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권사 직원 사기에 눈 뜨고 코 베인 대기업
  • 이석 (ls@sisapress.com)
  • 승인 2009.10.20 2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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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호석유화학, 3백억원대 주식 담보로 돈 빌렸다가 졸지에 주식 날려

ⓒ일러스트 허경미


지난 2002년 주가 조작 등의 사건을 저지르고 해외로 도주했던 한 증권회사의 전 직원이 지난 9월 붙잡혔다. 인도네시아로부터 강제 출국당해 검찰에게 검거된 박 아무개씨이다. 서울중앙지검 특수 1부에서 사건을 수사하고 있는 중이어서 파장이 어디까지 미칠지 주목된다. 현재까지 확인된 사기 액수만 수백억 원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사건은 8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박씨는 지난 2001년 초 증권사에 근무하면서 대부업체를 인수했다. 이후 자사주 등 3백억원 상당의 주식을 담보로 한 회사에 43억원을 대출해주었다. 하지만 담보로 받은 주식을 박씨가 임의로 처분하면서 이 회사는 큰 손실을 입었다. 또, 코스닥 상장 기업 세 곳의 주가를 조작하는 방식으로 시세 차익도 챙긴 터라 피해자는 더욱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하지만 이 사건은 지난 8년여 동안 진척을 보지 못했다. 박씨가 검찰 조사 도중 해외로 도피했기 때문이다. 피해 기업은 물론이고 검찰조차 넋 놓고 지켜볼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검찰은 박씨가 국내로 압송되면서 그동안 묵혀두었던 파일을 하나씩 꺼내들고 있다. 때문에 박씨 사건과 관련한 피해 규모나 피해 기업에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특히 그는 증권회사에 근무하는 동안에 사채업체를 인수했다. 하지만 회사측으로부터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았다는 점에서 공모자가 있을지 주목된다. 피해 기업이 주거래 은행 대신 제3 금융권인 대부업체를 선택했다는 점도 의문이다. 때문에 검찰 조사에서 박씨의 자금줄과 함께 그 배경이 드러날지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시사저널>이 확인한 바에 따르면 문제의 직원은 현대증권 명동지점에 근무했던 박 아무개씨(39)이다. 그는 지난 2001년 3월 퇴직을 앞두고 ILO라는 대부업체를 인수했다. 이후 그는 시세를 조정하는 방식을 통해 코스닥 기업의 주가를 끌어올려 막대한 시세차익을 거두었다. 박씨가 당시 구입한 대표적인 주식이 ‘인쇄 종가’로 일컫는 ㈜보진재이다. 이 회사는 지난 1999년부터는 A&D(인수 후 개발) 테마주 열풍으로 주가가 100% 이상 급증했다. 박씨는 자신이 인수한 사채업체를 통해 이 회사의 주식을 집중적으로 사들였다가 주가가 오르면 되팔았다. 이같은 방식으로 ㈜택슨과 ㈜일레덱스(현 룩손에너지) 등의 주식도 매입했기 때문에 개미 투자자들이 적지 않은 손실을 입을 것으로 전망된다.

하지만 박씨의 ‘숨바꼭질’은 오래가지 못했다. 한국거래소 레이더에 시세 조정 징후가 감지된 것이다. 거래소는 이같은 사실을 금융감독원에 통보했다. 금감원은 지난 2002년 5월께 박씨를 증권거래법 위반(시세조종 및 보고의무 위반) 혐의로 서울중앙지검에 고발했다.

비슷한 시기 박씨는 또 다른 혐의로 서울서부지검에서 조사를 받고 있었다. 약 3백억원 규모의 금호석유화학 자사주 및 금호산업 주식을 편취한 혐의(특정경제가중처벌법 위반)였다. 금호석유화학은 지난 2000년 10월 금호케미칼을 흡수·합병했다. 유동성을 개선하기 위한 구조조정 차원이었다. 이 과정에서 금호석유화학은 박씨가 운영하는 대출 회사로부터 43억원을 대출받았다. 100억원 상당의 자사주(1백50만주)와 회사가 보유한 금호산업 주식 3백30만주(2백억원 상당)를 담보로 내걸었다. 박씨는 선이자 1억원을 제한 42억원을 이 회사 자금팀장에게 건네주었다.

