극적인 독설은 좌파의 전유물이라 할 수 있는데, 요즘은 어찌된 게 거꾸로 가고 있다. 합리적 보수라 자처할 자격이 없는 극단적인 행동이다”라고 우려했다. 대표적 보수 논객으로 알려진 윤여준 전 환경부장관은 “(일부 보수 인사의 막말에 대해서) 논평할 가치도 없다. 그들이 어찌 대표적 보수 인사인가”라고 불쾌감을 표시했다. 이상돈 중앙대 교수는 “온건하고 합리적인 대다수의 보수들은 현재 침묵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라고 밝혔다.

이에 대해 일부 전문가들은 “지난해 6월의 촛불 집회 때처럼 더 이상 좌파에게 밀리지 않겠다는 우파들의 경계심 탓이다”라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어정쩡한 자세를 취하고 있는 이명박 정부에 대해 좀더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는 판단도 작용한 듯하다”라는 지적도 제기된다.

결국, 이렇게 얽히고 꼬인 실타래는 이명박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풀 수밖에 없다는 목소리가 높다. 김문수 경기지사는 최근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정확한 결단과 과감한 집행이 필요한데, 이대통령은 불행하게도 촛불 시위를 겪으면서 굉장히 소심해졌다”라고 평가한다. 뉴라이트전국연합의 두영택 사무총장도 “정부가 뭐가 겁이 나서 서울광장을 막고 있나. 자신감을 갖고 개방할 것은 개방하되 원칙에 벗어나면 제재하면 될 것 아닌가”라고 질타했다. 보수 성향의 박효종 서울대 교수는 “10년 만에 출범한 실용·보수 정부가 품격 높은 정치로 국민통합을 해야 하는데, 거기에 실패하고 있다”라고 분석한다.  

신율 명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의회 정치의 실종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많은데, 근본적인 책임은 청와대에 있다. 청와대가 의회를 무시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여당이 무기력해지고, 그런 여당을 무시하는 야당이 거리로 뛰쳐나가는 것이다. 청와대는 속히 여의도 정치를 활성화해야 한다”라고 주문했다. 그는 “제도권이 사회적 갈등을 흡수하고 조정해야 하는데, 지금은 오히려 사회적 갈등 속으로 제도권이 스며들고 있는 것이 가장 심각한 문제이다”라고 평가했다. 

서영훈 전 대한적십자사 총재는 “지금도 여기저기서 각 단체들이 성명을 발표하겠다며 나에게 동참을 요구해온다. 하지만 나는 어디에도 참여하지 않겠다고 분명히 했다. 신중해야 하는데 너무 즉흥적이고 가볍다”라고 우려했다.

이만섭 전 국회의장은 “무엇보다 정치권이 심각하게 반성해야 한다. 청와대와 정부는 민심을 천심으로 알고 정말 두려워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실질적인 소통의 정치를 보여야 한다. 여야는 무조건 국회 문을 열어야 한다. 지금은 모두가 감정을 자제하고 이성을 되찾아야 할 때이다”라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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