문제는 여기서 불거졌다. 박씨가 제일상호저축은행으로부터 40여 억원의 대출을 받는 과정에서 담보로 받은 금호석유화학 및 금호산업 주식을 또다시 담보로 내건 것이다. 박씨가 돈을 갚지 않아 제일상호저축은행이 담보로 받은 주식을 처분하면서 금호석유화학은 ‘아닌 밤중에 홍두깨’ 격으로 손실을 입어야 했다. 익명을 요구한 금호그룹의 한 관계자는 “회사가 발칵 뒤집혔다. 당시 박씨에게 대출을 받았던 금호석유화학 자금팀 임원 등 직원들은 이 일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표를 제출했다”라고 귀띔했다.

8년 만에 붙잡힌 범인은 ‘빈털터리’

박씨는 지난 2002년 5월 검찰 조사 과정에서 태국으로 출국했다가 지난 9월 검찰에 붙잡혔다. 검찰은 이 사건을 서울중앙지검 특수1부에 배당했다. 최근 금호석유화학 자금팀장 등이 검찰에서 참고인 조사를 받기도 했다. 때문에 검찰 조사에서 박씨의 사기 행각이 어느 선까지 밝혀질지 주목되고 있다. 현재 검찰이나 금호석유화학측은 사건에 대해 함구하고 있다. 검찰 관계자는 “조사 중인 사건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라면서 대답을 회피했다. 금호석유화학측도 “자금팀장이 최근 검찰에서 참고인 조사를 받고 온 것은 사실이다. 이미 조사가 마무리된 상태로 박씨의 혐의를 확인하는 차원에 불과했다”라고 짧게 언급했다.

물론 금호석유화학의 해명처럼 이 사건이 금호그룹 등 일부 기업의 피해로 일단락될 수 있다. 하지만 재계나 사정 기관 안팎의 시각은 다르다. 여러 정황을 감안할 때 검찰 조사에서 ‘제2, 제3의 금호석유화학’이 나올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이는 검찰의 이례적인 행보에서도 엿볼 수 있다. 검찰은 지난 8월 인도네시아 대사관으로부터 박씨를 강제 출국시킬 예정이라는 통보를 받았다. 이 경우 공항에서 바로 검찰청으로 소환하는 것이 그동안의 관례였다. 하지만 검찰은 직원이 직접 인도네시아로 날아가 박씨의 신병을 인수해 온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후 검찰은 박씨가 해외로 도피하면서 기소중지되었던 사건을 한 곳으로 집중시켰다. 서울 서부지검 등에서 조사하던 사건을 특수1부에 사건을 배당해 김씨뿐 아니라 피해자들을 상대로 조사를 벌였다. 한 사정 기관의 관계자는 “오래전 사건이었기 때문에 한 곳에서 수사를 할 수 있다. 하지만 특수1부가 그동안 사회적으로 파장을 일으킬 수 있는 사건을 다루어왔다는 점에서 검찰의 수사 결과가 주목된다”라고 말했다.

이미 금호석유화학의 경우 이 사건으로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었다. 사건 이후 금호석유화학은 담보로 맡긴 주식을 되찾기 위해 많은 공을 들였다. 하지만 이미 상당 부분 주식이 팔려서 회수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와 관련해 금호그룹의 한 관계자는 “참고인 조사 당시 박씨를 면담했지만 이미 빈털터리 신세였다. 검찰에 엄중한 처벌을 요청하는 선에서 마무리할 수밖에 없었다”라고 토로했다. 상장 회사인 금호석유화학이 왜 주거래 은행 대신 제3 금융권인 대부업체에 대출을 신청했는지도 여전히 의문으로 남는다.

이밖에도 박씨는 현대증권에 근무하던 시절 사채업체를 인수해 코스닥 기업의 주식을 집중적으로 매집할 수 있었다. 때문에 대부업체를 인수한 자금의 출처와 함께 회사에서 아무런 제재를 하지 않은 배경에도 의문이 일고 있다. 이와 관련해 현대증권의 한 관계자는 “당시 박씨는 비정규 직원이었기 때문에 그가 사채업체를 인수한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 사건도 박씨가 퇴사한 이후에 발생했기 때문에 우리와는 무관하다”라고 해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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